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1. 도학정치의 추구
  • 4) 소격서 혁파

4) 소격서 혁파

昭格署는 道敎的 祀典을 집행하는 기관으로, 고려시대에는 도교적 사전을 수행하는 많은 醮所 중의 하나로 昭格殿으로 불려졌다.471) 昭格署에 관한 연구로는 다음이 참조된다.
李秉烋, 앞의 책, 132∼136쪽.
―――,<昭格署 革罷論議와 士林派>(≪嶠南史學≫1, 嶺南大, 1985).
李鍾殷,<昭格署硏究>(≪比較文化硏究≫7, 漢陽大, 1988).
金海榮,<中宗朝의 昭格署 革罷論議에 대한 一考察>(≪慶尙史學≫6, 1990).
조선 개국 후에도 그 명칭이 유지되어 오다가 세조 12년(1466)에 소격서로 개칭되었으며,472)≪世祖實錄≫권 38, 세조 12년 정월 무오.≪경국대전≫에 법제적 기관으로 자리잡음으로써 그 기능을 유지해 오고 있었다.473)≪經國大典≫권 1, 吏典 京官職. 그런데 사림파를 주축으로 한 일부 신료들에 의해 불교식 행사인 忌晨齋의 혁파논의가 빈발하였던 성종대에 이르러서도 소격서의 초제에 대한 비판론은 제기되지 않았다. 연산군대에 이르러서야 일각에서 ‘道敎는 左道’라는 의식이 나타나게 되었으나, 근본적인 혁파논의는 제기되지 못하였다.474)≪成宗實錄≫권 162, 성종 15년 정월 을사에 기록된 權健·李德崇 등이 성종의 御意에 영합하여 소격서의 혁파를 建白하지 못한 것을 비판한 史臣의 논평과≪燕山君日記≫권 51, 연산군 9년 11월 갑자의 掌令 姜澂의 상소에서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소격서 혁파문제는 그에 대한 적극적인 논의나 큰 논란을 거친 일이 없이 중종대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유교적 지배체제를 지향하는 조선조에 있어서 도교적 사전기관인 소격서는 비판의 대상이 될 소지를 근본적으로 안고 있었다. 다만 그 연원이 오래되고, 星辰에 致祭하는 일 자체가 중대한 것이므로 구습에 따른다는 외형적인 명분을 가지고 유지되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비유교적·비합리적 신앙체계로서의 자연신앙이 오랜 전통을 가지고 민간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기 때문에475) 韓㳓劤,<朝鮮王朝初期에 있어서의 儒敎理念의 實踐과 信仰·宗敎-祀祭問題를 中心으로->(≪韓國史論≫3, 서울大, 1976). 왕조의 입장에서도 그것을 재편하는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民의 지지기반 없이 왕조가 존립할 수 없다는 인식과 더불어 ‘山川’에 대한 치제를 통해 그것에 의해 수호되고 상징되는 지방세력을 宣撫하고 그들을 왕권 지배하에 흡수하려는 의도가 내포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조선왕조의 국왕과 집권 사대부들은 비유교적 사전의 부분적 허용이라는 일정한 양보를 통해 안정적 지배체제를 구축하려 했던 것이다.476) 李秉烋, 앞의 글(1985), 132∼133쪽. 다시 말하면 조선왕조는 건국 후 일체의 이단을 배격하는 각도에서 사전체제의 정비를 시도하였으나,477) 金泰永,<朝鮮初期 祀典의 成立에 대하여-國家意識의 變遷을 중심으로-)(≪歷史學報≫58, 1973), 124∼125쪽. 조선초의 사회가 성리학적 사전체제를 전면적으로 수용할 만큼 변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대민통제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구래의 인습이나 제도를 용인해 줄 수밖에 없었고 이런 사정으로 소격서는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선초 성리학적 사전체제의 정비는 불철저할 수밖에 없었고, 기신재나 소격서의 존재는 그러한 사실을 표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소격서는 그 혁파문제가 성종·연산군대의 사림파에게서 조차 제기되지 않을 정도로 기반이 견고하였다. 혁파에 대한 논의가 처음 제기된 것은 중종 5년(1510)이지만 논의가 가장 빈번했던 것은 6년이었다. 이 시기에는 朴元宗·柳順汀·成希顔 등을 주축으로 한 소수의 중종반정 공신세력이 새 국왕을 옹립한 공로로 議政府의 議政職을 독점하고 인사권·병권을 장악하여 공신 주도의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6조에는 후일 의정부를 담당할 많은 비공신계 훈구파가 진출해 있었고, 더구나 언관은 그들에 의해 거의 완벽하게 장악되고 있었다.

