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2. 과전법의 붕괴와 지주제의 발달
  • 1) 과전법체제의 붕괴
  • (2) 사처 절수지

(2) 사처 절수지

과전법은 국가기능의 수행과는 직접 관계 없는 寺院이라든가 官人 신분에 대해서도 수조권을 절급하고 이를 私田이라 하였다. 寺院田 이외의 사전으로는 중앙 거주의 관인 신분층에게 절급한 科田, 지방 거주의 관인 신분층에게 절급한 軍田, 왕권의 획득과 안정에 관계하여 공신으로 책봉된 자에게 절급한 功臣田 등이 있었다.041) 기타 특별한 경우에 절급한 別賜田이란 것도 있지만, 그것은 특별한 공로를 세운 宦官 등 그야말로 특별한 경우에 절급한 것이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金泰永,≪朝鮮前期 土地制度史硏究≫, 知識産業社, 1983, 127쪽).

사원전은 고려시대 이래 거대한 규모가 절수되어 있었으나, 태종 6년(1406)과 세종 6년(1424)의 두 차례에 걸쳐 대폭 정리하여 軍資田으로 편입시켰다. 이후 사원전은 주로 국왕이나 특히 后妃들의 개별적 불교 신봉 여하에 따라 그 규모가 좌우되어 갔다. 한편 內願堂이라고 하는 왕실의 祈福 사찰이 전국에 수백개소나 설립되어 왕실의 비호 아래 다수의 소유지를 확대해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士林 세력이 정계에 많이 진출하게 된 16세기 후기에 가서는 王陵 수호의 소수 사원전만 남기고 그 밖의 내원당 명목의 소유지는 모두 內需司로 이속되었다.042) 有井智德,<李朝初期における收租地としての寺社田>(≪朝鮮學報≫81, 1976).
宋洙煥,<朝鮮前期의 寺院田>(≪韓國史硏究≫79, 1992).

과전법이 설정한 사전 가운데서도 보편적 관인층을 상대로 절급하는 과전이야말로 그 규모나 성격면에서 사전의 전형적 지목이었다. 그래서 여기서는 편의상 과전을 중심으로 설명하면서 공신전·군전 등은 관계되는 곳에서 덧붙여 설명하기로 한다. 과전은 관인이 현직에 복무하는 대가로 절급한 수조지가 아니었다. 현직 복무의 대가로 주는 것은 녹봉이었다. 과전은 관인으로서의 사회적 신분을 유지토록 하기 위해 전직자에게도 절급하며 혹은 그 守節妻나 遺兒에게도 일부 계승케 함으로써 이른바「仕者世祿」의 뜻을 지닌 신분제적 토지지배의 형태로 설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과전을 설정한 원래의 이념 여하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 당시 현실적 토지지배관계의 기축은 이미 소유권에 입각한 것으로 이행해 있었으므로, 과전법체제에 내재한 토지지배관계의 전망은 한편으로 그같은 개인 수조지를 혁파한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① (鄭)麟趾·(鄭)昌孫·(崔)恒·(金)礩·(尹)子雲·(成)奉祖 등이 논의하였다. 科田은 태조 때 私田을 혁파한 후 부득이 立法하여 점차 革去해갈 의도를 나타낸 것인데 역시 (그 절급이) 균평치 못한데다 농민을 침학하는 폐단이 있었다. 세종도 과전의 절급을 모두 혁파하고 2만 石을 恩賜米라는 명목으로 頒給하려 하였으나, 長城·徙邊·貢法 등 大事를 겹쳐 시행하는 일로 인하여 실현하지 못하였다(≪成宗實錄≫권 32, 성종 4년 7월 기미).

② (태종이 말하기를) ‘田地는 유한한데 새로 나오는 從仕者는 무궁하니 과전을 均給할 수 없다’고 하니 河崙이 응대하기를 ‘과전의 절급은 마땅히 그쳐야 합니다. 主掌官이 남이 욕하는 것을 싫어해서 (그 사실을) 아뢰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太宗實錄≫권 28, 태종 14년 8월 신유).

