•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Ⅳ. 예술
  • 3. 도자
  • 5) 사옹원과 분원
  • (2) 분원

(2) 분원

 고려말부터 이미 사옹원에서 사기번조를 감조하였다. 성종 6년에 전부 시행하였지만 예종 원년(1469)에 육전이 다 완성된≪경국대전≫에 의하면 세조 말년 무렵에는 이미 사옹원의 사기번조가 그 소임 중에서 매우 중요한 업무였다. 이후 사옹원의 사기번조는 법전뿐만 아니라≪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비변사등록≫·≪일성록≫등 왕실의 기본 사료와 일반 문집에도 그 기록이 허다하다.

 이들 기록에서 점차 중앙에 있는 사옹원보다는 직접 사기를 번조하는 곳인 지방의 사기(磁器·陶器)번조소에서 발생하는, 또 거기에 관계되는 기록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그 중에서도 경기도 광주의 사기가 주로 보이기 시작하며, 이 광주사기소가 바로 사옹원의 分院으로 사옹원 사기번조를 현지에서 시행하는 일대 중심지가 되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세종 7년(1425) 명의 사신 尹鳳이 사기를 요구하였을 때, 광주목사에게 하명하여 精細燔造하여 진상하라고 한 것은 광주가 지역적으로 왕도와 가까운 탓도 있지만 광주사기가 精品이기 때문에 특별히 광주목사에게 번조를 지시한 것일 것이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것이 바로≪세종실록지리지≫의 내용이다. 여기에 기록된 자기소·도기소에는 각 所의 수와 소재지 생산품의 질을 상·중·하로 기록하였다. 324개소의 자·도기소의 생산품 중에 상품을 생산하는 곳은 경기도 광주목의 자기소 4개소 중 樊川里 1개소, 경상도 상주목의 자기소 3개소 중 中牟縣北 楸縣里·己未隈里의 2개소, 고령현의 자기소 중 曳峴里 1개소 등 4개소 뿐이며, 중품 생산지는 77개소(자기소 45개소, 도기소 32개소)이다. 세종 때의 이 두 기록 중 명에 진헌하는 백자를 광주목사에게 傳旨하여 정세번조케 하였다는 데 주목해야 할 것 같다. 즉 국초부터 사옹원에서 사기번조에 관여(監造에 해당함)했음은 분명하지만 광주에 사옹원 전속의 분원이 있었다면 사옹원에 명해서 번조하여 진상케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광주사기가 정절한 상품이기는 하지만 이 때까지는 분원이 설치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에도 다만 광주에 자기소·도기소가 있다고 했을 뿐 사옹원이나 분원과의 관련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보다 늦은 기록으로≪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국에 자기·사기·도기를 생산하는 곳이 40개소가 기록되어 있으나, 廣州 土産條에만 “매년 사옹원 관원이 畵員을 인솔하여 가서 御用之器를 감조한다”라고 하였고,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용재총화≫에도 광주의 백자가 고령현의 백자보다 우수하며 광주자기는, “매년 사옹원 관원을 파견하여 봄부터 가을까지 이를 감조하여 왕실에 수납하도록 했다”라고 하였다. 이 두 기록은 앞의 세종 때 기록과 달리 사기를 감조하는 데 광주목사가 아닌 사옹원 관원이 직접 현장에 내려가서 감조한다고 했다는 점이 달라진 것이며,≪용재총화≫에서는 감조하여 왕실에 직접 수납한다고 구체적인 기록까지 하고 있다.

 여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광주백자가 최상품이라는 관점보다는 세종 때에 광주목사가 정세하게 번조하여 진상하던 것을 이 때에 와서 사옹원에서 감조하여 왕실에 수납하였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이것은 광주의 번조소(자기소·도기소)가 광주목사 예하의 지방관요에서 사옹원 예하의 중앙관요로 변모된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변화가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모르나≪경국대전≫공전에 기록된 경공장과 외공장으로 전후의 관계를 연결지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즉 경공장이 사옹원 소속으로 380명이 있고 외공장이 경기·충청·경상·전라 4도 소속으로 99명이 있는데, 그 중 외공장 99명은 경기도에 7명, 충청도에 23명, 경상도에 30명, 전라도에 39명이 있으며, 경기도의 사기장이 가장 적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여기서 외공장을 모두 합하여도 99명인데 사옹원 소속 사기장은 380명으로 외공장의 4배에 가깝다. 경기도 광주의 백자가 우수하여 왕실용 백자를 점차 광주에서 번조하였는데 단지 감조할 뿐 아니라 사옹원의 사기장인이 직접 광주에서 사기를 번조하였고, 사옹원에서는 이들 380명의 사기장인을 감독하고 사기를 번조하여 왕실에 수납할 때까지 모든 과정을 전담하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경기도 사기장 7명은 왕실용 사기번조가 아닌 경기도 내 지방관아용 사기를 제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사옹원 소속 사기장인이 사옹원 관원의 감독하에 직접 왕실용 사기를 광주에서 매년 번조하게 되었다면, 이미 광주가 왕실용 사기번조의 본거지가 된 것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광주에 사옹원 분원을 설치하여 매년 사옹원 관원이 광주에 가서 사기번조를 직접 감독하지 않더라도 분원에서 사기번조의 제반 실무를 담당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추측은 앞으로 새로운 사료의 발견으로 더욱 분명히 밝혀져야 하겠지만, 다음과 같이 분원을 설치하여 조선말까지 분원에서 사기번조의 제반 실무를 이행하고 있었다는 기록은 이러한 추측을 뒷바침해 준다.

 사옹원 분원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승정원일기≫의 인조 3년(1625) 정월과 8월 기사에 보인다. 특히 8월 기사에는 “분원은 앞서부터 수목이 무성한 곳을 찾아서 이동하면서 설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분원을 설치한 곳은 나무를 베어 燔木으로 사용한 지가 벌써 몇 년이 되었으므로 번목이 거의 없다. 그러므로 부득이 수목이 무성한 곳을 찾아서 옮겨 설치하여야만 사기를 번조할 수 있다”756)≪承政院日記≫8책, 인조 3년 8월 3일.라는 구체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서도 분원은 인조 3년 이전에 이미 광주에 설치되었으며 분원을 설치하는 곳은 일정하지 않고 수목이 무성한 곳을 따라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본 사료 이외에 李魯의≪松岩集≫권 3, 畵記條에 “隆慶 4년(선조 3;1570) 여름에 舅監察文公이 沙器廣州地의 司饔分監官이 되었다. 畵工 2인이 禮部로부터 파견되었는데 龍樽을 만들기 위함이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분원이라고 명기되지는 않았으나 ‘사기광주지의 사옹분감관이 되었다’라고 했으므로, 이미 광주에는 사옹원의 분감관이 있었으며 이것이 바로 분원감관이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인조 3년 이전에 분원이 광주에 설치된 것과 연관하여, 선조 3년에는 이미 분원이 광주에 설치되었다고 생각한다.

 분원은 이후 고종 21년(1884)에 민영화되기까지 존속되어 왕실용 사기번조의 어려운 소임을 해 나갔다. 분원 민영화 후에도 왕실용(國用) 자기를 여기서 進拜했기 때문에 관청과의 관계는 어느 정도 유지되었으나, 이후 분원은 30명의 서리 가운데서 선출되는 都諸員에 의해서 관권의 지배없이 경영되었다. 분원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사용되었으며 지금도 그 지방 이름이 京畿道 廣州郡 南終面 分院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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