공신세력은 반정 이후 정치적 분위기 쇄신이나 새로운 통치질서 수립과 같은 시대적 과제를 외면한 채, 집단의 취약점과 모순의 호도를 위한 고식적인 통치행위를 자행하였다. 반면 비공신세력은 전제왕권의 횡포로 인한 피해를 체험한 바 있었으므로 왕권과 신권의 균형이 유지되고 政曹와 언관의 상보적 관계가 보장되는 전통적인 통치질서 회복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시대를 전망하는 수준에까지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통시대적인 인사관계나 일반시정 등에 관해 적극적인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478) 李秉烋, 앞의 책, 52∼79쪽.

소격서 혁파문제도 처음에는 동일한 인식선상에서 그 논의가 시작되었다. 중종 6년 6월에 사간원은 국왕에게 ‘致理之本’을 깊이 궁구하여 소격서를 ‘祖宗之舊’로만 여기지 말고 혁파하도록 상소하였으며,479)≪中宗實錄≫권 14, 중종 6년 6월 정유. 뒤이어 사헌부에서도 이단을 배격하면서 도교만을 폐하지 않음은 정치적 하자라고 상소하였다.480)≪中宗實錄≫권 14, 중종 6년 6월 기해. 이러한 언론활동이 행해졌던 것은 이전 시기에 비해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된 결과라고 생각되지만, 비공신계 훈구파 중심의 정조나 언관 구성에서도 짐작되듯이, 이 시기에는 본격적인 혁파 논의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였고, 정책설정 방향의 모순을 지적하는 수준의 문제제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 따라 비록 국왕이나 정조 내에서도 도교를 좌도로 인식은 하고 있었지만, 연원이 오랜 조종의 舊章인 데다가≪경국대전≫에 법제화되어 있는 기관이라는 이유를 들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481)≪中宗實錄≫권 13, 중종 6년 5월 기미. 이후 좌도라는 인식은 소격서 및 그와 관련된 도교사전 배격의 가장 근본적인 논거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소격서 혁파의 또 다른 하나의 근거는 諸侯가 祭天하는 것은 ‘僭禮’라는 데 있었다.482)≪中宗實錄≫권 13, 중종 6년 5월 병인. 제천의식이 참례라는 인식의 정당성 여부는 논외로 하더라도, 당시로서는 참례 주장이 상당한 정신적 압력 효과를 지닐 수 있었으므로 이 또한 향후 혁파의 근거로 꾸준히 활용되었다.

다른 여러 가지 개혁논의와 마찬가지로 소격서의 혁파문제도 趙光祖 등이 중앙정계에 진출한 후인 중종 11년(1516)부터 13년까지 끊임없이 논의되었다. 중종 11년 3월 申光漢이 참례는 명분이 옳지 않다고 상계한 것483)≪中宗實錄≫권 24, 중종 11년 3월 정축.을 비롯하여 柳灌은 “(성종·연산군·중종) 3대의 과제였던 忌晨齋 및 內需司 長利가 혁파됨으로써 사기가 크게 올랐으니 소격서도 함께 혁파하십시오”484)≪中宗實錄≫권 25, 중종 11년 6월 임자.라고 아뢰었다. 같은 해 6월 조광조는 “근자에 이미 기신재와 내수사 장리가 혁파되었기 때문에 소격서만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485)≪中宗實錄≫권 25, 중종 11년 6월 계축.라고 상계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申用漑도 소격서는 제천의식이 아니라, 성신과 老子에 치제하는 것임과 그를 위해 물자의 낭비가 많음을 들어 혁파를 계청하였다.486)≪中宗實錄≫권 26, 중종 11년 10월 기사.

중종 13년(1518)에 가서 사림파에 의해 언관이 장악되면서 이 논의는 더욱 격렬히 전개되었다. 8월 5일 홍문관은 일곱 차례나 상계하였으며,487)≪中宗實錄≫권 34, 중종 13년 8월 임신. 같은 달 26일에는 대간이 사직하였고, 홍문관이 5계, 승정원이 3계, 대신이 재계하여 혁파를 청하였다.488)≪中宗實錄≫권 34, 중종 13년 8월 계사. 이튿날에는 성균관 생원 權磌 등이 상소하였으나489)≪中宗實錄≫권 34, 중종 13년 8월 갑오. 모두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이 문제는 결국 副提學 조광조를 비롯한 홍문관 관원들의 극한적인 언론투쟁 후에야 비로소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490)≪中宗實錄≫권 34, 중종 13년 9월 경자. 그리하여 마침내 소격서는 혁파되고 그 곳에 비치되어 있던 銀器·鍮器·沙器 등은 성균관·4학·讀書堂에 분급되었다.491)≪中宗實錄≫권 34, 중종 13년 9월 정사.

