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2. 사림세력의 진출과 사화
  • 3) 무오사화

3) 무오사화

성종대에는 정치문제화되지 않는 수준에서 마무리되거나, 비록 정책에 반영되지는 못했지만 순수한 건의로 용납되었던 사림파의 언론내용이 연산군대에 와서는 그 보호막이 소멸되면서 정치문제로 노출되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유자광·이극돈·윤필상 등이 주도한 戊午士禍396) 姜周鎭,≪李朝黨爭史硏究≫(서울大 出版部, 1971).
洪淳昶,<士禍와 黨爭과의 關係>(≪大丘史學≫7·8, 1973).
申解淳,<官僚間의 對立>(≪한국사≫12, 국사편찬위원회, 1977).
는 사림파 언관의 도전에 대한 훈구파와 政曹系 老成大臣의 대응조치였으며, 훈구파가 사림파 탄압의 빌미를 김일손의 史草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이후 세 차례 더 일어난 사화와 구별하여 ‘史禍’라고도 한다. 무오사화의 발생원인으로는 일반적으로 김종직의<弔義帝文>을 김일손이 사초로 작성한 사실을 들고 있으나, 그 전개과정은 복잡하였다.397) 이하 무오사화의 전말에 관해서는≪燕山君日記≫권 30, 연산군 4년 7월조에 의거하였다.

무오사화는 연산군 4년(1498) 7월에≪成宗實錄≫을 撰修하기 위해 史局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실록청 당상관이었던 이극돈은 일찍이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던 김일손이 史官으로 재직하면서 사초에 자신의 비행을 기록했음을 알고, 그에게 이 사실을 삭제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사초에 기록된 이극돈의 비행은 세조 때에 불경을 외고, 전라도관찰사 재임시에 貞熹王后喪을 당하였음에도 長興 官妓와 더불어 주연을 베풀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를 김일손과의 불화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 근거로 ‘丙午年(1486)’에 자신이 고시관으로 있으면서 좌중의 모든 관리들이 김일손의 試卷을 ‘能作’으로 일등에 두고자 했으나 科場製述의 程式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끝내 이등에 둔 점을 들었다. 또 이조판서로 재임 중 이조·병조낭청이 모두 김일손을 여러 차례 낭청으로 천거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손의 인물됨이 좋지 않다 하여 備望하지 않았던 점, 그의 비행을 기록한 사초를 김일손이 封해서 탄로나게 한 점 등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감정 차원의 문제일 뿐, 근본적으로는 앞서 논급한 것처럼 사림파가 세조대 이래 정치·사회·경제적 제특권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파를 견제하려던 데서 빚어진 것이었다. 이 점은 이후 김종직이 南怡獄事를 일으켰던 유자광을 미워하여 유자광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누각현판에 걸어 두었던 시를 자신이 후에 함양군수로 내려와서 철거해 불태워 버렸으며,398) 李肯翊,≪燃藜室記述≫권 6, 燕山朝故事本末 戊午士禍. 이러한 양자의 평소 감정대립이 무오사화의 전개과정에서 사건이 확대되는 요소로 작용했다는 이해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김일손의 사초로 인해 비행이 드러나게 된 이극돈은 사초의 改作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당상인 尹孝孫과 함께 이 사초를 배당받은 成重淹에게 김일손의 사초는 ‘逐日記事’하지 않아 어느 날짜에도 넣기 어렵다는 것을 이유로 싣지 말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 사실을 실록찬수에 참가하고 있던 사림파 李穆이 알고 성중엄에게 만약 김일손의 사초를 기록하지 않으면 그 사실을 실록에 기록하겠다고 위협하는 한편, 김일손에게 이를 알렸다. 이극돈의 비행을 기록한 김일손의 사초를 둘러싸고 이극돈측과 김일손측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이극돈은 사초를 실록에 싣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리자 김일손의 사초에 실린 또 다른 내용을 문제삼기에 이르렀다. 곧 김일손이 세조대의 宮禁秘事를 사초화했음을 들추어 내어 魚世謙·韓致亨·盧思愼·尹弼商 등 훈구대신들과 논의하여 사초를 국왕이 열람할 수 없다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연산군에게 알리기로 하였다. 여기에는 세조 당시에 어린 나이에 지나지 않았던 김일손이 어떻게 그 당시의 궁중비사를 기록했는지를 밝히려 한다는 구실을 붙였다. 연산군은 사초 전체를 封入하도록 했으나 이극돈 등은 군주는 사초를 볼 수 없으나 宗社에 관계된다면 관련된 부분만 취할 수 있다고 하여 김일손의 사초 6조만을 봉입하였다. 이후 사건이 확대되면서 연산군은 사초 전체를 봉입하도록 했다.

