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3. 상품의 유통과 공납제의 모순
  • 1) 장시의 발달
  • (2) 장시의 성립과 확산

(2) 장시의 성립과 확산

15세기 중세사회가 재편성되고 사회적 생산이 증대됨에 따라 상품유통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급격히 늘어나 시장경제는 도시상업 범위에서 벗어나 지방으로 확대되어 갔다. 1430년대에는 정부에서도 화폐유통공간의 확보를 위해서라도 지방에 향시(場)를 널리 설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게 되었다.114)≪世宗實錄≫권 59, 세종 15년 정월 임신.

장시는 당초 場門이라고 불렸다. 정부에서 장시의 출현에 대하여 거론하기는 성종초인 1470년대부터였다. 당시 정부는 전라도 務安 등 여러 읍에서 이익을 꾀하는 무리들이 장문을 열어 민에게 해를 끼친다고 보았다.115)≪成宗實錄≫권 20, 성종 3년 7월 임술. 그런데 무안·羅州 등 물산이 풍부한 여러 읍에서 대흉황을 맞게 되자 사람들이 서로 모여 市鋪, 곧 장문을 열었다. 그리고 여기에 의뢰하여 흉년을 넘겼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救荒의 차원에서라도 그 설립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외방의 큰 읍이나 인민이 번성한 곳에 시포의 설치가 허락되었다.116)≪成宗實錄≫권 27, 성종 4년 2월 임신.

그후 장문은 도적들이 장물을 파는 곳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도적이 흥행하는 이유가 된다고 하여 그 설치에 부정적인 시각도 다시 등장하였다.117)≪成宗實錄≫권 204, 성종 18년 6월 무자. 그러나 구황에 도움이 되니 흉년에는 폐할 수 없다는 것이 왕과 중앙관료들의 일반적인 입장이었다. 특히 성종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바꾸는 것 자체를 금할 수는 없다고 하여 장문폐지가 불가함을 주장하기까지 하였다.118) 위와 같음. 이는 당장은 진휼의 방편이나 화폐통용을 위한 매개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한 데에서 기인하는 현상이었지만, 결국은 務本抑末의 방침하에 장시금지책을 세우고 있던 조선이 농민층 서로간의 교역행위 및 그 시장기구를 승인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단초가 되었다. 이처럼 소농경영의 안정을 위해서 장시의 필요성은 인정되었다.119)≪中宗實錄≫권 31, 중종 13년 정월 임자.

凶歉은 장시출현 이전이나 이후 어느 시기에나 만성적으로 내습하는 자연재해였지만,120) 이 시기 자연재해에 관하여는 오종록,<15세기 자연재해의 특성과 대책>(≪역사와 현실≫5, 1991) 참조. 이런 자연재해는 장시 내지 유통이 발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수재나 한재 등으로 말미암아 수확이 저조하여 많은 농민들이 굶어 죽기에 이른 때에는, 형편이 보다 나은 지역으로부터 부족한 지역으로 미곡이 대량으로 유출되고, 때로는 이 과정에 투기가 유발되어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농민들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식량을 비록 높은 가격을 지불하고서라도 상인들로부터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종 19년(1437) 하삼도지역에 흉년이 들어 공주 등지에서 미 2두의 값이 면포 1필로까지 폭등하자, 흉년이 비교적 덜한 북부지역에서 쌀을 사서 남부지역에 파는 상인들의 행렬이 길에 이어지고 있었다.121)≪世宗實錄≫권 76, 세종 19년 2월 기사. 이는 자연재해로 인한 미곡가격의 지역차를 이용하여 상인들이 활발한 상업활동을 벌이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122) 남원우, 앞의 글, 77쪽.

