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4. 군역제도의 붕괴
  • 3) 대립제의 성행

3) 대립제의 성행

대립이라는 것은 번상의 의무가 있는 군사가 스스로 번상을 하지 않고 어느 타인에게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여 대신 군사로서 역할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대립은 수군의 경우 이미 세종 때부터 있어 왔다. 수군은 군역 중에서도 가장 고역인데다가 세종대부터 이미 토목공사 등에 동원되는 역졸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 5년의 기록에는 “수군이 立番하지 않았을 때 수령은 人吏로써 대립하게 한다”234)≪世宗實錄≫권 20, 세종 5년 5월 정미.고 하였으며, 세종 21년에는 “부강한 船軍은 스스로 입번하지 않고 빈궁한 사람에게 돈을 주어 대립하고 있다”235)≪世宗實錄≫권 86, 세종 21년 7월 병인.고 하였다.

수군의 대립이 문제시되자 세종 29년에는 수군에게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漆圓木牌를 차고 다니게 하여 수군의 대립을 저지하려 하였다.236) 李載龒, 앞의 책, 126∼127쪽. 그러나 수군이 입역하면 고된 사역에 끌려 다녔으므로 대립은 그치지 않았고 심지어 방군수포 현상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이같이 대립이 심해짐에 따라 富實한 수군은 일생 동안 대립을 통하여 浦에 赴防한 적이 없어 포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정부에서는 국토 방어의 제일선을 담당한 수군의 대립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불법으로 간주하였다.

16세기 들어 대립은 수군뿐만 아니라 모든 군인층에 걸쳐 진행되었다. 심지어 무반관직을 차지하고 있는 갑사들도 대립을 행하였다. 중종 21년(1526)에는 갑사들이 “上番할 때 다른 사람을 고용하고, 다른 馬로 대신 검열하는 것이 상례”237)≪中宗實錄≫권 57, 중종 21년 7월 임진.라고 하였다. 정병들도 대립을 행하였다.238) 李泰鎭, 앞의 글(1968), 239∼249쪽 참조 심지어 官屬들이 대립을 강요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대립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대립할 경우 “온가족을 변방지역으로 入居시킨다”고 엄포를 놓기도 하고, 신분증명을 위해 용모와 나이가 새겨진 圓牌를 차도록 하기도 하였다.239)≪成宗實錄≫권 197, 성종 17년 11월 기사. 그러나 대립은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군인들의 저항 속에서 차츰 정부에서는 번상보병에 한하여 대립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들은 정예군사인 갑사나 기병과 달리 군장도 없는 역졸이었고, 또 수군과 같이 방어의 제일선을 담당하는 국방 군사력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16세기 대립제의 성행과 번상보병들에 한하여 대립제를 허용하게 된 원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노동력 수탈을 위한 국가권력의 통제로부터 벗어나서 농업 노동력을 확보하고자 했던 군역 농민들은 자신이 직접 입역하는 것보다 대립을 희망하였다. 보병들은 “오늘날 이른바 보병이라고 하는 자들은 병사의 이름은 있지만 실제 병사가 아니다.…왕래할 때 무릇 4, 5개월이 걸리고 番下하여 집에 있는 날이 없다”240)≪中宗實錄≫권 22, 중종 10년 6월 무인.라는 형편이었다. 농민의 피역 저항 속에서 정상적인 보인의 지급도 되지 않는 터에 이러한 군역의 부담은 농민들의 정상적인 영농을 저해하였고 농업생산력을 감퇴시켰다. 정부내에서도 “농민들을 몰아 군인으로 만들어 농사지을 시기를 빼앗는다”241)≪中宗實錄≫권 29, 중종 12년 9월 을미.라고 하거나 “丁壯이 농토(南畝)에 있지 않으면 外寇가 이르기도 전에 나라가 위험하다”242)≪明宗實錄≫권 23, 명종 12년 12월 임오.라고 하는 우려가 분분하였다. 보병의 입번을 강요하는 것은 군역담당자인 농민의 입장에서나, 수취의 안정적인 기반을 확보해야 하는 정부의 입장에서나 모두 상반되는 것이었다.

