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2. 과전법의 붕괴와 지주제의 발달
  • 2) 농장의 확대와 병작영농

2) 농장의 확대와 병작영농

과전법체제를 정립 운용해온 지배계층으로서의 관인신분은 出自 자체가 원래부터 수조권이 아닌 소유권적 토지지배관계를 그 사회경제적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과전이나 직전 등 수조지의 절수는 오히려 이른바「世祿」이라고 하는 예우 즉 지배층에 대한 신분적 우대의 의미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같은 수조지를 받지 않고서도 역시 능히 벼슬살이할 수 있는 처지에 있었다.062)≪世宗實錄≫권 58, 세종 14년 12월 무자. 그들은 누구나 조상 전래의 田莊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관직을 버리고 기꺼이 물러날 수도 있는 계층이었다.063) “지금의 臣僚치고 누가 田舍를 갖지 않아서 걱정 없이 떠나지 못할 것인가” (≪太宗實錄≫권 28, 태종 14년 7월 갑신)라는 기사를 참고할 일이다.

과전법체제는 왕실이라든가 이른바 巨室·勢家로부터 品官·土豪에 이르기까지 원래 토지와 노비를 다수 소유한 지주관인층을 대상으로 다시 관품에 따른 과전의 수조권이라든가 軍田의 免租權을 절급하였다. 과전과 군전은 주로 지주관인층의 경제적 지반을 국가적으로 보장하는 신분제적 수조권의 분급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상속되지는 않는 수조권의 보유에 불과하였지만, 당해인의 정치·사회적 지배신분의 항구적 확보장치로 작용함과 동시에 원래 地主地의 보전을 위한 보장이 되어 주었다. 더구나 주로 왕권의 확립과 옹호를 싸고 도는 데 기여한 이른바 勳臣들은 자손 相傳의 공신전과 노비를 중첩적으로 절급받아 그 경제적 지반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게 되었다.

16세기에는 과전의 후신인 직전마저 소멸하고 말았지만 한편으로 지주제는 오히려 더욱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토지·노비 등 재산의 자녀균분상속이 보편적 관행이었으므로, 이미 형성된 지주제는 상속과 혼인을 통하여, 그리고 체제적 보장하에서 새로운 개간·매득을 통하여 확대 재생산되어 갔던 것이다. “백성으로서는 전지를 가진 자가 없고 그것을 소유한 자는 오직 富商大賈·士族家뿐이다”064)≪中宗實錄≫권 75, 중종 28년 7월 을묘.라거나, “세력없는 자는 비록 토지와 노비를 가지고 있더라도 有勢한 집에 빼앗기지 않으면 반드시 內需司에 빼앗기고 만다”‘065)≪明宗實錄≫권 13, 명종 7년 5월 무자.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에는 소농민의 토지 상실과 그 이면에서의 地主地의 집적이 크게 전개되고 있었다. 실로 16세기 지주지의 확대에 따른 소농민의 도산과 궁핍화·유민화·도적화 현상은 이 시기 최대의 국가사회적 현안으로 등장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토지의 均田論·限田論이 새로운 과제로 크게 부각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지주의 사회적 성분은 왕실로부터 거실·세가, 부상대고나 재향의 품관·토호, 나아가서는 私奴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범주상으로는 거실로부터 토호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신분적 특권을 보장받는 士族官人層 중심의 지주제가 전개되고 있었다. “무릇 長利는 반드시 宰相·勢家 및 토호라야 능히 다 거두고 쉽사리 늘릴 수 있다”066)≪世宗實錄≫권 109, 세종 20년 9월 병자.는 사실에서 유추되는 바와 같이 매득과 개간을 통한 지주지의 확대도 현실적으로는 유세층이라야 가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지주제가 체제적 보장하에 있는 양반층을 중심축으로 하여 전개되어 가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일반적으로 말하여 “하삼도는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하여 朝士의 농장과 노비가 절반을 넘게 차지한다”고도 하며, “조사의 농장이 畿內에 다수 있다”고도 하는 기록067)≪世宗實錄≫권 124, 세종 31년 4월 계축.
≪成宗實錄≫권 20, 성종 33년 7월 갑자.
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시기의 관인지주층은 대개 農莊이란 것을 경영하고 있었다. 농장은 이미 고려 후기에서부터 큰 물의를 일으켜 여러 차례 혁파의 대상으로 지목되어 온 것이었다. 그런데 과전법체제의 정립과 함께 이른바 권력 결탁형의 불법적 농장은 혁파되었지만, 정당한 토지소유관계 위에 설치되었던 것은 과전법의 정립 과정에서도 그대로 보전되었고 새 왕조 관인층의 기본적인 경제적 지반으로 운용되어 가고 있었다. 다음은 그같은 농장의 두 가지 유형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① 內乘 內竪의 무리는…또한 貢戶를 몰아다 驅從이라 이름한 것이 천·백 인에 이르는데, 公籍에 올리지 않고 사사로이 농장을 설치하여 마치 노예처럼 사역한다(≪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우왕 14년 8월 憲司 上疏).