이처럼 소격서 혁파는 조광조를 비롯한 홍문관 관원들에 의해 지속적이고 철저하게 추진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며, 그 과정에서 보수세력과 궁중세력의 완강한 저항이 있었다. 조선초 사대부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용인되어 오던 사전이 중종대에 와서 문제로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성리학 및 윤리질서의 이해 수준이 향상되었다는 시대적 추이에 그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교적 사전체제에서≪주자가례≫에 의거한 성리학적 사전체제로의 대체492) 金泰永, 앞의 글 참조.는 사림파의 정치적 의도와도 관련이 있다. 즉 그들이 추구하는 ‘至治’는 인습과 구제의 청산을 통하여, 그리고 그와 연결되어 있는 훈구세력에 대한 견제를 통해서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소격서 혁파란 결국 훈구세력이 사전체제의 정비과정에서 무속·불교·도교적 사전을 부분적으로 용인·양보하면서 확보한 지배기반에 대한 침식 내지 파괴작업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다. 기묘사화로 사림파가 중앙정계에서 축출되고 훈구파가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면서 소격서가 복설되었던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증한다고 하겠다.

소격서 복립에 대한 논의가 불명확한 상태로나마 시작된 것은 중종 15년 정월이었다. 국왕은 좌의정 南袞과 국사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소격서가 비록 左道에 가까우나, 祈雨·祈晴 등을 폐한 것은 편치 않다는 뜻을 밝히면서 그 行祭만이라도 소격서에서 하면 좋겠다는 뜻을 하교하였다.493)≪中宗實錄≫권 38, 중종 15년 정월 병오. 이에 대해 소격서 혁파에 반대했던 남곤은 이번에는 거꾸로 복립에 반대하였고494) 위와 같음.
李秉烋, 앞의 글(1985), 173∼175쪽.
鄭光弼도 같은 의견을 진언하였다.495)≪中宗實錄≫권 38, 중종 15년 정월 경술.

소극적이고 불확실하던 중종의 복립의도는 그 2년 후 大妃인 貞顯王后의 병환을 계기로 좀더 적극성을 띠게 되었다. 중종 17년 12월에 국왕은 대신들에게 조정의 공론과는 상관없이 일부 신진사류의 주장에 의해 조종의 구제인 소격서가 갑작스레 혁파된 것은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지적과 함께 ‘三光之制’ 만이라도 시행할 것을 간곡히 당부하는 대비의 뜻을 전하였다.496)≪中宗實錄≫권 46, 중종 17년 12월 병술. 이에 대한 대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종은 도교가 좌도이기는 하나, 불교처럼 인심을 惑亂케 하는 것은 아니라는 도교·불교의 차별성을 거론하며 소격서를 복립케 하였다. 그리고 三界醮·靈寶醮·太一醮 등은 모두 그전처럼 실시하되, 비용만은 줄인다는 조처를 내렸다.497)≪中宗實錄≫권 46, 중종 17년 12월 정해.

소격서가 복립된 뒤에도 반대논의는 종식되지 않았다. 부제학 徐厚의 수차에 걸친 완강한 반대가 있었고,498)≪中宗實錄≫권 46, 중종 18년 정월 을축. 대간도 道理論을 전개하며 반대하였으며, 끝내는 呈辭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499) 위와 같음. 그리고 성균관 생원 魚泳河는 소격서 복립에 대해 극론을 펴 반대입장을 표명하였다.500)≪中宗實錄≫권 47, 중종 18년 2월 신사. 그러나 이러한 반론에도 불구하고 소격서 혁파를 반대하는 중종의 의지는 확고한 것이었다. 그래서 소격서의 영구적인 혁파는 사림파가 집권하여 그들에 의해 성리학의 학문적 수준이 크게 향상되고, 성리학적 전례가 급속히 정착되어 가던 임진왜란 이후에 가서야 실현될 수 있었다.501)≪仁祖實錄≫권 23, 인조 8년 8월 기유. 그에 따라 종전의 불교·도교를 포함한 다양한 사전체제는 성리학적 사전체제로 일원화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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