둘째, 앞에서 언급했듯이 번상보병의 실제 임무는 군사활동이 아니라 가혹한 토목공사의 역이었기 때문에 보병들은 가능한 한 대가를 치르고 가혹한 노동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였다. 당번보병과 수군들은 쉴 새 없이 役事에 동원되었다. 고역에 의한 군인들의 고통과 원망은≪朝鮮王朝實錄≫의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군인항쟁으로까지 나타날 정도였다. 중종 21년에는 月串에서 수군들이 鎭帥를 능욕하고 기치를 높이 세워 군인항쟁을 전개하기까지 하였다.243)≪中宗實錄≫권 57, 중종 21년 4월 신사. 이것은 월곶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방의 도처에서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고역에 대한 지방군인들의 저항 속에서 정부는 번상보병의 대립을 허용하는 추세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에서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이것은 정권의 운명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셋째, 서울에서 원거리에 있는 보병이 번상근무를 하기 위해 왕래하는 데 엄청난 고통이 따랐고, 또 물가고 등에 의해 서울에서 복무하는 것보다 대립을 하는 것이 경비가 절감될 수도 있었다. 번상근무는 전국 각처에서 행해졌다. 極邊지방의 경우 번상에 걸리는 시일만 무려 8∼9일이 되기도 하였다. 보병들이 번상을 하기 위해 高山峻嶺을 넘고 강을 건너 서울로 올라올 때 다치거나 빠져 죽는 사람 역시 부지기수였다. 한편 천신만고 끝에 서울에 올라온 보병들은 보인에게서 보포를 받아와 생활해야 했는데 서울은 ‘穀貴貨賤’이라 하여 면포 1필이 쌀 한 말밖에 안되는 경우도 있어 굶어 죽기까지 하였다.244)≪燕山君日記≫권 46, 연산군 8년 9월 신묘.

이 밖에 입역시 諸司官屬들의 침학 등으로 인해 군인들은 대립을 원하였다. 정부에서는 수군은 대립을 허용하지 않았으나 보병은 대립을 용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6세기 조선사회 역시 보병의 대립제가 성행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조건이 성숙되고 있었다. 지주 전호제의 전개 속에서 토지를 상실하거나 각종 국역의 부담을 피하려는 농민들은 농토를 떠나 유망하고 있었고,245) 金泰永,<朝鮮前期 小農民經營의 추이>(≪朝鮮前期 土地制度史硏究≫, 知識産業社, 1983) 참조. 도시로 집중하고 있었다. 유민, 혹은 피역인들의 도시집중은 이 시기에 있어서 중앙·지방을 통틀어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중종 28년(1533) 7월 경연 후 鄭光弼은 자신의 부모묘지 근처에 있던 마을들이 20년 사이에 모두 없어지고 그 마을 사람들이 서울에 올라와 토목공사가 있을 때 역졸의 대립인으로 생활한다고 말하였다.246)≪中宗實錄≫권 75, 중종 28년 7월 을묘. 농민층의 분해 속에서 농토를 잃고 서울에 올라온 유민·피역인들은 지배층들에 의해 ‘惰農’ 또는 ‘逃賦之人’으로 인식되어졌고, ‘市井之游手者’, ‘京中無役人’ 또는 ‘無賴之徒’로 불려지고 있었다. 이들이 대립에 동원되었다. 이들은 군인들과 사적으로 계약을 맺거나 관속들과 결탁하여 대립을 얻어냈다. 한 사람이 한꺼번에 여러 명의 상번군의 대립을 맡아 수익을 올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16세기에 들어 代立價는 엄청나게 인상되어 갔다. 대립가는 풍흉에 따른 곡가의 변동과 면포의 생산량에 따라 유동하고 있었지만 특히 중종 23년 이후 폭등하고 있었다. 성종·연산군·중종 3대 동안의 대립가 변동은 다음<표 3>과 같다.247) 李泰鎭, 앞의 글(1968), 243쪽 참조.

연 대 一 朔 番 價
성종 24년(1493)
   〃     (公定)
연산군 3년(1497)
중종 13년(1518) (공정)
   23년(1528)
   24년(1529)
   31년(1536)
   36년(1541) (공정)
   39년(1544)
 (5升布) 8.5∼9匹
 (5승포) 3필
 (5승포) 7.5∼8필
 (5승포) 7필
 (常布) 50필
 (상포) 30∼50필
 (상포) 100필
 (5승포) 3.5필 (粗布) 4필
 (상포) 60필