② 坡州 서쪽 교외는 황폐하여 사는 사람이 없었다. 政堂文學 安牧이 처음으로 개간하여 田畝를 널리 일으켜 큰 집을 짓고 살았는데…그 孫子 瑗에 이르러 극히 번성하여 안팎으로 田地를 점거한 것이 무려 수만 頃이요, 노비가 백여 인이나 된다(成俔,≪慵齋叢話≫권 3).

사료 ①에 나오는 농장은 공민으로서의 ‘貢戶’를 농장의 노동력으로 사사로이 사역한 것이니만큼 권력 결탁형임에 틀림이 없고, 따라서 이 따위는 과전법의 제정과정에서 토지소유관계와 노동력 양면에 걸쳐 혁파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료 ②의 경우는 사뭇 다른 유형이었다. 안목은 공민왕대의 현달한 관인이었으며 그 嗣孫 安瑗은 조선 태종대에 이르기까지 현달한 관인이었다. 그 조부대에 개간을 통하여 소유하게 된 이들의 농장은 그 동안에 사전의 혁파에 이은 과전법의 정립과 왕조까지 바뀌는 변화를 겪었지만 그 손자대에 와서도 여전히, 오히려 더 번영의 길을 걷고 있었다. 즉 정당한 소유관계 위에 설치된 농장은 그같은 크나큰 사회변동을 겪으면서도 그대로 소유·경영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농장이라는 집중된 소유지뿐 아니라 크고 작은 民有地 즉 이 시기 所耕田으로 공칭되는 일반적인 소유 경작지 또한 같은 과정을 겪어 그 정당한 소유관계의 것은 그대로 보전되었으리라고 판단된다.068) 고려 말기의 불법적 사전 내지 농장이 과전법의 정립과정에서 어떻게 혁파 정리되었는가, 혹은 그같이 불법적으로 탈점된 토지가 어떤 경로를 통하여 정당한 소유관계로 되돌려졌는가에 관해서는 金泰永,<토지제도>(≪한국사≫24, 국사편찬위원회, 1994) 참조.

그런데 그같은 농장의 경영은 대체 어떤 형태를 띠고 있었는가. 현재 고려 말기 농장에 관한 연구로서는 ‘사전과 농장은 대체로 같은 개념’인 것으로 이해하여 ‘농장경영의 기본 형태는 대체로 小作制’이며 ‘농장 지배의 본질은 예속농민으로부터 地代를 수취함에 있었던 것’이라는 견해가 대표적인 것으로 제시되었다.069) 姜晋哲,<高麗의 農莊에 대한 一硏究>(≪史叢≫24, 1980).
―――,<高麗時代의 地代에 대하여>(≪震檀學報≫23·24, 1982)
―――,≪韓國中世土地所有硏究≫(一潮閣, 1989), 145·203·216쪽.
또한 이 시기에는 노비노동력을 구사하는 직영형 농장, 佃戶로부터 田租를 수취하는 농장, 그리고 재지 관인층의 병작형 농장 등이 있었다는 견해도 제시된 바 있다.070) 浜中昇,<高麗末期の田制改革につい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13, 1976).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여말선초 농장의 경우는 일정 규모로 집중된 토지에다 노비라든가 혹은 그것에 준하는 종속노동력을 집단적으로 결합시켜 경영하는 직영의 형태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최근에 연구된 조선 초기 농장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것은 일정 규모로 집중된 지주지 위에 지주 혹은 그 대리인의 지휘 아래 노비 등 다수의 종속노동력을 집단 사역하여 직접 경영하며, 따라서 그 생산물은 당연히 지주의 수입으로 귀속되는 형태였다고 한다.071) 李鎬澈,<農莊과 小農民經營>(≪朝鮮前期農業經濟史≫, 한길사, 1986).
李榮薰,<古文書를 통해 본 朝鮮前期 奴婢의 經濟的 性格>(≪韓國史學≫9,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7).

