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4. 군역제도의 붕괴
  • 2) 갑사·정병·수군 군역의 변질
  • (1) 갑사제의 쇠퇴

(1) 갑사제의 쇠퇴

갑사는 “우리 나라 군사 중에서 갑사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196)≪世宗實錄≫권 72, 세종 18년 5월 정해.라는 말과 같이 조선 초기에 있어서 가장 중추적인 군사력이었다.197) 甲士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가 참조된다.
車文燮,<鮮初의 甲士>(≪朝鮮時代軍制硏究≫, 檀國大 出版部, 1973).
閔賢九,<五衛體制의 確立과 朝鮮初期 中央軍制의 成立>(앞의 책).
李成茂, 앞의 책, 217∼256쪽.
柳昌圭,<朝鮮初 親軍衛의 甲士>(≪歷史學報≫106, 1985).
金鍾洙,<16세기 甲士의 消滅과 正兵立役의 變化>(≪國史館論叢≫32, 國史編纂委員會, 1992).
그래서 이들은 엄격한 신분적·경제적 자격 요건을 갖추고 시취에 응하여 從4品∼종9품에 이르는 西班 관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갑사는 保法 실시 이후 농민층의 피역 저항이 심화되는 가운데 중대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16세기 전반에는 농민들이 종래 士族·閑良層이 주요 구성원이었던 갑사로 떼를 지어 들어오려는 한편, 갑사의 근무 조건은 점점 열악해져 갔고 군사력도 점차 상실되어 갔던 것이다.

갑사는 양인 농민의 의무 병역인 정병에 비해 훨씬 우대되었다. 또 갑사가 되면 군관으로도 파견되고 萬戶·수령 등으로 승진하여 국가 권력에 동참할 수도 있었다. 이에 농민들은 “사람들이 다투어 들어가려는 것이 갑사만한 것이 없다”198)≪中宗實錄≫권 75, 중종 28년 7월 을묘.라는 것처럼 갑사로 투속하려 하였다. 중종 36년(1541) 황해도에서는 胥吏들이 무려 439인이나 되는 많은 사람에게 뇌물을 받고 군적을 위조하여 이들을 갑사로 만들어 커다란 사회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 시기 각 지방에서는 뇌물을 써서 갑사 자리를 얻는 사람을 “綿紬甲士”199)≪中宗實錄≫권 64, 중종 23년 11월 신축.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농민들이 자신들의 고된 의무 군역을 피하고자 갑사로 몰려들었지만 갑사에 대한 처우는 15세기와 같지는 않았다. 우선 농민들의 피역 저항이 광범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보인(봉족)의 확보가 쉽지 않았다. 조선 초기의 군역제는 보인이 正軍의 재정적 뒷받침을 맡도록 하는 것이 운영 원칙이었다. 또 보인은 재정적 뒷받침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갑사가 번상할 때 함께 번상하여 滯京時 그 뒷바라지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갑사의 질적 저하와 보인 확보의 어려움 속에서 “갑사라 하는 자들은 모두 보인이 없다. 간혹 보인이 있는 자라도 그 보인들로부터 保價를 받아서 활과 말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처자식을 먹여살리는 데 허비하여 무기없는 군인이 된다”200)≪中宗實錄≫권 15, 중종 7년 2월 임오.라고 하는 형편이었다. 갑사의 군사력은 저하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갑사는 스스로 軍裝과 騎馬·卜馬(짐말)를 갖추고 보인을 데리고 서울이나 戍所에 가서 軍裝 點考를 받고 번상 근무에 임해야 했으나, 16세기에 들어 軍裝價와 馬價가 급등하여 이것의 마련이 쉽지 않았다. 특히 말의 가격은 1필이 면포 100∼150필에 달할 정도였다.201) 위와 같음. 또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말을 먹일 草價가 너무 올라 말을 사육할 수가 없었고, 말이 죽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갑사들은 말이 있는 자도 적었을 뿐더러, 말이 있는 자라도 자신이 타고 온 말은 돌려보내고 서울에서 말을 빌려 타면서 군장 점고를 받고 시위근무에 임하였다. 그러나 빌려 타는 말의 값도 점점 인상되었다. 한편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른 정부의 기강 해이 속에서 갑사들은 고통을 받았다. 군장 점고를 받을 때 뇌물이 아니면 통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러한 터에 갑사에게 응당 주어야 할 녹봉도 제때에 지급되지 않았다.

이처럼 무자격자들이 다투어 갑사로 모속하려고 하였고 갑사의 근무 조건은 열악해져만 갔다. 이에 종래 무예를 익히던 사족 자제나 한량들은 갑사로 들어가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閑遊하거나 보다 대접받는 유학공부로 돌아서고 있었다. 이것은 16세기 崇儒, 右文政策 속에서 武人에 대한 사회적 천시풍조 때문에 가속화되었다. 당시 풍속은 “비록 하늘 天字라도 식별하면 貴人으로 대접하고, 활과 화살을 잡으면 모두 천시하였다”202)≪中宗實錄≫권 96, 중종 36년 11월 을사.라고 할 정도였다. 사족과 한량들은 지방에서 鄕案에 올라 鄕權에 참여하면서 군역의 차정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성리학의 심화와 사림세력의 등장과도 관련된 것이었다. 이에 따라 갑사는 사족들이 모두 빠져 나가버리고 보다 가벼운 군역으로 들어오려는 庶人으로 가득차게 되었다.203) 위와 같음.

그러나 16세기 후반에 이르면 갑사 역시 사람들이 극력으로 피하려는 곳이 되었다. 지위 하락과 질적 저하를 겪은 갑사는 입속하면 衛將·副將의 무리에게 침학을 받고 잡물을 부담하여야 하는 고역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권리는 모두 없어지고 의무만 남은 갑사에 사람들이 입속할 리가 없었다. 이 시기에는 갑사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萬戶와 같은 邊將도 사람들이 기피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명종 11년(1556) 국왕은 “국가가 평상시에 무사를 기르는 데 관작을 높이 주고 녹을 후하게 지급하며 은총으로 대우하고 있는데 무사들은 국가에 보답할 마음은 없이 피하려는 생각만 가진다”라고 한탄하고 “지금부터 변장을 피하려는 자는 일일이 充軍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204)≪各司受敎≫兵曹受敎, 丙辰 2월 27일. 신분이 높은 사람은 실속없는 군관직을 피하고 차라리 한유하는 것을 택했고,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국가의 군액 확보책에 대항하여 피역 저항을 감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갑사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서로 다투어 기피하게 되면서 그 정액조차 채울 수 없게 되었다. 선조 27년(1594) 4월 柳成龍이 올린 陳時務箚에 의하면,≪경국대전≫에 14,800명이었던 갑사의 정액은 그 1/3에도 미달하는 4,640명이 되었고 그나마도 장부상이라고 하였다.205)≪宣祖修正實錄≫권 28, 선조 27년 4월 을유.
柳成龍,≪西厓集≫권 5, 陳時務箚(갑오 4월).
임란왜란 이후 갑사는 급료병제에 입각한 새로운 軍營들이 설립되는 가운데 역사상에 그 자취를 감추었다.206) 金鍾洙,≪朝鮮後期 訓鍊都監의 設立과 運營≫(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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