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Ⅳ. 예술
  • 4. 회화
  • 5) 일본 무로마찌시대 회화에 미친 영향

5) 일본 무로마찌시대 회화에 미친 영향

 조선 초기의 회화에서 독자적인 특성과 함께 주목을 요하는 것은 중국 및 일본과의 교섭을 통한 국제적 성격이다. 이 시대의 회화가 중국의 여러 가지 화풍들을 수용하여 자체의 발전을 이룩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간단히 소개하였다. 이러한 중국과의 관계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이 시대의 회화가 동시대인 일본의 室町시대 수묵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823) 조선 초기 회화가 일본 회화에 미친 영향과 관련된 주요 연구는 다음과 같다.
脇本十九郞,<日本水墨畵壇に及ぼせる朝鮮畵の影響>(≪美術硏究≫ 28, 1934), 159∼167쪽.
松下隆章,<李朝繪畵と室町水墨畵>(≪日本文化と朝鮮≫ 2, 東京;新人物往來社, 1975), 249∼254쪽.
―――,<周文と朝鮮繪畵>(≪如拙·周文·三阿彌≫, 水墨美術大系 6, 東京;講談社, 1974), 36∼49쪽.
安輝濬,<朝鮮王朝初期의 繪畵와 日本 室町時代의 水墨畵>(≪韓國學報≫ 3, 1976), 2∼21쪽.
이처럼 이 시대의 우리 나라 회화는 동아시아의 회화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관하여 간략하게나마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일본에 미친 조선 초기 회화의 영향은 두 나라의 사절단을 따라 양국을 오고 간 화가들과 화적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이와 관련하여 연대적으로 가장 먼저 주목이 되는 것은<파초야우도>이다(<그림 8>).824) 熊谷宣夫,<芭蕉夜雨圖考>(≪美術硏究≫ 8, 1932), 9∼20쪽.
安輝濬, 앞의 책(1980), 그림 51 및 149∼150쪽 참조.
태종 10년(1410)에 奉禮使로 일본에 갔던 집현전 학사 양수와 일본 京都의 詩僧 16명이 찬한 이 그림은 양수를 환영하기 위하여 南禪社에서 열린 詩會에서 파초 위에 내리는 밤비를 소재로 하여 시를 짓고 화사에게 그리게 한 것이다.

 이 그림의 화풍이 조선 초기 우리 나라의 회화와 관련이 깊고 또 양수의 찬문이 곁들여져 있어서 그 작품은 양수를 따라 도일했던 태종 때의 화원이 그렸을 것으로 믿어진다. 대칭을 이루는 안정된 구도, 우측 하단으로부터 좌측 먼곳으로 대각을 이루며 후퇴하는 구성, 물과 안개를 따라 펼쳐지는 확대지향적인 공간개념, 강렬한 흑백의 대조와 점묘를 특징으로 하는 주산의 묘사법, 실루엣이 두드러진 원산의 표현, 渲染法의 독특한 土坡의 모습 등은 이 작품의 특징들인 동시에 조선 초기 화풍의 특성이기도 하다. 남송대 화풍의 영향을 짙게 풍기는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뺀다면 이 그림은 구도, 공간개념, 主山의 표현 등이 120여 년 뒤에 제작된<독서당계회도>(<그림 7>)와 대단히 방불하여 놀랍다. 특히 먹을 칠한 검은 부분과 희게 남겨 놓은 부분이 이루는 강렬한 흑백의 대조, 작은 점들을 찍어서 액센트를 가한 묘사법 등이 특징으로 드러나는 주산의 표현은 두 작품에서 너무나 유사한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러한 표현법은 조선 초기와 중기의 우리 나라 산수화와 그 영향을 받은 일부 在日 작품들에서 간취된다.

 조선 초기의 화풍을 일본에 이식하는데 크게 기여한 화가로는 일본인 화가 周文, 한국인으로 일본에 건너가 활약한 李秀文과 文淸을 꼽을 수 있다.

 京都 相國寺를 무대로 足利幕府 將軍의 어용화가로 활동했던 슈우분은 1423년에 일본 사절단의 일원으로 우리 나라에 왔다가 이듬해인 1424년에 돌아갔는데 그 이후의 그의 작품들에는 우리 나라 회화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일례로 그의<竹齋讀書圖>는 한 쪽 중반부에 치우친 편파구도, 확대지향적인 공간개념, 근경의 언덕과 한 쌍의 소나무 등 전반적으로 안견의 전칭 작품인<사시팔경도>(<그림 4∼5>)와 불가분의 관계를 보여 준다.825) 安輝濬·李炳漢, 앞의 책, 151∼154쪽. 이러한 점은 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岳翁을 비롯한 슈우분파 화가들의 작품들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즉 슈우분과 그의 일파가 안견 화풍의 영향을 수용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다만 슈우분파의 일본 화가들은 안견의 구도, 공간개념, 언덕과 쌍송 모티브 등을 채택하면서도 산과 언덕의 표현처리에서는 남송대 마하파 화풍을 따랐다. 이처럼 그들은 안견 화풍과 마하파 화풍을 절충하여 자신들의 독자적 화풍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어쨌든 슈우분파의 화풍형성에 안견 화풍이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으며 또한 안견 화풍의 국제적 성격과 기여를 입증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 상국사의 화승 周文과 일본어 발음이 같은 秀文은 일본에서 李秀文으로 불려지며 옛날부터 조선인 또는 明人으로 전해지고 있던 인물로 曾我派의 비조로 알려져 있다.826) 內藤浩,<秀文考>(≪Museum≫ 365, 1967), 81∼96쪽.
安輝濬,<秀文과 文淸의 생애와 작품>(≪讀書生活≫ 14, 1971), 152∼188쪽.
20여 년 전에 발견된 수문의<墨竹畵冊>의 끝장인 제10엽에는 “永樂甲辰二十有二歲次於日本國來渡陽寫 秀文”이라는 관지가 있어서 수문이 일본에 건너간 우리 나라 화가였음과 이 작품이 1424년에 완성된 것임을 밝혀 준다.827) 熊谷宣夫,<秀文筆 墨竹畵冊>(≪國華≫ 910, 1968), 20∼32쪽.
安輝濬, 앞의 책(1985), 圖 31∼34 및 158쪽의 해설 참조.
또한 수문이 1423∼1424년에 우리 나라를 다녀간 상국사의 슈우분과 동시대인이었음도 확인되어 흥미롭다.