농장은 지대를 수취하는 소작제나 병작제와는 다른 범주의 영농형태인 것으로 이해된다. 첫째 농장의 영농 주체는 어디까지나 지주 혹은 그 대리인이요, 소작제의 영농 주체는 소작인 자신이며, 둘째 이 시기 새로이 등장하는 이른바 병작제 영농형태를 곧바로 소작제와 등치시켜 이해하는 것도 많은 무리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종래의 일반 학설은 조선 후기에서와 같은 지주 전호제 즉 소작제가 이미 이 시기에 기본적 생산관계로 정착되어 있었다고 주장해왔지만, 그것이 객관적 검증을 거쳐서 정립된 것은 아니었다. 보다 직접적 사실을 전해주는 것으로, 세조대의 공신인 黃守身이 牙山 官屯田을 24곳이나 횡점하였다는 사헌부의 논박에 대하여 항변한 다음의 사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臣이 만약 비옥한 전지를 얻어 농장을 설치하고자 했다면 돌아오는 날에 곧 노비를 모아 그 곳에 거주시키면서 耕耘케 하였을 터인데, 어찌 3년이나 되도록 한 명의 奴도 거처하는 자가 없었겠습니까. 거기서 겨우 경작하는 다섯 곳도 역시 모두 竝耕하는 것입니다(≪世祖實錄≫권 28, 세조 8년 4월 병술).

즉 이 시기 지주지의 경영은 농장제가 기본을 이루고 있었으며, 병작제는 극히 부분적인 형태로 전개되고 있었음이 판명되는 것이다.

또 한편 최근의 유력 학설들은 지주지의 농장 직영형이야말로 이 시기 농업의 중심적 형태였다고 역설한다. 즉 노비나 挾戶 등 예속 노동력을 사역하는 지주지의 직영 농장이 중심을 이루고 그 주위에 지주로부터 토지·牛具·종자 등의 생산수단 기타를 대여받는 종속적 전호경영이 다수 집적된, 복합적인 농장형태가 이 시기 농업의 규정적 범주이자 국가 전세수입의 기본 지반이었다고 한다.072) 李鎬澈, 위의 책.
李榮薰, 위의 글.
특히 전자는 조선 전기의 가장 발전적인 농업경영형태는 바로 大農的 農莊경영이었다고 논단하였다.
여기 종속적 전호경영은 그 자체가 비자립적 소농경영으로서, 호적이나 양안에 미등재된 채 경우에 따라서는 다시 유망의 길로 나서기 쉬운, 따라서 稅·役·貢 따위 국가적 부담에서 은루되어 있는 협호적 존재들인 것으로 고찰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경기와 하삼도에서 다수 세력가의 지주지와 농장형태의 존속 사실이 확인되는 터이므로, 이들 학설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같은 세력가의 지주지 농장이 이 시기 농업을 규정할 만한 기본 영농형태였다면 국가체제는 유지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① 한 고을 안에 巨室 수십 家가 있으면 그 세력이 수령을 능멸하고 시비를 전도시키기에 족하다. 권세가 성하니 아무도 감히 제어할 수가 없다. 용렬한 관리는 또한 위세를 겁내고 오히려 거실로부터 죄를 입거나 재상에게 꾸짖음을 당할까봐 두려워하니, 어찌 그들에게 법을 집행할 수 있을 것인가.…이에 열 집의 부역을 한 집에 떠맡긴다(≪世祖實錄≫권 46, 세조 14년 6월 임인).

② 각 군현의 품관들이 모두 향리·書員의 用事者로 婢夫를 삼아 짝을 지어 공모하되, 무릇 자기의 徭賦雜役을 촌민들에게 분담시키며 백성을 속이고 약자를 침해하니 그 해악이 갖가지이다(≪中宗實錄≫권 80, 중종 30년 11월 병자).

③ 각 군현의 토호들이 양민을 濫占하고서 허다하게 숨겨 사역하는데도 수령은 인정에 구애되어 감히 括刷하지 못한다(≪中宗實錄≫권 103, 중종 39년 5월 계해).

즉 드러난 거실로부터 향촌의 품관·토호에 이르기까지 이 시기의 유세한 지주사족들은 국가의 정상 수취체제로부터 사실상 일탈해 있는 존재들로서, 자신과 그 예속 호구들이 모름지기 부담해야 할 응분의 貢賦·徭役들을 여타 촌민들에게 전가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국가체제의 존립 지반을 침해하는 행태였던 것이다. 아마도 이처럼 국가의 기본 賦·役조차 담당하지 않는 거실·세가 혹은 품관·토호 따위 지주사족들을 기본 존립지반으로 하고서는 국가체제를 유지 운용하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된다.

