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2. 사림세력의 진출과 사화
  • 5) 기묘사화

5) 기묘사화

연산군은 무오·갑자사화를 통해 자신의 실정을 견제하던 사림파와 부중파의 관료들을 제거한 후, 한층 강도높은 秕政을 펴게 되었다.403) 연산군은 자신의 실정에 대한 문신들의 直諫을 기피하여 經筵을 혁파하였고, 성균관을 宴樂의 장소로 만들었으며, 심지어 行獵을 위하여 한성부 주변 30리 이내의 민가를 철거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각 도·각 읍에서 미녀와 관기들을 뽑아 오게 하여 이를 運平·興淸이라 불렀는데, 그 수가 1,000명에 달하였다. 또한 궁녀의 수도 막대하였을 뿐 아니라, 그 칭호도 130여 종류에 달하였다. 이 밖에도 鷹·犬을 뽑는 採鷹犬使를 8도에 나누어 파견하고, 準坊·瑞蔥臺를 두어 진기한 동물들을 기르기도 하였다(申解淳, 앞의 글, 177∼178쪽). 이러한 상황이었으므로 연산군의 실정과 비행을 直言極諫하는 조신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폭정은 백성들에게도 미쳐 그들의 원성 또한 극도로 높아졌다.

그리하여 훈구대신들은 왕의 폐립을 도모하게 되었다. 연산군 12년(1506) 朴元宗·成希顔·柳順汀 등은 왕을 폐출하고 晉城大君을 옹립하였다. 이것이 곧「中宗反正」이다. 중종반정은 117명에 달하는 靖國功臣을 배출하였는데, 특히 그 주도자인 박원종·성희안·유순정 등 소위 3공신의 위치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중종 초기의 정치는 필연적으로 이들을 중심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404) 이하 중종초의 권력구조에 대한 서술은 李秉烋, 앞의 책, 52∼79쪽 참조.

먼저 의정부는 박원종·유순정·성희안·柳洵·金壽童·宋軼 등의 공신이 중종 8년(1513)까지 이끌어갔다. 비록 2·3등 공신으로 책록된 유순·김수동·송질 등이 의정부 구성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반정계획 당초부터 가담했던 것이 아니라 정치적 상황의 변동에 편승한 데 불과했으므로 실제로는 3공신 중심체제가 되기 마련이었다. 다만 이러한 체제도 중종 5년 4월에 박원종이 죽고, 이어 동왕 7년 12월에 유순정까지 죽자 서서히 약화되어 가는 추세를 보였다. 그러다가 동왕 11년부터는 송질·유순마저 의정에서 물러나면서 공신주도체제는 해체되고 비공신 훈구계열이 의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六曹에 있어서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즉 공신세력은 중종 2년까지는 그 구성면에서 우세하였으나 3년 이후부터는 숫적 열세를 보이게 되었다. 공신세력은 이러한 숫적 열세를 인사권과 병권을 장악함으로써 극복하려 하였다. 당시의 인사권은 吏曹보다는 공신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특히 병권은 兼兵曹判書制를 이용하여 공신이 계속 장악하고 있었다. 요컨대 6조도 공신주도체제를 유지하였던 셈이다. 그러나 중종 6년을 전기로 하여 겸병조판서제가 폐지되고 專任 병조판서가 임명되면서 6조에서의 공신의 영향력은 다소 쇠퇴해 갔고 서서히 비공신계 훈구세력의 우세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政曹에서의 공신우위체제와는 달리 三司 등의 언관계통은 주로 비공신계 훈구파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반정이 원래 소수인의 擧事로 성취되었으며, 논공행상과정에서 반정에 실제 참여하지 않은 인물을 친·인척 또는 朋舊·賄賂를 인연하여 공신을 濫授하였으므로 언관에 임명할 인적 자원이 적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중종 초기의 정계구성을 보면 공신세력은 언관을 장악하지 못한 약점은 지니고 있었으나, 대체로 정조를 중심으로 그들 주도의 지배체제로 운영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중종 초기의 공신중심의 지배체제하에서 사림파의 동향은 크게 주목할 만한 것이 없었다. 무오·갑자사화 이후 사림파의 피해의식이 아직 해소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며, 정권을 장악한 정국공신들도 새 시대 건설의 정치적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림파가 중앙정계에 등장할 분위기가 마련되지 못하였던 데에 기인하였다. 다만 소수의 사림파만이 개인적인 능력에 의해 정계에 진출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중종 9년 이후 특히 조광조의 정계진출 이후 사림파 세력은 중앙정계에서 급성장을 보였는데, 그 요인으로는 대체로 세 가지를 들 수 있다.405) 이하 세 가지 요인에 대한 서술은 李秉烋,<朝鮮前期 中央權力과 鄕村勢力의 對應>(≪國史館論叢≫12, 國史編纂委員會, 1990), 144∼145쪽 참조.

