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3. 서원건립활동
  • 1) 배경

1) 배경

書院설립의 주체는 16세기 이후 조선왕조의 정치사를 주도하였던 士林세력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사림은 고려 후기 士大夫에서 조선왕조 개창을 둘러싸고 재야세력으로 밀려난 계열의 후예들로서 경제적으로는 中小地主계층을 가리킨다.557) 李泰鎭,<士林과 書院>(≪한국사≫12, 국사편찬위원회, 1977 ;≪朝鮮儒敎社會史論≫, 지식산업사, 1989).
李秉烋,≪朝鮮前期 畿湖士林派硏究≫(一潮閣, 1984), 5∼10쪽.
李樹健,≪嶺南士林派의 形成≫(嶺南大 出版部, 1979).
이들은 대체로 鄕村에 내려가 교육과 향촌건설에 주력하였다. 이들 사림세력은 한때 세종의 폭넓은 인재등용책에 힘입어 일시 중앙정계에 진출하기도 하였으나 본격적인 진출은 성종 때부터이다. 이러한 사림세력의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의 부상은 이 시기 집권층의 귀족화·보수화의 추세에 따른 각종 비리가 드러나면서 이에 대한 견제세력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한편으로는 그들이 내세운 관료의 신분적인 특권의식에 의한 私利추구 성향을 배제한 성리학적 公道論의 정당성이 재인식되었기 때문이다.558) 李泰鎭, 위의 글, 175∼179쪽.

성리학의 정통적 계승자로 자부하던 사림세력은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勳舊派의 富國强兵策과 詞章 중심의 학풍을 비판하고 留鄕所를 비롯한 향촌자치제의 실시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향촌사회에 근거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정계진출 이전부터 향촌사회 문제에 대해 그들 나름의 방식을 제시하여 관권 우위의 중앙정부의 일방적인 향촌정책에 비판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사림의 향촌문제에 대한 관심은 왕조 초기의 유향소 설치, 세종대의 社倉制 실시 건의 등으로 나타났다. 사창제 실시는 세조의 집권으로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후 사림이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성종대에 오면 이들은 향촌문제를 재추진하면서 세조 때 혁파된 유향소의 復立運動을 전개하였다.559) 李泰鎭,<士林派의 留鄕所 復立運動-朝鮮初期 性理學 定着의 社會的 背景-(下)>(≪震檀學報≫35, 1973). 이는 이 기구를 통해≪朱子家禮≫·≪小學≫·鄕射禮·鄕飮酒禮 등 성리학의 실천윤리를 보급하여, 종래의 佛敎的이고 淫祀的인 吏族 중심의 향촌사회를 士族 중심의 유교적인 향촌질서체제로 재편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15세기 사림들이 지향하는 유교적인 향촌질서 확립을 위한 유향소 복립운동은, 이것이 사림세력의 기반이 될 것임을 간파한 勳舊戚臣系의 집요한 반대와 京在所를 통한 방해공작으로 성공할 수 없었고 오히려 관권주도형으로 전환되었다. 이에 그들은 다시 司馬所를 세워 본래의 의도를 관철코자 하였지만 이 역시 훈척계의 탄압으로 여의치 못하였으며, 이후 사림계열은 戊午·甲子士禍를 거치면서 일대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사림파의 성장이라는 시대적인 대세는 어쩔 수 없었다. 中宗反正 이후 趙光祖 등 신진사류가 중앙정계에 등장하면서 소위 道學政治의 실현을 위한 정치활동이 활발해지고 한편으로 향촌문제에 관하여서는 종래의 향사·향음주례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향촌사회의 여러 문제를 보다 더 포괄할 수 있는 鄕約보급운동을 추진하였다. 이 향약보급운동은 부분적인 성과를 보이기도 하였지만 己卯士禍로 조광조 등 사림계 신진관료가 숙청·제거됨으로써 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기묘사화 이후 사림파는 중앙정계에서는 훈구파에 밀리고 있었으나 향촌사회에서는 착실한 재지적 기반을 다져갔다. 그 과정에서 마침내 경상도 豊基郡에서 최초의 서원이 출현하였다.