뿐만 아니라 지주지의 직영이 이 시기의 규정적 영농 범주로 보편화하여 있는 상태라면, 과전법이라는 분급수조지제 자체를 운용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과전 따위는 ‘累代의 農舍’ 위에 설정된 경우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일반 농민의「소경전」위에 설정된 것이었다. 그것을 경작하는「佃客」은 그 수조권자인「田主」를 직접 상대하여 납조하면서 자신의 소경영의 재생산에 골몰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전주의 과도한 수탈에 대한 소농민들의 불평은 대단히 커서, 그 원한으로 인하여 한발 등의 天災가 초래된다는 풍문이 나돌기에 이르렀고, 그에 따라 사전의 일부를 하삼도로 이급할 수밖에 없다는 논의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과전의 후신인 직전에서도 결국 관수관급제를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 자체가 무엇을 반증하는 것인가. 경기감사를 통하여 새 제도의 편의 여부를 농민들에게 물어보아서 동의하는 자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그것을 시행하기에 이르렀던 것은 직전으로 설정된 토지를 소유·경작하는 주체가 보편적으로 소농민경영체였다는 사실을 명백히 말해준다. 그래서 과전이 설정된 경기지역은 전주가 전조를 수납하고 여타 지역은 국가가 수납하는 차이야 있었지만, 이 시기 영농 형태의 기본 범주가 소농민경영체였다는 사실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 시기 국가재정의 주요 항목을 이루고 있던 공납과 요역의 부과 기준이 이전의 計丁法으로부터 計田法으로 이행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 또한 아울러 고려해야 할 것이다. 계전법적 수취제는 이미 그 시험 단계에서부터 농민들이 매우 편하게 여기는 것으로 판명된 제도였다. 그러므로 “무릇 공부와 요역은 백성의 所耕田 結負數에 따라 정한다”073)≪成宗實錄≫권 4, 성종 원년 4월 병자.고 하는 수취제는 그 소경전을 경작하는 자영적 소농민층의 보편적 존립 현상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결코 보편적으로 운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즉 토지와 家戶를 소유한 자영적 소농민층의 광범한 성장과 그 보편적 존립을 전제로 하고, 그들을 상대로 보다 더 효율적으로 부·역을 수취하기 위하여 고안된 새로운 제도가 계전법으로 정착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라고 판단된다. 거실에서 품관에 이르는 유세한 지주사족들은 오히려 그같은 부·역을 모피하는 것이 관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10결 이상을 경작하는 자는 모두 豪富之民이요, 3·4결을 가진 자도 대체로 적다”거나, “소농민의 전지는 불과 1, 2결인 자가 많다”는 것이 이 시기 토지소유의 일반적 분화 상황이었다.074)≪世宗實錄≫권 83, 세종 20년 11월 경자 및 권 94, 세종 23년 12월 기유. 경상도의 경우 “백성으로서 논을 가진 것은 그 落種의 수가 많아야 1石地를 넘지 못하고, 적은 자는 10斗落에도 미치지 않는다”고 하는 정도로 소농민의 경작규모는 영세하였다.075)≪成宗實錄≫권 45, 성종 11년 7월 임신.
結負와 斗落의 관계를 살피자면, 湖南의 薄田은 40두락이 1결이요. 그 上畓은 20두락 정도가 1결이 된다고 하였다(丁若鏞,≪經世遺表≫권 8, 田制 10, 井田議 2).
충청도에서도 “1결의 토지는 한 사람(家戶)이 경작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田稅로) 바치는 것은 불과 몇 되에 불과하다”는 상태였다.076)≪成宗實錄≫권 197, 성종 17년 11월 신해. 그런데도 “하삼도에서는 각기 소경전의 다소에 따라 혹 몇 되, 몇 말 씩 농민들로부터 거두어 常稅를 삼는다”077)≪燕山君日記≫권 12, 연산군 2년 2월 계축.
이 시기 1결의 전세는 상상년 20두, 하하년 4두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일이다.
고 하는 바와 같이 일반 전세의 수납에서조차 소농민의 비중이 기본 바탕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3, 4결에서 수십 결에 이르는 대토지를 소유한 다양한 규모의 지주가 존속하였고, 그 사회적 성분도 왕실·宗親·勳戚·朝官·品官士族·부상대고·향리 그리고 사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편이었지만 대체로는 왕실에 가까운 자일수록, 그리고 고위 관직을 띤 경우일수록 대토지를 소유하였으며, 동시에 그 소유지도 여러 군현에 분포되어 있었다. 가령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다가 역모로 몰려 가산이 적몰된 錦城大君의 지주지는 6개 도 13개 군현에, 死六臣 가운데 成三問의 소유지는 4개 도 6개 군현에 분포하고 있었다.078)≪世祖實錄≫권 3, 세조 2년 3월 정해 및 권 7, 세조 3년 3월 병술. 또 가령 李滉의 孫子女가 分衿한 토지는 3천여 두락으로 5개 군현에 걸쳐 분포하고 있었다.079) 李樹健,<退溪 李滉家門의 재산 유래와 그 소유형태>(≪歷史敎育論集≫13·14, 慶北大, 1990), 657쪽.