사료 ①은 고려말의 사전개혁 당시 개혁파가, 비록 그 오랜 역사적 연원으로 인하여 과전 따위 지배층 우대의 신분제적 분급수조지를 부득이 설정하기는 했으나, 그것이 당시의 토지지배의 대세와는 어긋나는 일이므로 원래부터 점차 혁파해갈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는 내용인 것으로 해석된다. 그것은 시행과정에서도 절급이 균평치 못하고 농민을 침학하여 지배층과 농민 양편에 모두 폐단이 되는 제도로 운용되기 때문에 세종도 은사미를 지급하는 대신 과전 명목을 모두 없애려 하였다는 사실을 전한다. 이 논의는 물론 뒷날 성종대에 가서 과전을 복구하자는 일부 주장을 반박하면서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논의를 발설한 정인지 등이 세종대 이래 국가 전장 문물의 정비에 핵심적으로 관여한 학자 관인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 논의의 내용은 아마도 사실 그대로였음에 틀림없으리라고 판단된다.

사료 ②는 과전으로 분급할 수조지가 부족하게 되자 개국 초기부터 과전의 절급을 마땅히 중단해야 한다는 논의가 공공연히 일어났다는 내용이다. 이를 제기한 하륜은 과전법 제정 당시부터 개혁파 관인으로 참여해왔으며, 특히 태종대에는 국왕의 절대 신임을 지닌 당로의 대신이었다. 그같이 중책을 지고 있는 그가 과전법 원래의 기본 의도를 무시하고서 이같은 논의를 발설하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즉 과전법체제가 표방한 이른바「仕者世祿」이라는 전통적 지배층 우대의 관념 여하에도 불구하고, 당시 토지지배관계의 현실은 과전 따위 개인에 대한 분급수조지제의 운용을 조만간 중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 기본 입장의 하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과전은 쉽게 혁파되지 않은 채 그대로 운용되어 갔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지배층의 이익에 직결된 제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전은 또한 진작부터 많은 폐단을 야기하고 제도상의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시행되었다. 우선 私田 京畿의 원칙에 따라 과전 등 사전의 절급 지역을 경기에 한정시켜 두었음에 반하여 새 왕조에 들어와 관인 수가 점차 증가하자 과전 절급액이 점차 더 많이 요구되었으므로 관인층 내부에서 과전 점유의 불균형이 초래되었다. 또한 과전법체제는 고려 이래의 관행을 따라 과전 등 수조지의 손실답험과 수조 행위를 당해 수조권자에게 일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필수적으로 농민에 대한 가혹한 수탈이 자행되는 문제가 있었다.

과전법은 제정된 지 3년 만인 태조 3년(1394)에는 그 절급 규모가 전체적으로 상당히 축소되었으며043)≪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科田法.
≪龍飛御天歌≫제73장 註 참조.
金泰永, 앞의 책, 131∼132쪽.
李景植,≪朝鮮前期 土地制度硏究≫(一潮閣, 1986), 173∼174쪽 참조.
이미 태종대부터 “전지는 유한한데 새로 나오는 從仕者는 무궁하니 과전을 均給할 수 없다”044)≪太宗實錄≫권 28, 태종 14년 8월 신유.는 실정이 초래되었다. 과전법은 과전을 절급받은 관인이 사망한 후에도 그 守節妻에게는 守信田, 미성년의 遺子女에게는 恤養田이라는 명목으로 당분간 그 전지의 전부 혹은 일부를 遞食해 갈 수 있도록 규정해 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틈타서 “혹은 妻가 夫의 田地를 遞受하고 혹은 자손이 父祖의 전지를 체수하여 서로 전수하고 改給치 않는다”045)≪太宗實錄≫권 11, 태종 3년 정월 을해.는 사실대로, 절수자의 隱占에 의한 사실상의 世傳으로 인하여 과전의 원활한 授受를 기하기란 매우 어려워져 가고 있었다.