첫째는 사림파 스스로의 노력이었다. 김굉필·정여창 등이 謫居生活을 하는 과정에서도 지속했던 교육활동은 사림파 세력성장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또한 중종대의 사림파는 주로 3사와 같은 언관직에 진출하여 훈구대신을 비판함과 동시에 자파를 인사행정의 실무자인 銓郞職에 포함시켜 세력 확대를 꾀하였다.406) 金宇基, 앞의 글. 그리고 그들은 과거·문음으로 등용할 수 없는 遺逸·學生을 선발하여 인재등용의 폭을 확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薦擧制의 활용을 주장하였다.407) 李秉烋,<賢良科 硏究>(≪啓明史學≫1, 1967).
崔異敦,<16세기 士林派의 薦擧制 강화운동>(≪韓國學報≫54, 1989).
鄭求先,≪朝鮮時代의 薦擧制硏究≫(東國大 博士學位論文, 1992).
賢良科로 대표되는 이러한 천거제의 주목적이 사림파의 등용이었던 것으로 보아 세력확대를 위한 사림파 자신의 노력이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둘째는 일부 대신의 引進이었다. 성분상으로는 훈구파에 속하면서도 사림파를 이해하거나 사림파와 뜻을 같이 하는 온건보수파 대신인 鄭光弼·安瑭의 노력에 의하여 사림파 인재의 등용이 이루어졌다. 특히 안당은 이조판서 재직시인 중종 10년(1515) 조광조·金湜·朴薰을 천거하여 擢用의 길을 터줌으로써 사림파 진출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그 결과 그는 사림파의 성장 이후 그들에 의해 우의정으로 陞秩되는 기회를 제공받는 등 반대급부를 받게 됨과 아울러 훈구파·사림파간의 가교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셋째는 국왕의 입장이었다. 중종이 정국공신에 의해 추대되어 즉위초에는 반정 주도세력에게 영향을 받는 입장이었다 하더라도 점차 자기 위치를 확보하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왕권행사에 제약을 가하던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응할 새로운 세력형성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러한 의지는 곧 중종 10년부터의 사림파의 본격적인 등장에 투영되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 힘입어 중앙 정계에 재진출하게 된 중종대의 사림파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정국공신 중심의 집권체제에서 야기되었던 각종 정치적·사회적 모순을 시정하고 堯舜三代의 유교적 이상주의, 즉 至治를 실현하기 위하여 과감한 개혁을 주장하였다. 당시 사림파의 개혁론이나 개혁정치는 대체로 두 측면에서 추진되었다. 그 한 갈래는 단절된 명분을 이어줌과 아울러 낡은 제도와 인습을 혁파함으로써 새 통치질서가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는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다른 한 갈래는 새 통치질서 수립을 위한 사회·문화적 분위기와 여건을 조성하는 방향에서 추진되었다. 이같은 개혁의 추진과정에서는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상반된 훈구파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혁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개혁의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만큼 저항도 크기 마련이었다. 심지어 사림파에 온정적이었던 정광필과 같은 온건보수세력의 대응도 집요하였으며, 金正國과 같은 동료 개혁론자도 비판적 시각을 가질 정도였다.

특히 ‘僞勳削除’의 경우는 중종대 사림파의 과감성을 확연히 보여 준 사례였다. 조광조 등장 이후 사림파의 언론활동 및 개혁으로 자기 기반을 상실해 가던 훈구파에게 위훈삭제사건은 집권기반을 송두리째 빼앗으려는 의도로 인식되었다. 한편 중종도 당초에는 훈구세력의 지나친 천단을 막고, 정국의 안정을 위해 사림을 중용하고 그 정책에 호응해 왔으나,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에 따른 정국의 불안정과 왕권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는 그들의 과격함에 불안과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양자의 의지가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 己卯士禍였다.

기묘사화는 위훈삭제가 결정된 4일 이후 갑작스럽게 일어났지만, 이미 이전부터 불안감을 지녀 오던 훈구대신과 국왕의 감정이 위훈삭제사건을 계기로 표면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중종의 밀명에 의해 洪景舟·南袞·沈貞 등이 중종 14년 11월 15일에 조광조 등 사림파를 체포·하옥함으로써 사화가 시작되었다. 훈구대신들은 사림파에게 “서로 붕당을 맺어 자기를 따르는 자는 이끌어 주고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자는 배척한다”408)≪中宗實錄≫권 37, 중종 14년 11월 을사.는 명분을 내세우고, 이의 처벌규정을≪大明律≫名例律 姦黨條에서 끌어와서 조광조·金淨 등에 대해서는 賜死를, 그 외의 인물에게는 그에 버금가는 重刑을 부과할 것을 주장하였다. 처음에는 정광필·이장곤 등 일부 온건파 대신의 만류로 사사 대신 圍籬安置로 결정되었으나, 심정·남곤 등의 계속적인 加罪 요청으로 결국 조광조는 사사되었고, 金絿·김정·김식은 絶島安置, 尹自任·奇遵·朴世憙 등은 極邊安置, 정광필·이장곤·金安國 등은 파직되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조광조 등장 이후 정계에 진출하여 사림파의 引進에 의해 성장한 신진사류로서 대체로 조광조와 정치적 이해관계를 같이 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이 기묘사화를 통해 대거 제거됨으로써 사림파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물론 소수의 사림파는 정계에 잔존해 있었지만, 그 일부는 다시 辛巳誣獄으로 제거됨에 따라 이후의 정국운영은 당분간 훈구파 주도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기묘사화 직후 집권훈구파는 사림파의 개혁성과를 하나씩 제거해 가는 방향으로 정국을 이끌어 갔다. 즉 삭훈된 靖國功臣의 작위를 회복해 주는 한편, 현량과의 罷榜, 향약의 폐지 등 개혁정치를 청산하는 데 힘을 기울임으로써 모든 통치질서를 개혁 이전의 상태로 환원시키고 말았다. 이에 따라 道學政治의 실현은 좌절되었으며, 이후 사림파는 주로 향촌에 은거하여 그 곳의 세력기반을 다지는 잠재적 활동을 지속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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