그같은 지주지의 경영은 기본적으로 지주 자신 혹은 그 대리인이 농장으로 직영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며, 그 경작 노동력으로서는 主家 가까이 거주하는 노비들을 기본으로 하고 더하여 婢夫·雇工이라든가 혹은 협호인들을 집단적으로 동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주가의 농장에 기본 노동력으로 동원되는 노비도 자기 경리를 전혀 갖지 못한「率居노비」는 드물었으며, 대체로는 주가로부터 대여받는 ‘私耕’이라는 형태의 자기 개별 경영을 가지는「率下노비」였다. 아직 자연조건이나 노동조직의 한계성으로 인하여 하나의 농장이 일정 규모를 초과하는 대경영의 형태로 전개되기는 어려웠으며, 따라서 대지주의 경우라도 기껏 3, 4결 정도 규모의 농장을 여러 곳에 분산적으로 경영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080) 李鎬澈, 앞의 책.
李榮薰, 앞의 글.
최근의 연구에서는 지주지의 일부씩을 노비가 배정받아 자기 책임하에 경작하고 所出의 거의 모두를 主家에 바치는 ‘作介’라고 하는 경작형태도 15, 6세기에 관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사실은, 어느 지주지이든 그 경영형태는 당해 토지의 집약도라든가 비옥도에 따라 크게 좌우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지주지가 상대적으로 비옥하고 한 곳에 집약적으로 위치할수록 그것이 농장으로 직영되는 경향이 컸을 것이며, 그 반대의 경우일수록 비농장적 직영의 형태를 취하든가 병작지로 대여하는 경향이 컸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같은 지주지 혹은 농장은 대개 중앙과 지방의 양반가의 소유로, 국가를 지탱하는 기본 경제적 범주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로 이 시기 전세·요역·공물·군역을 바침으로써 국가를 지탱하는 기본계층은 역시 자영농층이며 그들의 소규모 개별적 경영이야말로 이 시기의 기준적인 영농형태였다. 그같은 소경영의 소유=경영분화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논단하기에는 사료의 제약이 너무 크지만, 세종대에 보고된 강원도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 대강을 짐작할 수는 있다. 즉 세종 17년(1435)에는 부역 수취의 기준으로 토지소유의 다과를 기준삼아 50결 이상을 大戶, 20결 이상을 中戶, 10결 이상을 小戶, 6결 이상을 殘戶, 그리고 5결 이하를 殘殘戶로 책정한 바 있다.081)≪世宗實錄≫권 67, 세종 17년 3월 무인. 이 기준에 따르면 강원도는 도내의 호총 11,538호와 결총 63,627결 가운데에서 대호는 10호, 중호는 71호, 소호는 1,641호, 잔호는 2,043호, 잔잔호는 7,773호의 분포 상태에 있다는 것이 동왕 18년 監司의 보고에 나타나 있다.082)≪世宗實錄≫권 74, 세종 18년 7월 임인. 이를 보다 알기 쉽게 표시하면 다음<표 2>와 같다.

구 분 50결 이상 20결 이상 10결 이상 6결 이상 5결 이하
戶 等 大戶 中戶 小戶 殘戶 殘殘戶 63,627結
戶 數 10 71 1,641 2,043 7,773 11,538戶
百分比 0.1 0.6 14.2 17.7 67.4 100%

<표 2>세종 18년 강원도 토지소유 분화

우선 여기 호등에 파악된 사실들은 한 도의 감사가 중앙정부에 보고한 내용이었으니 만큼 비록 잔잔호로 분류된 소농민의 경우라 할지라도 대체로는 이른바 “恒産을 가지고 恒心이 있는 자로서 그 군현의 호적에 올라 賦·役을 제공하는”083)≪太宗實錄≫권 18, 태종 9년 12월 무오. 불완전하나마 자영농적 존재들이었다는 사실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항산도 없고 항심도 없어서 금년에는 南州의 豪猾家에 숨었다가 명년에는 北郡의 鄕愿家로 옮겨 가버리는 半流亡 상태의 농민들은 애써 刷括하더라도 금일 付籍하면 명일에는 유망해버리기가 십상이었다는 것이다.084) 위와 같음.