김일손은 붙잡혀 오면서 이미 이극돈의 비행을 기록한 사초 때문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여러 차례 鞫問을 받는 과정에서 주로 세조의 집권을 부정하여 세조 및 집권공신들의 비행을 기록한 점과 이들에 의해 핍박을 받은 반대측 인물들을 推獎한 내용과 관련하여 집중적으로 추궁을 받았다. 궁중의 비사로는 세조가 덕종의 후궁인 權貴人을 불렀으나 권씨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실, 덕종의 昭訓尹氏事, 승려 學祖가 內旨로서 해인사 주지를 자신의 眷屬으로 바꾼 사실, 永膺大君夫人 宋氏가 窘長寺의 法會에 갔다가 侍婢가 잠든 후에 學祖와 사사로이 통한 사실, 학조가 廣平大君·영응대군의 田民을 많이 획득한 사실 등이 문제가 되었다. 세조의 집권을 부정하고 반대자를 추장한 내용으로는 昭陵追復事, 後殿曲을 기록한 점, 皇甫仁과 金宗瑞의 죽음을 死節로 기록한 점, 昭陵梓宮을 海濱에 내버려두었다는 것을 기록한 점, 趙文琡·李塏·崔叔孫이 서로 대화한 내용, 朴彭年事, 金淡이 河緯地 집에 가서 위험한 나라에서는 살 수 없다고 한 점, 李尹仁이 박팽년과 나눈 대화, 세조가 박팽년의 재주를 아껴 살리고자 신숙주를 보내어 권유했으나 따르지 않고 죽음에 나아간 사실, 坦禪이 癸酉靖難 때 光陽에 付處되었다가 絞死당한 鄭苯의 시신을 호송했음을 기록한 사실, 남효온과 진사 權綽의 죽음을 卒로 기록한 점, 魯山君(단종)의 후궁인 淑儀 권씨의 노비와 田山을 權擥이 취한 점 등이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추궁에 대해 김일손은 황보인·김종서·정분 등은 두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帝王이 마땅히 추장해야 하므로 정분을 鄭夢周에 비유하고, 황보인과 김종서를 死節로 기록했으며, 세조대는 이미 과거의 일이므로 許磐·崔孟漢 등에게서 들은 바를 거리낌없이 기록했다고 하여 세조의 집권을 부당하게 여기는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김일손의 국문에 적극적이던 유자광은 사초에 실린 또 다른 내용인<弔義帝文>을 발견하고 사건을 더욱 확대하였다. 김일손은 사초에서 노산군의 시신이 숲속에 버려져 거두는 자가 없어서 까마귀 밥이 되었는데, 한 동자가 밤에 시신을 업고 달아나서 水火에 던져버렸는지 모르겠다고 기록하였으며, 이어서 김종직이 지은<조의제문>은 忠憤이 깃들어 있다고 논평한 바 있었다.<조의제문>은 외견상 秦末 項羽가 초나라의 義帝를 죽인 사실을 두고 의제를 조문하여 지은 제문이나, 실은 의제를 단종에, 항우를 세조에 빗대어 그의 집권을 반인륜적인 것으로 은유한 것이었다. 훈구대신들은 이전의 供草과정에서 드러난 세조대의 비행 기록만으로도 사림파가 세조의 집권을 부정하고 있음을 짐작하였지만,<조의제문>은 이를 뒷받침하는 결정적 근거로 받아들였다.<조의제문>은 김종직의 제자들 사이에 이미 상당한 논의가 있어서 의제가 단종을 은유한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고, 김일손 이외에 사관으로 있던 權五福과 權景裕도 사초에다 이를 기록하였다.