국가로서는 무자격자가 은점한 과전을 적시에 회수해야 하는 구체적 경우를 상찰하기가 어려웠으므로, 그것을 먼저 신고하는 관인에게 우선적으로 절급한다는 소위「陳告遞受法」을 세워둔 바 있었다. 그러나 이 법 또한 결국 타인의 과실을 들추어내거나 그 사망을 요행으로 여기는046)≪太宗實錄≫권 25, 태종 13년 4월 임신. 풍조를 조장하는 방향으로 운용되고 있었다. 또한 陳告者 위주의 체수제도였으므로 과전의 균평한 수수를 기하는 일은 아예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태종 말기에는 타인의 진고 대신 본인의 친족으로 하여금 진고케 하고 그 절급도 戶曹가 직접 관장하는 방식으로 바꾸었으나, 역시 그 균평한 수수는 성취하기 어려웠다. 그 가운데 태종 17년(1417)부터 한동안 경기 私田의 일부를 下三道로 이관 절급하는 형식을 택하기도 하였다. 사전 경기의 원칙을 국가 스스로 폐기함으로써 과전법 원래의 모습이 점차 탈바꿈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아가 세종 13년(1431)에는 종래의 職事 기준의 급전제를 品階 기준으로 전환하면서, 이후 새로 절급하는 과전의 경우 당상관을 1등, 당하관의 종4품까지를 2등, 5·6품을 3등, 참하관을 4등으로 나누어 각 등급마다 순환해가면서 절급한다는 원칙을 세우게 되었다. 절대액수가 부족한 과전을 두고 그 분급에서나마 균평을 기한다는 것이었으나, 그것은 또한 과전의 절급 자체에 국가의 공권력이 한층 더 크게 침투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일이었다.

한편 과전법은 1結당 최고 30斗라고 하는 租額의 한도 내에서 收租額의 책정을 매년 田主의 답험손실에 맡겨두고 있었으므로 거기에는 필경 전주의 과도한 수탈이 자행되기 마련이었다. 그것은 고려시대 이래 사전에서의 뿌리깊은 인습이기도 하였다. 사전이 경기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경기 농민들의 고통은 막심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원성이 하늘에 사무쳐 혹독한 旱災까지 초래된다는 유언이 비등하기조차 하였다.047)≪太宗實錄≫권 31, 태종 16년 5월 신해. 이 사실은 경기 사전을 하삼도로 이급하기에 이른 하나의 큰 배경으로 작용하였다(김태영, 앞의 책, 248∼250쪽). 그래서 세종 원년에는 드디어 그 동안 전주에게 일임해온 사전의 답험손실권을 소재지 수령의 권한으로 이관시키기에 이르렀다. “공전·사전은 모두가 국가의 田地”048)≪世宗實錄≫권 5, 세종 원년 9월 신유.라고 하는 세종의 말에 나타난 대로, 사전에서도 전주의 사적 토지지배권은 보다 약화되고, 국가의 보편적 토지관리권이 그 토지를 소유 경작하는 농민층을 직접 상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현상은 농민의 토지소유권이 그 위에 설정된 관인의 수조권보다 우선시되어 가는 현실의 단계적 반영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과전법에서는 과전 등 사전에서의 안정된 수조권을 보장하기 위해 그것을 소유 경작하는 농민이 자기 所耕田을 함부로 매매 혹은 증여하지 못하도록 규정해 둔 바 있었다. 그러나 토지지배의 관행이 소유권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 규정은 매우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현실의 구체적 사정에 비추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이 규정의 폐지가 마땅하다는 경기 감사의 요청에 따라, 세종 6년(1424)에는 과전 등 사전으로 절수된 토지라 할지라도 농민 소유지의 매매를 허용하게 되었다. 이 또한 법제적으로 가설된 사전의 수조권보다는 그 바탕이 되는 소유권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반영한 조처였으며 이에 따라 소농민 분화의 자연스런 길이 한층 더 열리게 되었다.

