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3. 상품의 유통과 공납제의 모순
  • 2) 공납제의 폐단과 방납
  • (1) 공납제의 문제점과 폐단

(1) 공납제의 문제점과 폐단

148) 이 부분에 대하여는 高錫珪, 앞의 글을 주로 참고하였다. 그 밖에 田川孝三,<貢納·徭役制の崩壞と大同法>(≪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과 金玉根,≪朝鮮後期經濟史硏究≫(瑞文堂, 1977) 등이 참고된다.

조선 건국 이후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재정은 고려의 遺制 위에서 방대한 貢案에149) 貢案은 원래 貢物뿐 아니라 田稅 및 諸稅도 포함하여 이를 세목으로 분류, 그 상납읍·액수 그리고 상납자의 이름 등을 자세히 기록한 장부였다. 그러나 조금 늦은 시기의 기록이긴 하나≪宣祖實錄≫권 42, 선조 34년 10월 을유라든가≪孝宗實錄≫권 21, 효종 10년 2월 무자 등의 기록에서 보이듯이 대개 공안은 양안·호적과 병렬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공안이라 하면 土貢과 田貢에 대한 수입장부였다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의한 수입으로 유지되었다. 따라서 재정적인 면에서 수지의 적합성은 고려되지 못하였다. 이에 민의 부담을 덜어주고 경비지출의 규모를 세우는 등 재정제도를 정비하게 되는 것은 세조대를 거쳐 성종연간에 이르러서였다.

세조 10년(1464)에 이르면 이러한 공안에 개정을 가하여 공액을 크게 경감하였고, 성종대에는 이를 다시 줄였다. 한편 수지의 균형을 이루고자 橫看을 제정하여 지출의 규모도 정하였다. 세조대에는 국가의 경비 전반에 걸친 經費式例를 査定하여 횡간을 撰定하였고, 성종 4년(1473)에는 세종 말년에 정해진 各司 일부의 公用造作에 관한 式例(造作式例)를 완성하여 그 횡간을 작성·印行하였다. 이렇게 제정된 공안 및 횡간은≪經國大典≫戶典 經費條에 “모든 경비는 횡간과 공안을 사용한다”라고 법제화되어 국가의 경비 전반에 걸친 기반이 되었다. 이는 이후의 재정운영을 구속하였으며, 아울러 선초 貢納制의 성격도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정비된 공납제는 그 제도 및 운영상에 몇몇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첫째, 공안 및 횡간이 갖는 한계성이었다. 즉 貢額이 장기적으로 고정되어 있었다는 점과 공안에 그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不産貢物’이 分定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전자의 경우 공안의 공액은 한번 정해지면 장기간 부동적이었다. 이처럼 신축의 자유가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에 재정이 부족한 경우에는 引納·別貢이나 別用 등 별도의 수단을 이용하였다. 따라서 공안·횡간에 따른 예산제는 원칙이 준수되기 어려워 언제든지 허구화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한편 후자의 경우, 공물 분정의 원칙은 이른바 ‘任土作貢’으로서, 각 지방의 토산에 따르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산공물이 분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불산공물은 민이 그것을 마련하는데 가장 고통을 겪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防納의 길을 열어주는 일차적 요인이었다. 때문에 공안의 개정을 통한 불산공물의 조정은 실로 역대의 현안이었다.

둘째, 공물상납과정에서 나타나는 비리행위로 點退·防納의 문제가 있었다. 우선 공물상납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각 지방 수령은 공안에 따라 분정·부과된 공물을 管下의 민호로부터 課徵하거나, 향리·所屬公奴·匠人 혹은 上番軍士 등을 사역하여 마련한 다음, 이를 貢吏로 하여금 정부 각 사에 직접 납입케 하였다. 공리는 상경 후에 통상 本官의 京邸(京在所)에 머물면서 京主人의 알선에 의해 공물을 납입하였다. 각 사는 이 상납물자에 대한 看品을 실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합격품만이 납입되었다. 관원의 간품은 대부분 형식적이었으며, 실무는 吏員·奴僕에 맡겨졌다. 이들은 점검의 직권을 빙자하여 공리에게 賄賂를 강요하였고 응하지 않으면 합격시키지 않았다. 이러한 행위를 ‘點退’라 하였다. 이처럼 철저하지 못한 공물의 상납절차 안에서 점퇴라는 수단을 악용한 방납모리의 행위가 나타났다.