그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위 강원도의 토지소유 분화상황을 고찰하면, 10결 이상을 소유한 대·중·소호는 대체로 양반 신분의 지주층으로서 주로 농장의 경영형태로 자신들의 지주지를 관리하면서 여분의 땅은 병작지 따위로 대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6결 이상의 잔호로 분류된 축도 기실 자영농으로서는 부농에 속하는 편이었다. 그 신분이 사족이거나 양민일지라도 그만한 정도의 토지규모라면 다소의 노비호, 고공이나 비부 따위 노동력을 구사하는 자영의 형태를 취하면서 남는 땅이 있으면 부근의 빈농들에게 병작지로 대여하거나, 그같은 노동력을 직접 사역하여 전체를 농장제적으로 경영하는 방식도 충분히 가능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위의 표에서 가장 큰 비율을 점하고 있는 잔잔호야말로 일반 농민층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 가운데에는 이 시기 전형적인 소농민경영체로서의 양민 자영농이 위치하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기록에서는 그냥 5결 이하의 소유자라고만 분류해 두었으나, 거기에는 물론 4, 5결 정도의 부농으로부터 1결 미만의 영세농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영체들이 분포해 있었고, 그것도 영세농쪽이 훨씬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 명백하다.085) 주 39∼41에 제시한 사료 참조. 그리고 재생산과정에서의 자립이 어려운 영세농일수록 인근의 지주지를 부분적으로나마 병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다소간의 예속적 관계를 벗어나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풍년에는 徭賦 때문에 괴롭고 흉년에는 徵債로 시달려 가산을 다 팔고 遊離 失所하여 타인에게 기식하는 자가 많다”086)≪成宗實錄≫권 45, 성종 5년 7월 기사.는 것이 이 시기 영세 소농들의 일반적 분화 진로였다.

그런데 위의 강원도감사의 보고에서는 파악되지 않았으나 이 시기에는 빈농 혹은 무전농들의 병작농업도 점차 관행이 되어 가고 있었다. 지주와 병작농이 토지의 소출을 절반씩 나누는 이 형태는 사료상으로는 이미 전대부터 관행으로 되어 온 것으로 이해된다.087)≪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租稅條에 의하면, 고려 광종 24년(973) 및 예종 6년(1111)에 陳田을 墾耕하는 경우 일정 연한 뒤부터 전주와 경작인 사이에 소출을 ‘分半’한다는 규정이 정비되었다. 이를 흔히 병작반수 혹은 소작제로 해석하는 수가 있으나(姜晋哲, 앞의 책 및 浜中昇, 앞의 글), 이는 경작관계의 구체적 검증을 통한 해석이 아니라 다만 사료 가운데의 ‘분반’이라는 문자에 의존한 해석일 따름이다. 이에 관해서는 앞으로 구체적 검토를 요한다. 가령 여말선초의 政法家인 鄭道傳은 ‘前朝의 田制’를 설명하면서 여러 가지 分給收租地의 예를 들고 다시 민간의 소유·경작관계의 사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민의 所耕인 즉 그 自墾 自占을 聽許하여 관이 이를 제약하지 않으니 힘이 있는 자는 널리 개간하고 세력이 강한 자는 많이 점거하였는데, 약자는 또한 강하고 힘 있는 자를 좇아 借耕하여 그 소출을 分半한다. 경작자는 하나인데 그것을 먹는 자는 둘인 터이어서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빈자는 더욱 빈곤하게 되었다(≪朝鮮經國典≫賦典 經理).