한편 과전법체제에서는 전지를 濫占하여 陳荒케 하는 경우 그 전지의 소유권을 無田者·田少者에게 주어 경작토록 하는 시책을 한동안 시행하고 있었다. 가령 세종대에 貢法田稅制를 詳定하는 과정에서 “무고하게 2년 동안 全陳한 토지는 타인에게 지급하기를 허락한다”049)≪世宗實錄≫권 78, 세종 19년 7월 정유.는 규정을 두었던 것이 그 대표적 사실의 하나였다. 이는 한편으로 豪强者에 의한 전지의 남점을 막고 무전자·전소자를 보호하려는 균전론적 시책의 하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전지의 진황을 막아 농업생산의 증대를 기하려는 권농책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같은 균전론적 시책은 공법전세제의 수정, 更定을 거쳐 세종 26년 그것이 확정되는 과정에서 크게 변형되어 이제 어떠한 진황전일지라도 그 소유권은 지주의 수중에 그대로 항구적으로 보유되도록 결정하고 말았다.050) 金泰永,<朝鮮前期의 均田·限田論>(≪國史館論叢≫5, 1989), 119∼129쪽. 이 규정은 이윽고≪經國大典≫에 등재되어 이후 항구적 법제로 확정되었다.051)≪經國大典≫권 2, 戶典 田宅 “3년 이상 된 陳田은 許人告耕한다. 海澤인 즉 10년을 한도로 한다.” 이 규정의 해석에 관해서는 金泰永, 위의 글 참조. 즉 전지의 진황을 막고 모든 농경지에서 收稅를 기하려는 국가 시책보다 자기 소유지에 관한 한 어떠한 형태로든지 그 소유권을 항구적으로 확보하려는 지주 관인들의 이해관계가 우선적으로 관철된 것이다. 한편 더 많은 수조지를 절수하려는 관인층의 관심이 소유권적 토지지배를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니, 이는 곧 당시 토지지배관계의 일반적 관행을 반영한 것이었다.

소유권 위주의 토지지배란 기실 배타적 지배의 속성을 지닌 것이므로 그것은 당해 토지 위에 법제적으로 가설된 수조권적 토지지배와는 이미 모순되는 것이었다. 전자가 확고하게 확립될수록 후자가 쇠퇴·소멸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전을 몰래 점거하여 수조한다든지 혹은 수신전·휼양전 명목으로 그것을 사실상 세습하여 자손 대대로 수조하는 불법적 사례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서 세조대에는≪경국대전≫을 제정하면서 戶典의 科田遞受條에 다음과 같은 조항을 두었다.

조부모·부모 및 夫가 사망하면 그 과전은 子·壻·孫 및 妻가 喪制를 마친 후 翌年 안에 戶曹에 告하고 호조는 田關·爵牒을 고찰하여 遞給한다. 만약 기한 안에 관에 고하지 않고 몰래 숨겨 收租하는 경우에는 연수를 헤아려 추징하고 그 田은 屬公한다. 無後·無妻子의 과전, 守信田을 받고서 타인과 재혼한 경우, 妻父母의 과전을 遞受한 후 처를 버린 경우에는 그 族親의 告官을 聽許하고 (그 전은) 속공한다. 不告者는 論罪한다(≪世祖實錄≫권 37, 세조 11년 12월 기축).

그러나 이와 같은 법금의 설정에도 불구하고 무자격자의 은점 수조 또한 계속되고 있었다. 가령 세조 8년(1462) 田案을 개정할 때 과전의 수수관계를 정비하기 위하여 기한을 늦추어주면서까지 은점자의 ‘告官遞受’를 허용한 바 있지만, 세조 11년 현재로도 “무식한 자들이 혹 嫌隙을 두려워하고 혹은 수조하는 것을 이롭게 여겨 곧 告官하지 않고”052)≪世祖實錄≫권 28, 세조 8년 6월 신유 및 권 37, 세조 11년 12월 기축. 계속 은점하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세조대는≪경국대전≫의 편찬 등으로 새 왕조 경영의 제반 규범을 정착시켜 가고 있는 때였다. 세종대 이래의 개선정책을 이어받아 貢案과 橫看의 제도를 서둘러 정립해가는 한편, 戶籍과 軍籍을 근본적으로 재정비하고 號牌法과 保法을 시행하여 모든 신민에 대한 철저한 인신·직역의 파악을 기도하고 있었다. 노비 從賤法의 확정도 그같은 사례의 하나였다. 그리고 최고 지배층인 관인 신분 자체에 대해서도 현직자 및 대신급의 고관을 지낸 자와 학생·노인·병자를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현역 복무의 군역을 부과한다는 다음의 王旨는 그같은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라 할 것이다.