셋째, 민호에 대한 부과규정의 미비라는 문제가 있었다. 공물을 최종 부담자인 민호에게 어떻게 나누어 거둘 것인지에 대한 규정이 명백하지 않았다. 공납제에서 田結數가 공물부과의 기준이 되었다고는 하나 이는 단지 부·목·군·현 각 관의 등급에 따라 일방적으로 결정되었을 뿐, 실제의 전결수가 단위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150)≪宣祖修正實錄≫권 24, 선조 23년 4월. 더구나 민호의 소유전결이 기준이 되었던 것은 더욱 아니었다. 따라서 각 읍을 단위로 나누어진 공액을 실제로 민호에 어떻게 부과하였는가는 분명하지 않다. 이를 엿볼 수 있는 근거로는≪朝鮮王朝實錄≫에 보이는 “戶口·田籍을 계산해서 貢賦를 정한다”151)≪世宗實錄≫권 58, 세종 14년 12월 계묘., “무릇 貢賦·徭役은 민이 경작하는 田地(所耕田)의 結負數에 따라 정한다”152)≪成宗實錄≫권 4, 성종 원년 4월 병자. 등의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計田籍民法에 의해 정해지는 호의 등급을 따라 出役의 기준을 세우는 役民式에 의하였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경국대전≫戶典 徭賦條에 “무릇 전지 8結에 1夫를 낸다”라고 규정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역민식을 따른다 하더라도 이 조항은 원래 요부에 관한 규정으로, 요역이 요구되는 공물의 경우에는 원용이 가능하였겠으나 잡다한 여러 종류의 모든 공물에 확대 적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역민식에서 기준이 되었던 전결은 부담의 주체가 불투명한 상태의 所耕田이었지 所有田은 아니었다.153)≪世宗實錄≫권 101, 세종 28년 정월 경인. 이런 규정의 미비야말로 공부 부담의 불균현상을 초래케 한 공납제의 커다란 결점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점들이 어떻게 그 폐단을 드러내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연산군은 戊午·甲子年의 두 士禍를 거치면서 걷잡을 수 없는 亂政을 자행하였다. 그는 환락과 사치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온갖 작폐를 다 하였고, 경비의 남용을 은폐하기 위하여 장부를 삭제하는 일까지 자행하였다. 그리고 이를 비난하는 중앙과 지방의 언론도 일체 봉쇄해 버렸고, 오직 일방적인 供上만을 강요하였다.

이와 같은 정치의 문란상은 먼저 공납제 문제의 하나였던 貢案 및 橫看의 한계성을 노출시켰다. 연산군 3년(1497)에 知事 李世佐는, 공안이 세종대에 비하면 불과 3분의 1밖에 되지 않아 용도가 많이 늘어난 지금, 그 공안으로는 各陵·殿에서 써야 하는 시탄조차 마련하기 어렵다고 하여 공안의 개정을 청하였다.154)≪燕山君日記≫권 28, 연산군 3년 10월 무자. 즉 세조·성종연간에 정해진 공안으로는 군·옹주 등의 증가에 따라 늘어나는 경비를 지탱할 수 없으니 이를 현실화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왕 6년에 僉正 鄭譚은 각 사 공물의 부족으로 인한 加定에서 비롯되는 민폐를 해결하고자 공안의 添錄을 청하기에 이르렀다.155)≪燕山君日記≫권 39, 연산군 6년 12월 임진. 그리하여 이듬해 4월에는 貢案詳定廳을 설치하였고,156)≪燕山君日記≫권 40, 연산군 7년 4월 임진. 그 해 7월에<詳定廳可行條例>를 결정하였다.157)≪燕山君日記≫권 40, 연산군 7년 7월 갑자. 그에 따라 만들어진 공안이 辛酉貢案(또는 癸亥貢案)이었다. 이는 그 후 가정의 대표적 공안이 되었다.

이후에도 濫費는 더욱 방만해져 “常貢 외에 加定·引納이 없는 해가 없다”158)≪燕山君日記≫권 43, 연산군 8년 3월 임오.고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연산군은 “供上의 일에 어찌 민폐를 헤아리겠는가. 聖人이 다시 난다 해도 반드시 經常의 법을 좇을 수는 없을 것이며, 權道를 따름이 있을 것이다. 각 도에서 加斂함에 만일 또 부족하면 또 가렴함이 어찌 해가 되겠는가”159)≪燕山君日記≫권 55, 연산군 10년 8월 임신.라 할 정도로 스스로 가렴의 정당성을 주장하였으며, 아예 공물의 가정을 입법화하기까지 하였다.160)≪燕山君日記≫권 59, 연산군 11년 9월 신해. 이처럼 연산군대를 거치는 동안 가정·인납·別例·市貿 등은 경비조달책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고, 횡간 외에 別用·雜用 등도 상시적 행위가 되어 버려, 공안·횡간에 의한 예산제는 사실상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