 <묵죽화책>은 대나무의 열가지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는데 한결같이 잎이 크고 줄기가 가느다란 조선시대 묵죽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그림 12>). 또한 격이 높아, 화원의 시취에서 대나무를 일등과목으로 하였던 제도적 장치의 결실을 드러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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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묵죽화책
<그림 12>묵죽화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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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문은 이<묵죽화책> 이외에<岳陽樓圖>·<香山九老圖>·<古木鳩圖> 등을 그렸는데 앞의 두 작품은 조선 초기의 인물화와 산수화의 일면을 보여주며 2차대전 중에 회진된<고목구도>는 초기 수묵 화조화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828)<岳陽樓圖>와<香山九老圖>는 安輝濬, 위의 책, 圖 37 및 35∼36쪽 참조.
<古木鳩圖>는 安輝濬, 앞의 글(1971), 도판 3 참조.
이 작품들은 국내에 전해지고 있는 것들에 의해서는 확인되지 않는 조선 초기 회화가 지녔던 다양한 측면의 또 다른 일면을 드러낸다.

 특히 산수를 배경으로 소요하는 아홉 노인들과 시동들의 모습을 담은<향산구로도>는 기와 개성을 살린 인물묘사, 변화있는 의습선의 표현, 인물들의 자유로운 動勢, 독특한 산수화풍 등을 특징으로 나타낸다. 또한 6첩 병풍이 쌍을 이루게 되어 있는 점, 각 6첩 병풍은 편파구도를 이루지만 1쌍을 이루도록 붙여 놓을 때는 대칭을 형성하도록 배려된 구도 등도 조선시대의 전통을 보여준다.<향산구로도>에 보이는 산수화풍은<악양루도>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다만<악양루도>의 근경에 보이는 초가집들이 땅에 꺼질 듯 서 있는 모습이 눈길을 끄는데 이것 역시 우리 나라 조선 초·중기의 산수화에서 종종 엿보이는 특징이다.

 한편 고목나무 위에 앉아 있는 비둘기들을 표현한<고목구도>는 나무가지들을 화면을 메꾸듯 펼친 평면적인 구성, 삼각형을 이룬 나뭇잎들의 모습, 수묵만을 사용한 표현, 쌍을 이룬 비둘기들의 모양 등에서<老樹棲鵲圖>에 보이는 趙涑의 화풍과 유사하여 그 상호 연관성을 짐작케 한다.829) 趙涑의 작품은 安輝濬, 앞의 책(1980), 그림 81∼82 참조. 수문의 이 작품은 조선 중기 조속의 선행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 미친 조선 초기 회화의 영향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인물로 文淸을 들 수 있다. 일본에서 ‘분세이’로 불려지는 문청은 京都의 大德寺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인물로 산수와 인물에 뛰어났다. 문청이 남긴 산수화들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樓閣山水圖>(<그림 13>), 일본 高野時次 소장의<煙寺暮鐘圖>와<洞庭秋月圖> 등 안견파 화풍으로 그려진 것들과 미국의 보스톤 미술박물관과 일본 正木미술관에 소장된 산수화들처럼 흑백의 대조가 강한 主山의 표현 등 한국회화의 영향을 반영하면서도 일본화된 화풍을 보여주는 것들로 대별된다.830) 안견 화풍의 영향을 받은 文淸의 작품들은 安輝濬, 위의 책, 그림 54∼56 참조.
일본취향이 가미된 작품들은 安輝濬, 앞의 글(1971), 도판 5∼6 참조.
이는 문청이 국내에서는 안견의 화풍을 따르며 활동하다가 일본에 건너간 다음에는 그 곳의 취향에 적응하며 활약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점은 문청의 인물화들이 산수화의 경우처럼 조선시대 인물화의 전통을 반영한<虎溪三笑圖>와<養叟和尙像>, 일본 취향이 가미된<維摩居士像> 등으로 대별되는 점에서도 확인된다.831)<虎溪三笑圖>는 安輝濬, 앞의 책(1988), 418쪽의 圖 185 참조.
<養叟和尙像>은 安輝濬, 위의 글, 도판 4 참조.
<維摩居士像>은 安輝濬, 앞의 글(1985), 130쪽의 도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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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3>누각산수도
<그림 13>누각산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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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 간략하게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 초기의 회화는 일본의 승려화가 周文, 일본에 건너가 활약한 秀文과 文淸 등을 중심으로 일본회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안견파 화풍의 공헌은 더욱 괄목할만 한 것이었다.

<安輝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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