諸道의 대소 閑散 3품 이하는 付籍讀書者·年六十以上者·篤廢疾者를 제외하고 모두 正兵에 소속하여 侍衛토록 하되, 이번 辛巳年 12월 그믐 안으로 自現하지 않는 자는 모두 변방으로 이주시킨다(≪世祖實錄≫권 25, 세조 7년 7월 병진).

즉 세조대 국가 경영의 요결은 모든 신민에 대해 신분·인신별 직역을 부과하되 철저한 현직자 위주의 정책을 실현하는 것이었다.053) 관원 수에 비하여 현직의 직과가 부족한 현실이므로 ‘문·무 당상관의 무소임자’를 현직으로 대우하기 위한 中樞府를 두어 운용한 것도 마찬가지로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것은 곧 공리적 효율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같은 정책 노선에서는 무자격자의 은점이 계속되고 공리적 효율성이라고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수신·휼양전 따위를 존치시킬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이윽고 세조 12년(1466) 8월에는 “과전을 혁파하고 職田을 설치하였다”.054)≪世祖實錄≫권 39, 세조 12년 8월 갑자.
이 중대한 변화를 실은 記事가 아무런 배경 설명도 달고 있지 않다는 사실 또한 주의해 볼 만한 일이다.

소유권 위주의 토지지배관계가 발전함에 따라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관행은 한껏 쇠퇴하여 그 소멸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조성되어 가고 있었다. 거기에다 현직자를 위주로 공리적 효율을 우선시하는 세조대의 국가 경영정책은 드디어 비현직자·무자격자의 수조지 절수를 일체 불허하는 職田制의 실시를 단행하는 데 이르렀다. 과전법의 정립으로부터 75년 만의 일이었다.

직전제는 무엇보다도 현직의 관료에 한하여 수조지로서의 직전을 절급하는 제도였다. 따라서 전직 관인에 대한 給田이 없어지게 되었음은 물론, 군전·수신전·휼양전 따위가 사라지게 되었다. 이른바「仕者世祿」이라 하여 비현직일지라도 관인 신분을 우대한다는 취지에서 설정한 신분제적 토지지배의 측면이 결정적으로 쇠퇴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직전은 다음<표 1>에서 보이는 대로 과전에 비하여 그 절수액이 크게 축소되었으며, 權務·同正·學生 등 流品 이외의 관직에 대한 수조지 절급이 모두 없어졌다.

지 급 대 상 과 전 직 전 지 급 대 상 과 전 직 전
정1품
종1품
정2품
종2품
정3품(堂上)
정3품
종3품
정4품
종4품
150
125
115
105
85
80
75
65
60
110
105
95
85
65
60
55
50
45
정5품
종5품
정6품
종6품
정·종7품
정·종8품
정·종9품
正·雜權務
令·同正·學生
50
45
35
30
25
20
15
10
5
40
35
30
25
20
15
10
·
·

<표 1>科田·職田의 지급액 대비055)≪龍飛御天歌≫제73장 註 및≪經國大典≫권 2, 戶典 諸田條를 근거로 하여 작성. 단 후자에 실려 있는 王子職田은 제외하였다. 단위는 結.

