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1. 도학정치의 추구
  • 5) 훈구파 탄핵

5) 훈구파 탄핵

사림의 중앙정계 진출은 기존의 집권 훈구세력과의 갈등과 대립을 초래하였다. 그래서 조선 전기의 정치사는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이 갈등과정을 거쳐 전자를 대신하여 후자가 정국의 주도세력으로 정착하여 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502) 조선 전기 지배세력에 관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李樹健,≪嶺南士林派의 形成≫(嶺南大 出版部, 1979).
鄭杜熙,≪朝鮮初期 政治支配勢力硏究≫(一潮閣, 1983).
李秉烋, 앞의 책.
李泰鎭,≪韓國社會史硏究≫(지식산업사, 1986).
양자의 갈등과정에서 사림세력은 훈구세력을 탄핵하게 되었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士禍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양 세력의 대립과 갈등에서 대부분의 경우 사림세력의 중앙정계로부터 도태로 귀결되었지만, 몇 차례의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선조대에 이르면 사림세력이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503) 李秉烋,<朝鮮前期 中央權力과 鄕村勢力의 對應>(≪國史館論叢≫12, 國史編纂委員會, 1990).
―――,<朝鮮前期 支配勢力의 葛藤과 士林政治의 成立>(≪民族文化論叢≫11, 嶺南大, 1990).

사림파의 훈구파에 대한 본격적인 탄핵은 그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즉 성종의 문치가 궤도에 오르고 金宗直이 京職에 복귀함에 따라 그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한 인물들이 대거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다. 이러한 진출을 바탕으로 그들의 훈구파에 대한 비판의 강도도 상대적으로 더하게 되었다. 그들은 거의 언관에 포진하여 훈구파에 의해 배태된 사회모순을 시정하고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활발한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의 언론활동은 거의 훈구파와 그 지배체제를 직·간접적으로 비판·탄핵하는 성격을 지녔다. 여기서는 훈구파 인물에 대한 직접적인 탄핵에 한정하여 그 활동상을 살펴보려고 한다.504) 李秉烋, 앞의 책.