<표 3>대립가 변동

<표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종 31년(1536)에는 보병 한 번의 번가가 100필이나 되는 경우도 있었다.248)≪中宗實錄≫권 81, 중종 31년 정월 정묘. 代役者들은 ‘托以役重’이라 하여 대립가를 계속 올려 받았고, 諸司 관속이나 京主人들과 결탁하여 대립가를 받아냈다. 한편 각 사의 말단 관속들은 보병들의 자립을 방해하면서 강제로 대립가를 납부케 하기도 하였다. 이에 보병들은 ‘月利’을 내서 대립을 하고,249)≪燕山君日記≫권 48, 연산군 9년 정월 갑자. 또 대립인에게 후에 갚겠다고 약속하고는 고향에 내려와 이를 갚느라 家舍와 牛馬田畓을 방매하고 유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250)≪中宗實錄≫권 62, 중종 23년 8월 계축. 보병들은 가진 것을 모두 팔아도 대립가를 갚지 못하기도 하였다.251)≪燕山君日記≫권 36, 연산군 6년 2월 병신. 보병들이 대립가를 갚지 못했을 경우 가까운 친척은 물론이고 一族 전체가 도산하는 것이었다. 한편 번상보병의 대립제 성행과 더불어 경주인들이 각 지방 보병들의 대립가를 일괄로 받아다가 서울에서 사람들을 고용하여 입역시키면서 중간 차익을 챙기는 취리행위까지 성행하였다.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대립가의 폭등 속에서 보병들이 고통을 겪을 뿐만 아니라 이에 따라 국가의 수취기반이 흔들리자 정부로서는 이러한 대립가를 국가체제내로 흡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우선 대립가의 공정조치로 나타났다. 정부에서는 성종 24년(1493), 중종 13년에 각각 한달의 대립가를 5升布 3필과 7필로 공정하였다. 그러나 앞의<표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정부의 대립가 공정에도 불구하고 대립가는 계속 인상되어 갔고, 경주인들이 각 지방에서 대립가를 받아와 대립인을 고용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이에 정부에서는 대립가의 공정에서 한 걸음 나아가 대립가의 징수를 국가에서 관리하는 방식 즉 이른바「軍籍收布法」을 추진하였다.

이것은 전라도관찰사 金正國의 陳弊啓를 계기로 구체화되었다. 중종 33년 9월 김정국은 군역제의 모순 속에서 농민들이 유망하고 일족과 이웃까지 피해를 입어 邑里가 공허해진다고 하면서, 곡성의 경우 보병의 원액이 184호인데 絶戶가 무려 94호에 이른다고 보고하였다. 이러한 상태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元軍額은 감할 수 없으므로 ‘軍多民少’한 지역의 군액을 ‘軍少民多’한 지역에 移額하고, 또 上番價布는 각 관의 수령들이 ‘監納踏印’하여 이를 다시 上番戶首에게 還授하고 上送하여 각처로 분송할 것을 주장하였다.252)≪中宗實錄≫권 88, 중종 33년 9월 경자. 이에 대해 다음달 영의정 尹殷輔와 吏·兵曹 당상들은 각 지방관들이 관할내의 보병번가를 ‘依數收合’하여 믿을 만한 자를 뽑아 병조로 올려보내고 병조는 이를 각처에 분송하게 하자는 보다 구체적인 개선안을 국왕에게 제출하였다.253)≪中宗實錄≫권 88, 중종 33년 10월 계축. 김정국은 답인된 가포를 호수 개인이 가지고 올라가자고 한데 반해 이것은 일괄수합해서 병조로 올려보내자는 것이었다. 그후 중종 36년 2월 同知事 梁淵의 발의로 이렇게 각 지방에서 상송된 대립가는 병조 소속의 司贍寺에서 관장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 해 4월에 보병납포가는 한달에 3필 반으로 공정되었다. 이 공정가는≪大典後續錄≫에 轉載되었다.

이상과 같이 보병의 納布軍化가 진행되었다. 이미 역졸화한 보병으로서는 납포군제의 진행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런데 납포제의 성립으로서 관속이나 대립인의 濫徵이 제거되고 番上直納의 번거로움은 없어졌으나, 보병이나 그 보인의 부담이 가벼워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16세기 양인농민의 피역 저항 속에서 정군 및 보인의 절호가 많아지자 정부에서는 족징·인징으로 수탈을 강화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기의 납포제는 토목사업의 역졸을 고용하기 위한 것으로서 17세기 이후 나타나는 급료병을 위한 납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납포제는 신분제와 병농일치에 입각한 군역제에서 탈피하여 상비군으로서 급료병제가 성립할 수 있는 전제를 마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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