직전제의 시행 이후에도 한동안 과전 복구론이 집요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토지지배관계의 대세에도 어긋나며 다시 職事者의 토지를 빼앗아 無職人에게 주어야 하는056)≪成宗實錄≫권 4, 성종 원년 4월 신미. 것이므로 실현될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 고려의 사전에서보다는 수취관계가 크게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과전의 경우에도 田租를 濫收하고 여타 雜物을 과징하는 일이 이전부터 자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직전제의 시행 이후 한층 더 심해지게 되었다. 즉 “지금 직전을 설치하고 보니 관리의 사나운 奴子들이 (자기 상전이) 遞遷될까 매우 걱정하여 징수 독촉하는 것이 날로 더하다”057)≪睿宗實錄≫권 3, 예종 원년 2월 갑인.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더구나 수조지 10負에 藁草 1束씩을 받는 것이 법례인데도058)≪世宗實錄≫권 58, 세종 14년 12월 무자. 이제 그 藁草價 또한 1속에 米 1斗씩을 강징함에 따라 초가의 미와 元稅의 미가 동등하다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059)≪睿宗實錄≫권 6, 예종 원년 6월 신사. 현직을 떠나면 직전의 절수도 끝나므로 그 기간 동안 수탈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수조지보다도 소유지 위주의 토지지배가 더욱 관철되어 가고 있었다. 국가는 소유=경작지 즉 臣民의 所耕田을 기준으로 하여 田稅와 貢物·徭役을 부과함은 물론 軍役에서의 助丁의 지급까지 연계시켜 운용하는 수취제도를 정립해가고 있었다. 소농민경영에 대해서 질곡으로 작용하는 수조권보다도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소유권적 토지지배관계를 보호하는 일이 더 절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예종 원년(1469) 이래 논의를 거쳐 성종 원년(1470)에는 사전의 전세를 ‘官收官給’하기로 결정하고 동왕 6년 고초가를 당시의 시가대로 1속에 미 2升으로 정하였다. 다시 동왕 9년에는 경기 농민의 ‘情願’을 들어 초가와 함께 직전·공신전·別賜田의 전세까지를 관수관급하기로 확정 시행하게 되었다.060)≪成宗實錄≫권 7, 성종 원년 9월 무인·권 51, 성종 6년 정월 갑인·권 61, 성종 6년 11월 병오 및 권 94, 성종 9년 7월 기묘.
金泰永, 앞의 책, 139쪽.
이제 직전 등 사전의 전세는 그 전주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농민이 國倉에 납부하고 국가가 당해 절수자에게 軍資倉의 米·豆를 換給하는 방식의 職田稅制가 운용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직전세제의 실시에 따라 이후 직전세는 현직 관인의 녹봉에 대한 加給의 의미로 한정되고 말았다. 사전의 전주가 그 경작자를 지배하는 오랜 관행이 사라짐에 따라 이제 소농민은 보다 더 국가를 직접 상대하는 경영체로 노출되기에 이르렀으며, 그 사회적 분화 또한 한층 더 활발해지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 나라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역사에 있어서 대변혁이 일어나게 되었음을 뜻한다.

물론 이후로도 직전세의 명목은 한동안 존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15세기 말기로부터 국가재정의 부족을 이유로 직전 명목을 혁파하려는 논의가 속출하고 있었다. 또 직전세의 환급을 중지하고 그것을 국고로 귀속케 하는 시도가 단속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더구나 16세기에 가서는 연분등제가 ‘下下’로 책정되는 것이 관례화하자 직전세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명종대에 가서는 유명무실해진 명목조차 흉년의 빈번, 변방의 소요 등에 따른 국가재정의 부족으로 소멸되었다.061) 金泰永, 위의 책, 140∼141쪽.
李景植, 앞의 책, 265∼279쪽.
그리고 이로써 적어도 고려 초기 이래 운용되어 온 관인층에 대한 신분제적「分給收租地제도」는 우리 나라 역사에서 완전히 소멸되었다.

과전법체제는 그 운용과정에서 원래의 수세제를 개편하여 전분 6등·연분 9등제의 전세제도를 세움으로써 이후 조선왕조 일대의 기본 세제를 정립시키게 되었다. 그런데 과전법체제는 이미 소유권에 입각한 토지지배관계를 기축으로 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기본적으로 토지소유관계의 분화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같은 소유권적 토지지배는 그 위에 법제적으로 가설된, 그래서 개별 소유권의 행사에 장애 요인으로도 작용하는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인습과는 모순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자의 발전에 따라 후자는 점차 소멸해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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