사림이 아직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성립되기 이전인 훈구파 일변도의 지배체제하에서도 그들의 언론을 통한 훈구파 견제작용은 행사되고 있었다. 성종 9년(1478) 宗室 朱溪副正 深源은 성종을 親對한 자리에서 훈구파만의 임용이 부당함을 개진하고,505)≪成宗實錄≫권 91, 성종 9년 4월 경자. 鄭汝昌(咸陽)·丁克仁(泰仁)·姜應貞(恩津)·孝子 慶延 등 在地사림을 천거하는 상서를 올렸다.506)≪成宗實錄≫권 91, 성종 9년 4월 기해. 이는 즉각 반대파인 훈구세력의 반박을 받게 되었고,507) 위와 같음. 성종도 이 건의를 현실성 없는 ‘儒者之論’으로 가볍게 받아 넘기고 말았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사림의 능력이나 성종 자신의 의지로도 훈구파 중심의 지배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편한다는 것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림파의 훈구파에 대한 최초의 직접적 탄핵은 柳子光과 任元濬·任士洪 부자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는 홍문관·예문관이 상서하여 도승지 임사홍의 奸狀을 탄핵하며 시작되었다.508)≪成宗實錄≫권 91, 성종 9년 4월 무자. 이에 대해 성종은 탄핵에 참여한 兩館 관원 20여 인을 그날로 하옥하고 임사홍의 告身을 환수하는 한편 임원준은 불문에 붙이는 등의 중간조처를 취하였다.509) 위와 같음. 이 단계에서 주계부정 심원은 社稷과 관련된 일이라고 親啓를 요청하여 “사홍과 원준은 소인”이라고 상계하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임사홍이 승지 재직시 도승지 玄碩圭가 동료 洪貴達을 罵辱한 사실을 보고 朴孝元 등 대간을 은밀히 부추겨 현석규를 탄핵하려 획책한 사실을 지적하였다. 이리하여 전직 승지·6조 참판 이상과 대간이 仁政殿 東庭에 모이게 되었고, 홍문관·예문관 관원, 임원준·임사홍·박효원·이심원 등을 소집하여 대질시키게 되었다. 그 결과 임사홍의 죄상이 밝혀졌고, 그 자신과 관련 인물인 유자광 등 두 사람은 ‘紊亂朝政’의 죄명으로 유배되었으며, 그의 술책에 말려든 金孟性과 임사홍을 탄핵한 表沿沫도 각기 高靈과 山陰에 유배되었다.510) 李秉烋, 앞의 책, 43∼44쪽. 결국 탄핵한 소장 사림계의 언관들도 같이 처벌되기는 하였으나, 막강한 훈구세력에 대한 사림의 언론을 통한 모험적 도전 내지 견제활동이 시작되었다는 뜻에서 이 사건은 큰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이후에도 사림 단독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표적인 훈구세력인 韓明澮·鄭昌孫 등에 대한 언관의 탄핵은 지속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유생 南孝溫에 의해 昭陵復位 논의가 발표되었다. 그는 성종 9년(1478) 4월 시무 8조를 상소하여 ‘追復昭陵’할 것을 주장하였다.511)≪成宗實錄≫권 91, 성종 9년 4월 병오. 이에 대하여 도승지 임사홍은 ‘추복소릉’은 臣子로서는 발설할 수 없는 금기사항이며 남효온 등 사림은 치세에 누를 끼칠 존재로 그 성장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512) 위와 같음. 徐居正도 유생의 정치 간여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충격적인 언론행위를 통해 정계에의 진출을 도모하려는 ‘浮薄之士’의 짓이라고 매도하였다.513)≪成宗實錄≫권 91, 성종 9년 4월 신해. 이처럼 소릉복위 주장에 대해 훈구파가 강력히 반박하였던 것은 이 문제가 세조 즉위 자체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존재명분을 간접적으로 부정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후 소릉복위 논의는 사림파가 자못 많이 진출하는 성종말·연산군초에 가서 재론되었거니와, 훈구파의 지배적 지위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들의 언론활동이 지닌 과감성·급진성이 상대적으로 드러난 셈이다. 훈구파에 대한 이들의 탄핵활동은 후대로 갈수록 더욱 두드러져 李穆의 영의정 尹弼商 탄핵514)≪成宗實錄≫권 272, 성종 23년 12월 경자.과 李冑의 臺諫廳 설치 건의515)≪燕山君日記≫권 53, 연산군 10년 윤4월 병인.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성종대 사림파의 훈구파 탄핵을 위한 급진적인 언론활동은 문치 지향적인 성종의 의지와 관용에 의해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516) 성종대 홍문관의 설치(崔承熙,<弘文館의 成立經緯>,≪韓國史硏究≫5, 1970)나 세조대에 停罷되었던 경연의 강화(權延雄,<成宗朝의 經筵>,≪韓國文化의 諸問題≫, 時事英語社, 1981) 그리고 사림파 인물들을 주목하고 총애한 사실(≪成宗實錄≫권 221, 성종 19년 10월 갑인 및 권 238, 성종 21년 3월 갑인)과 언로폐쇄의 불가함을 내세워 중재하고 변호한 사실 등은 그러한 성종의 의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이는 성종대에는 순수한 건의로 용납될 수 있었던 언론내용들이 연산군대에는 정치문제로까지 발전하였던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연산군대에 이르러서도 사림파의 훈구파 탄핵활동은 지속되었다. 그러나 戊午士禍의 과정에서 이들의 탄핵활동 일체가<弔義帝文>과 자의적으로 연결되면서 그 행위는 일단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 내지 훈구파 중심의 지배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으며, 탄핵활동을 전개한 사림파는 ‘朋黨’으로 몰려 중앙정계에서 축출되었다.<조의제문>으로 상징되는 사림파의 언론활동은 훈구세력의 핵심을 이루는 靖難功臣 등 여러 공신세력의 존재명분을 부정하는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훈구파의 저항 또한 집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오·甲子士禍로 중앙정계에서 축출된 사림파가 중앙정계에 재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중종대였다. 특히 조광조가 등용된 중종 10년(1515) 이후 이들의 중앙정계 진출은 수적인 면에서 현저히 늘어났으며, 학문적 측면에서도 성장을 거듭하여 이미 修己차원을 극복하고 治人차원에 이른 성숙한 단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요순삼대의 至治를 이상으로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인습·구제의 혁거를 통한 명분의 회복과 이를 토대로 한 새로운 통치질서의 수립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목표가 달성되기 위해서는 훈구세력을 취약하게 만드는 노력이 전개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사림파는 훈구파에 대한 맹렬한 탄핵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대표적인 활동이 靖國功臣의 僞勳削除였다. 중종반정의 논공행상으로 책봉된 정국공신은 반정 직후부터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중종 2년 12월 지평 金安國과 정언 金安老는 공신의 土田藏獲을 삭감할 것을 계청하였고,517) 權橃,≪冲齋集≫권 4, 日記, 중종 2년 12월 4일(계유). 동왕 3년 2월 대사간 李世仁은 공신의 父子蔭加가 부당함을 논계하여 개정조치를 끌어냈다.518)≪中宗實錄≫권 5, 중종 3년 2월 병술. 이처럼 책봉 직후부터 논란이 제기되었던 것은 공신의 錄籍과정에서 冒錄된 인물이 다수 포함되는 등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등공신에 모록된 유자광은 중종 2년(1507)초부터 대간의 집요한 탄핵을 받아 遠方竄逐과 아울러 삭훈되었으며, 4년에는 같은 일등공신인 朴永文 역시 대간의 탄핵을 받기 시작하여 동왕 8년에 박영문·辛允武獄事로 伏誅되고 공신록에서 삭적되었다. 이러한 삭훈이 사림파만의 언론활동에 힘입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사림파의 역할이 컸던 것은 유자광이 대간의 탄핵활동을 자신에 대한 김종직 여당의 보복행위라고 말한 데서519)≪中宗實錄≫권 2, 중종 2년 2월 병자. 알 수 있다.