다음 공납제의 또 하나의 문제인 點退·防納의 비리행위는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각 관에 분정된 공물 중에는 애초부터 불산공물이 있어 그 마련이 어려웠다. 또 備納기한의 촉박, 철 지난 물품의 요구, ‘無時供進’, 別徵 등에 따라 마련하기 어려운 물종의 경우에 특히 민의 고통이 심했다. 이러한 공물 분정에서의 불합리는 민에게 비납의 편의를 위해 부득이 방납을 이용하도록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161) 金鎭鳳,<朝鮮初期의 貢物代納制>(≪史學硏究≫22, 1973), 20쪽.

그런데≪경국대전≫의 규정에 의하면, 공물은 다음해 2월(田稅貢物은 6월)까지 상납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만일 六司 이상에 미납한 경우는 수령을 罷黜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이 규정에 의거하여 공물을 미납한 수령들이 推考 대상이 되었다. 중종 19년(1524)에 형조가 공물을 납부하지 않은 수령으로서 파출을 청한 대상이 황해도에만도 10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도에도 마찬가지였다.162)≪中宗實錄≫권 51, 중종 19년 9월 임술. 또 감사나 수령은 공물불납의 경우는 물론이었지만, 특히 進獻·進上·方物 등에서는 御用에 적합치 않거나, 늦게 올려 보내거나, 품질이 떨어지는 경우에도 추고되었다. 이같은 처지에서 수령은 민의 편의를 돌보기 전에 스스로의 면책 즉 解由를 위해서라도 다른 수단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때 가장 쉽게 채택할 수 있었던 것이 곧 방납이었다.

또한 방납은 성종대의 尹殷老(이조판서), 연산군대의 鄭崇祖(호조판서), 중종대의 金安老(예조판서), 명종대의 李芑(우의정)·鄭世虎(호조판서)·陳復昌(대사헌)·許曄(장령)·尹元衡(영의정) 등 당대의 실권자들에 의해서 모리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京官을 통해 수령들에게 직·간접으로 방납을 강요하기도 하였다.163) 高錫珪, 앞의 글, 181∼182쪽. 그리하여 수령은 면책을 위해, 경관은 권세가의 청에 못이겨 규찰하지 않아 방납의 폐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처럼 수령의 면책을 위한 자구책과 위로부터의 압력가중에 의해 방납은 공적인 계통에서조차 불법적으로 만연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그 주체도 확대되었고, 대상공물도 다양해졌다. 그리하여 방납에 관계하는 계층은 小民의 모리배들로부터 사대부들에게까지 미쳤고 이에 王子諸宮·公卿大夫 등이 편승하였다. 대상공물도 각 사의 공물에 그치던 것이 나중에는 御供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한편 민호에 대한 부과규정의 미비는 어떠한 문제를 낳았는가. 막연히 전결의 다과에 의한다는 공물부담 규정의 모호성은 부담의 극심한 불균이란 문제점을 드러냈다. 당시 자·소작 형태가 병존하던 토지소유단계를 고려하지 않고 막연히 “전결수에 따른다”고 하였을 뿐이어서, 부담주체의 설정이 분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초의 토지소유 자체는 아직 분화의 정도가 약하여 미비된 규정하에서도 그다지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6세기 이래 지주 전호제가 광범위하게 전개되자 그러한 결함은 사회의 현실문제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선조 6년(1573)에 柳成龍은 “지금 田土가 阡陌인 자는 모두 豪勢家로서 貢賦를 拒納하는 무리들이고, 小民의 納貢하는 전토는 지극히 적다”164)≪宣祖實錄≫권 7, 선조 6년 3월 정유.고 하여 호세가에 의한 토지겸병현상과 그에 따른 공부 부담의 불균을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이 불균현상을 해결하는 방법은 결국 종래의 규정이 갖는 공부 부담의 미비를 극복하는 것뿐이었다. 그 방법은 균등한 배분의 전제인 結當 課收量의 詳定이었다. 즉 貢物價를 算定하고 이를 결당 단위로 나누어 부과하는 방식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공안·횡간의 한계, 점퇴·방납의 문제, 부과 규정의 미비 등의 제도적 모순을 지니고 있던 선초의 공납제는 한 세대를 넘기기도 전에 그 부정적 지표들을 드러내 보이게 되었다. 공안·횡간의 취약성이 여지없이 드러났고, 방납의 폐단도 심화되었으며, 부담의 불균현상도 확대되어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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