<조의제문>을 둘러싼 논란과정에서 연루자의 범위는 김종직의 문인 전체로 확대되었고, 훈구파는 김종직의 문집 속에 있는 또 다른 방증기록을 찾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문집에서 陶淵明의 述酒에 화답한 시의 서문을 찾아내어 문제로 삼았다. 그 서문은 湯이 아니었다면 劉裕의 簒弑罪와 도연명의 忠憤의 志가 숨겨질 뻔했다고 하면서, 春秋筆法에 비유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윤필상 등은 이는<조의제문>보다 더 심한 것으로 유유를 세조에 비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훈구파와 평소 갈등이 있었던 李穆·任熙載·李黿·表沿沫·洪瀚·朱溪副正 深源 등 사림파 인물들을 차례로 국문하였다. 임희재와 이목은 이극돈의 아들 世銓을 길에서 모욕한 바 있었으며, 이원은 김종직의 諡狀에서 그를 칭송하였고, 표연말은 김종직의 행장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사초에 소릉을 훼철함은 문종에게 어긋난 도리라고 기록했고, 홍한은 사초에 정창손이 스스로 신하로서 섬겼던 노산군을 ‘首唱請誅’했다는 사실을 기록했으며, 이심원은 성종대에 세조의 舊臣을 등용하지 말 것을 주장한 사실이 있는 등 모두 훈구파의 공격에 앞장 선 인물들이었다.

이와 같은 추국과정을 통해 이미 죽은 김종직은 剖棺斬屍되었고, 그의 문인들 대부분이 화를 당하게 되었다. 윤필상 등은 그들의 죄명과 형량을 다음과 같이 議啓하였다.

金馹孫·權五福·權景裕 : 大逆 凌遲處死
李穆·許磐·姜謙 : 亂言切害 斬·籍沒
表沿沫·鄭汝昌·洪瀚·茂豊副正 摠 : 亂言
姜景敍·李守恭·鄭希良·鄭承祖 : 知亂言不告
決杖 100, 流 3,000里,
烽燧軍庭爐于定役
李宗準·崔溥·李黿·康伯珍·李冑·金宏弼·
朴漢柱·任熙載·李繼孟·姜渾 : 朋黨
決杖 80, 遠方付處

이와 같은 의계에 대해 유배부처인을 15일 거리 밖으로 쫓아버리라는 연산군의 명이 내려지자, 윤필상 등은 다시 다음과 같이 각자의 유배지를 의계하여 윤허받았다.

강겸-江界, 정희량-義州, 박한주-碧潼, 표연말-慶源, 홍한-慶興,

최부-端川, 정여창-鍾城, 임희재-鍾城, 이주-珍島, 강경서-會寧,

무풍부정 총-穩城, 김굉필-熙川, 이수공-昌城, 이종준-富寧, 이원-宣川

이 가운데 강겸은 원래 허반으로부터 세조대의 궁중비사를 듣고 김일손에게 옮긴 죄목으로 처참케 되어 있었으나 감형을 받았다.

실록청당상인 이극돈·柳洵 및 6방당상도 파직되었으나, 무오사화를 주도한 훈구대신들은 사건처리 후에 정치적 실권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보상도 받았다. 윤필상·노사신·한치형 등은 추관당상으로 伴倘 10인과 奴·婢 각 13口, 丘史 7인, 田 100결, 表裡 1단, 內廐馬 1필, 罪人家舍 1坐, 부모 작위 등을 하사받았고, 유자광은 반당 8인, 노·비 각 10구, 구사 5인, 전 80결, 표리 1단, 내구마 1필, 加 1급, 죄인가사 1좌, 부모 작위 등을 하사받았다.

성장일로에 있던 사림파가 이처럼 쉽사리 무너져버린 것은 훈구파와의 갈등과정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개 언관계통 또는 한직에 묶여 버렸고, 그들 가운데 간혹 정조 계통에 진출한 예가 있었다 하여도 하위직이었으며, 정책결정과 그 실행을 주도하는 정조의 상위직은 훈구파가 독점하였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의 사림파가 수행한 역사적 기능과 역할의 한계를 잘 대변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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