정국공신의 위훈을 둘러싼 사림파의 언론활동은 조광조 등이 진출한 이후 더욱 활발해져, 드디어 중종 14년 11월 76명의 공신을 삭훈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이러한 대규모의 위훈삭제는 공신세력에 대한 치명적인 타격이었으며, 훈구파의 급격한 세력약화를 가져왔다. 훈구세력에 대한 직접적이고 격렬한 이 탄핵활동은 그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삭훈이 단행된 며칠 뒤 己卯士禍가 일어난 것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기묘사화 이후 크게 세력이 꺾인 사림파는 중앙정계에서 거의 도태되었으며, 향촌에 은거하여 후진양성에 힘쓰면서 다음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뒤 김안로 일파가 실각한 중종 33년에 이르러 사림파는 다시 서용되기 시작하였다. 인종의 즉위는 이들의 활동에 새로운 전기로 작용하였으나, 명종의 즉위로 尹元衡·李芑 등 척신세력이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사림파는 계속 수난을 당하였다.520) 金安老 축출 이후 정계에 재진출해 있던 대다수의 사림파는 대의명분상으로 정통성이 있던 세자(인종)를 옹호하는 입장에 섰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乙巳士禍의 참화를 겪었다. 윤원형·이기가 주도한 공신 중심의 지배체제는 취약한 권력기반을 보강하는 방안으로 사화를 확대시켜 나갔다. 良才驛 壁書事件이나≪武定寶鑑≫의 편찬으로 야기된 安名世 筆禍事件, 李洪胤 誣告事件 등521) 禹仁秀,<朝鮮 明宗朝 衛社功臣의 性分과 動向>(≪大丘史學≫33, 1987), 50∼54쪽.이 그와 같은 맥락을 이룬다. 그에 따라 사림파의 훈구파에 대한 탄핵활동도 부진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척신 주도의 정국운영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文定王后가 죽고 윤원형이 실세한 명종 20년(1565)부터였다. 여전히 乙巳士禍 起禍人이나 그 관련 인물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사림파의 중앙정계진출은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었지만, ‘己卯·乙巳人’에 대한 인식은 점차 호전되는 추세였다.522)≪明宗實錄≫권 26, 명종 15년 정월 을유. 이러한 상황의 연장선상에서 선조가 즉위함에 이르러 사림파는 점차 중앙정계의 요직에 포진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조광조에게는 議政職의 追贈과 諡號가 내려지게 되었다.523)≪宣祖實錄≫권 2, 선조 원년 4월 경인 및 권 4, 선조 3년 5월 계유. 아울러 기묘인에 대한 적극적인 재평가도 이루어졌으며, 기묘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인 남곤은 관작을 삭탈당하게 되었다.524)≪宣祖實錄≫권 2, 선조 원년 9월 기사. 더 나아가 을사인에 대한 재평가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져 가해자에 대한 처벌과 피화인에 대한 신원이 병행되었고,525)≪宣祖修正實錄≫권 4, 선조 3년 4월 무술·8월 병신·10월 을미. 선조 10년(1577)에는 결국 衛社功臣이 삭훈되기에 이르렀다.526)≪大東野乘≫권 15, 石潭日記 下, 선조 10년 11월 경진. 이로써 사림파의 훈구파에 대한 탄핵활동은 더 이상 지속될 필요가 없어졌으며, 종전에 행해진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완전히 확보하게 된 사림파는 公道와 공론을 주창하는 새로운 사림정치시대를 열어가게 되었다.

<李秉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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