즉 지주의 토지를 차경하여 그 소출을 반씩 나누는 경작관행은 竝作半收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고, 또 이는 그가≪조선경국전≫이라는 治國의 일대 법전을 마련하면서 그 총론에서 서술한 내용이므로 여말선초에는 이것이 민간의 일반적 영농형태로 널리 시행되고 있었다고 해석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서술은 병작반수의 收奪性을 거론함으로써 혁파되어야 할 영농형태라는 점을 강조하는 데 주안점을 둔 관계로 그 경영의 구체적 실상이 어떠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제 이 시기 병작영농에 관한 더 구체적 실정을 전해주는 다음의 사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前朝의 말기에 민폐가 다단하였는데 我朝에 이르러 점차 혁거하였으나, 민간에는 아직도 폐단이 남아 있다.…品官·鄕吏가 토전을 광점하고 유망민을 招納하여 竝作半收하니, 그 폐단이 私田보다 심하다. 사전은 1결에 풍년이라도 다만 2석을 수취하는데 병작은 많은 경우 10여 석을 수취한다. 流移者들이 이에 의탁하여 피역하게 되고 影占者들이 이에 의탁하여 그들을 隱接시키니, 부역이 균평하지 않은 까닭이 오로지 여기에 있다.…전지의 병작은 鰥·寡·孤·獨, 무자식·無奴婢者로서 3, 4결 이하를 경작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체 금단할 일이다(≪太宗實錄≫권 12, 태종 6년 11월 기묘).

여기 병작반수제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지주가 유망민을 끌어모아 병작제를 유도하는 경향이 있으며, 병작농민은 피역 따위의 불가피한 사정으로 거기에 의탁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유망민을 초납하여 병작반수관계를 맺었으니, 지주가 그들에게 토지는 물론이며 종자·농구·畜力, 그리고 처음에는 農糧까지도 대여하여야만 비로소 영농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필연의 형세였다. 실상 ‘竝作’ 혹은 ‘竝耕’이라는 용어 자체는 그같이 지주와 작인 사이에 토지를 매개로 하는 다방면에 걸친 助耕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정착하게 된 것이라고 해석된다.088) ‘竝作’ 혹은 ‘竝耕’이란 말은 고려시대까지의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深谷敏鐵,<朝鮮の土地慣行竝作半收試論>(≪社會經濟史學≫11-9, 1941). 또≪孟子≫권 5, 滕文公篇에 “賢者 與民竝耕而食”이라는 표현이 보이지만, 물론 이것이 여말선초의 병작제와 연결된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한 병작관계에서는 병작농의 지주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매우 높고 예속성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일정한 수준의 농업생산력의 조건 아래에서 지주와 경작자가 서로 돕는 관계로 결부된 고려말·조선초의 이같은 영농형태야말로 우리 나라 병작제의 원형이며 또한 그 전형이었던 것이다.089) 현재 학계에서는 이 시기의 竝作制를 곧 小作制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는 수가 있으나「小作」이라는 용어는 물론 한국의 농업관행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한국에서 대체로 소작제 영농형태에 가까운 地主·佃戶制 즉 지주가 단지 토지만 대여하고 추수 후 作人과 소출을 分半하는 영농형태는 조선 후기에 가서야 三南지방을 필두로 정착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무엇보다 그것이 보편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소작」농민의 재생산과정에서의 일정 정도의 자립이 생산력을 토대로 보장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상대적으로 성취되는 것은 대체로 조선 후기에 가서야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병작반수제는 국가의 금단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농업생산력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고 병작농 자신의 재생산과정에서의 자립도가 워낙 낮았기 때문에 아직도 부차적인 영농관행에 머물렀던 것으로 이해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아산의 관둔전을 점거한 황수신의 경우를 보면, 그것은 지주에게는 농장의 경우보다 이득이 적고 따라서 당연히 관심도 적은 영농형태인 것으로 말해졌다. 즉 지주지의 본격적 경영형태는 어디까지나 농장을 위주로 하고 있었으며, 병작제는 극히 부분적인, 오히려 예외적인 영농관행으로 말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佃作’ 혹은 ‘半作’으로 표현하는 다음의 기록들은 각기 이 시기의 병작반수제가 예외적이며 또한 지주들에게 기피되고 있는 영농형태였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① 京畿 및 下三道의 豪俠之家는 良田을 광점하고서 혹 번갈아 陳荒시키거나 혹은 남에게 대여하여 佃作시키기도 한다(≪世祖實錄≫권 9, 세조 3년 10월 임자).

② 廣耕을 힘쓰면 陳荒될까 염려스럽지만, 薄田을 飢民에게 부쳐 半作을 하는 것은 내버리는 것과 같으니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李滉,≪陶山全書≫권 4, 內篇 答寯).