앞에서도 지적하였듯이 15세기 후반의 장시가 흉년에 농민들이 활로를 찾기 위해 마련한 것이란 점이 집권층에게는 공통된 인식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전반적인 ‘抑末’의 분위기 속에서도 “흉년에는 장문이 구황에 유익하다”고 인식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16세기초에 이르면 흉년에 진휼책의 하나로서 장시의 설치가 건의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장시의 전국적인 확대와 지속적인 보급이 모두 흉황에서 유발되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장시가 출현하고 확산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은 이 시기 농민들 사이에 장시를 둘러싼 이해관계가 새롭게 형성된 데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농민들이 장시를 이용하는 이유는 장시에서 교역에 수반하여 얻어지는 이득이 농민·수공업자에게 곧바로 귀속되었기 때문이다. 직접생산자들은 자신들의 판매물이나 필요로 하는 수요물을 상인을 통하는 것보다 비싼 값으로 판매하고 싼 값으로 구득할 수 있었다. 농촌시장으로서의 장시가 성립하게 되는 기본 동기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처럼 장시는 직접 생산자들의 커다란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교환시장이었다. 장시는 농민의 새로운 교환시장으로서, 이전에는 없었던 유통기구였다. 그리하여 전라도 장문은 서울의 시와 같은 것으로 인식되었다.123)≪中宗實錄≫권 8, 중종 4년 6월 갑자.

전라도 무안 등 여러 읍에서 장시가 처음 발생하였을 때는 월 2차례씩 출시하였다. 농민의 교역활동이 더욱 활발하여지자, 장시는 각 도·각 읍으로 확산되어 갔다. 수요가 늘어감에 따라 출시 횟수도 증가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6세기 초반에 들어서면서 현저하게 나타났다. 중종 11년(1516) 충청도의 장시는 민원에 따라 중앙에서 허락하였고,124)≪中宗實錄≫권 27, 중종 11년 12월 정미. 곧 이어 경상도에서도 등장하였다.125)≪明宗實錄≫권 3, 명종 원년 2월 무신. 중종 15년에는 “지금 여러 도에 모두 場門(鄕市;原註)을 설치하였다”126)≪中宗實錄≫권 38, 중종 15년 3월 기유.라고 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도내에서도 그 수가 증가하였고 전라도에서는 더욱 성행하여 출시하는 자가 수만여 인이나 되었다.127) 위와 같음. 그리하여 “지금은 방방곡곡에 출시하지 않는 곳이 없다”라 하기도 하였다.128)≪中宗實錄≫권 31, 중종 13년 정월 임자. 특히 서울에는 외방에서 사람들이 몰려 들어 曲坊委巷에 출시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129)≪中宗實錄≫권 21, 중종 9년 11월 계유.

16세기 중엽에 이르면 월 3차례씩 출시하는 곳도 있어서 10일장도 생겨나고 있었다. 16세기말에는 경기지방에서도 여기저기 출현하였다. 임진왜란을 거친 뒤로는 더욱 성행하였으며, 출시 횟수도 장시의 숫적인 증가와 더불어 잦아지고 있었다. 17세기로 넘어설 무렵에는 한달 30일 가운데 장이 서지 않는 날이 없다고 할 정도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정은 선조 40년(1607) 사헌부에서 “열읍 장시가 적어도 3, 4처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 오늘은 이 읍에 나가고 내일은 이웃 읍에 나간다. 또 다음날은 또 다른 읍으로 나가 한달 30일 내에 장이 서지 않는 날이 없다”130)≪宣祖實錄≫권 212, 선조 40년 6월 을묘.라고 한 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장시는 3, 40리 지점마다 설치되고 5일장으로 진전하고 있었으면서도, 아직은 수개의 장시가 완전히 하나의 장시권으로 연결되지는 못하였다. 물자가 풍족하고 교통이 편리한 점에서 선진지대라 할 林川·韓山 일대조차 그런 형편이었다.131) 李景植, 앞의 글(1987), 55∼56쪽. 이는 소상품의 생산·유통·수요의 단계가 이 정도에 머물고 있었다는 한계를 말하여 준다.

16세기에 장시는 농촌시장으로 성립하는 단계에 있었으며, 이제 비로소 장시권형성의 초기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 전 기간을 통하여, 장시의 수는 증가하고 그 출시 횟수는 늘어 갔다. 이는 그만큼 농민층의 교역이 성행하고 교역물자에 대한 수요가 증대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농민·수공업자의 소상품 생산과 유통은 활발하여지고 있었으며, 이들의 물자구득은 장시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처럼 장시는 농민경제의 유통기구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고 발달하여 갔다.

농민들의 교역이 전적으로 장시에만 의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선상이나 負褓商을 통한 물자취득은 농민의 직접적인 교역활동에 부수되고 이를 보충하여 주는 데 지나지 않았다. 농민교환시장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장시였다. 농민이 유통경제와 불가분의 관련을 갖고, 농업경영 또한 이와 깊은 관계를 맺어 감에 따라 농촌사회는 변동하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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