즉 15, 6세기의 병작반수제는 농토를 진황시키는 것에 버금가는 정도로 염려스러운 영농형태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連作으로 인해 농업생산력이 발전되었고, 貢法전세제의 정착에 따라 상대적으로 전세의 부담률이 낮아졌기 때문에, 지주가 국가에 납부하는 전세와 지주가 병작자로부터 수취하는 ‘半收’의 지대 사이에 차액이 보다 항존하게 되었고, 따라서 병작제의 발전 지반이 갖추어진 셈이었다.

실제로 15세기 후기에도 “우리 나라는 땅이 좁아 무전민이 거의 3/10이나 되니, 토지를 가진 자가 有故하여 耕種이 불가능하게 되면 隣里·族親이 병작하여 (수확을) 나누는 것이 민간의 常事다”090)≪世祖實錄≫권 11, 세조 4년 정월 병자.라고 할 정도로 병작제는 점차 발전하고 있었다. 또한 16세기말 경상도 安東지방의 金慄이라는 한 지주의 토지와 노비를 구체적으로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토지와 노비의 결합으로 구성된 직영제 농장의 경우보다도 병작지로 대여하고 있는 토지가 더 많았다는 실증적 연구도 나와 있다.091) 李榮薰, 앞의 글. 이는 물론 사례 연구에 속하는 것이어서 보편화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 시기 영농형태 변천의 경향을 짐작하기에는 족하리라고 이해된다.

더구나 16세기로 내려갈수록 소농민경영의 분화는 점차 가속화하고 있었다. 중종연간에 논의된 다음의 기사는 그같은 현상의 일단을 보여준다.

농민의 생존은 그 전토를 가지고 하는 것인데 豪右가 이를 겸병하니 窮한 자는 비록 父子 相傳의 토지라도 모두 팔아버린다. 그 때문에 부자는 전지가 阡陌을 잇닿고 가난한 자는 立錐의 땅도 없다. 부익부 빈익빈이 지금처럼 심한 때가 없었다(≪中宗實錄≫권 32, 중종 13년 2월 경인).

順天 등지에서는 豪富民 1가의 축적이 혹 만 석이나 5, 6천 석에 이르고 落種하는 것도 200석 落地에 이른다. 천지의 소생인 財貨百物이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 있는데, 어찌 1인에게 모여져서야 되겠는가. 한 고을 안에 2, 3인이 경작하면 그 나머지는 경작할 땅이 없는 것이다(≪中宗實錄≫권 33, 중종 13년 5월 을유).

그 가운데서도 특히 전세·요역·공물은 물론 군역까지를 부담하는 국가 기본 계층으로서의 양민 자작농층의 몰락은 더욱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다. 다소 과장된 표현이라고는 짐작되지만, “지금 전지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 사족뿐이니 수다한 백성치고 누가 尺寸의 토지라도 가진 자가 있을 것인가”라거나, “양민으로서 전지를 소유한 자는 실로 1인도 없다”092)≪中宗實錄≫권 64, 중종 23년 11월 신축.는 정도의 형세가 조성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15세기 후기에 無田民이 3/10이라 하였으니, 자작농층이 7/10에 가까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셈이 된다. 그들이 점차 분해되어 무전민 혹은 田少農으로 몰락하고 있었다면 그들의 영농형태에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을까. 다음은 그것을 유추케 하는 기사이다.

平時에는 사족만이 田庄을 소유하고 있을 뿐이요, 백성은 없어서 모두 幷耕해서 먹고 산다(≪宣祖實錄≫권 140, 선조 34년 8월 무인).

물론 이 말에도 다소의 과장이 섞여 있겠지만, 16세기로 내려올수록 병작반수제가 점차 확고한 영농관행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는 경향만은 충분히 짐작케 한다.

조선 전기사회는 농업 경영면에서 몇 가지 영농형태의 복합 구조를 그 기초로 하고 있었다. 즉 경영의 주체라는 면에서 볼 때 지주의 농장형, 소농민의 자영형, 그리고 영세소농 혹은 무전민의 병작형이라는 세 가지 형태가 그것이다. 세 가지는 각기 차원을 달리하는 형태이며, 국가를 직접 상대하는 것은 앞의 두 가지가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상호 규정적으로 얽히면서 전개되고 있었다.

그런데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구성 비율을 들자면 역시 소농민 자영형이 기본이 되고 지주지 농장형이 그 다음을 점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병작 영농은 초기에는 아직도 농장이나 지주지의 외곽에서 부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생산력의 발전과 함께 점차 그 독자성을 높여갔으며 특히 16세기로 내려올수록 소농민의 분화에 따라 점차 보편성을 띤 영농 관행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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