서원성립 이전의 사창제, 향사·향음주례, 향약보급 등 사림세력들의 향촌질서 확립운동은 향촌에서의 그들의 사회적 역할을 제도적으로 구체화시키려는 것이어서 중앙집권정책과 이에 기초한 관료세력과는 계속 마찰을 일으켰다. 서원은 이러한 마찰을 여러 차례 겪은 끝에 여기에 대한 대안으로 도입되었던 제도이다. 이와 같이 사림세력이 향촌사회의 구심점을 서원으로 바꾼 것은 宋代 서원제도의 일정한 영향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일단은 서원 자체가 교육기관으로서 교육과 敎化를 표방함으로써 정치적 반대세력으로부터의 견제를 그만큼 덜 받을 수 있는 기구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림을 결집하고 향촌활동을 합리화해줄 수 있는 중심체로서 서원제도가 乙巳士禍 이후 사림세력이 실세하였을 때에도 계속적인 발전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볼 때 이 시기 서원의 성립은 사림세력들의 향촌지배체제 확립을 위한 노력의 일단으로 사림세력 성장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560) 李泰鎭, 앞의 글(1977). 이후 교육기관으로서의 서원제도는 본격적인 발전을 보게 되면서 재지 중소지주층의 지식인화를 더욱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시대 서원의 성립은 일반적으로 先賢·先師를 奉祀하는 ‘祠’와 자제를 교육하는 ‘齋’가 결합된 것으로 이해된다.561) 조선시대 서원제도의 성립과 그 배경에 대해서는 柳洪烈의 선구적 업적 이래 많은 연구가 있어 왔다. 유홍렬은 일련의 논고를 통해 서원의 성립을 고려왕조 이래 발전해 온 祠廟와 연산군 이래 官學의 쇠퇴로 인한 私學의 발달에서 찾고, 또한 이 당시 중국 서원제도의 영향, 朱子숭배사상의 고조, 잇따른 士禍로 인한 사림들의 운둔사상, 先賢들에의 私淑 등 사회적인 여러 요인에 의해 서원이 성되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이후 대체로 받아들여지면서 정치·사회·교육적인 측면에서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柳洪烈,<麗末鮮初の私學>(≪靑丘學叢≫24, 1936).
―――,<朝鮮 祠廟發生에 對한 一考察>(≪震檀學報≫5, 1936).
―――,<朝鮮に於ける書院の成立>(≪靑丘學叢≫29·30, 1939).
그러나 설립 당시에는 어디까지나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이 일차적인 것이었다. 대체로 서원제도가 도입·정착되기 이전의 사림파계열의 학통은 주로 書齋·精舍 및 家學으로 전수되었다. 고려말 성리학의 수용과 함께 시작된 지방 私學의 실체로서 士子(士人)의 단순한 藏修·講學의 장소였던 서재·정사 등이 엄격한 學規에 의해 운영되는 서원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지만 새 왕조의 교육에 대한 정책상의 한계로 나타난 관학의 부진이 크게 작용하였다.

조선왕조는 그 초기에는 숭유정책을 국시로 내세워 안으로 성균관·四學, 밖으로는 향교 등 관학을 크게 장려하여 중소지주층의 지식인화 및 鄕風敎化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15세기 후반부터 관학은 점차 쇠미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교육기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여기에는 관리등용의 첩경으로서 유생의 忠順衛로의 入屬, 敎官의 질적 저하 및 관리등용기구로서의 관학 자체가 가지는 한계성이 일정하게 작용하였다.562) 柳洪烈, 위의 글(1939).
崔完基,<朝鮮朝 書院成立의 諸問題>(≪韓國史論≫8, 國史編纂委員會, 1980).

이후 중종대에 들어와서 연산군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는 가운데 敎學振興策으로서 학교교육을 크게 강화하였다. 그러나 중종대 공신계열이 주도한 교학진흥책은 관리등용기구로서의 관학의 필요성만이 강조됨으로써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관학은 여전히 황폐해 있었다. 이에 반해 조광조로 대표되는 사림세력은 그들이 표방하였던 도학정치 이념에 기초한 교학진흥책을 주장하였다. 물론 조광조 등 사림계 관료들이 성균관과 향교를 외면하거나 학교의 진흥에 유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시의 관학이 오로지 과거공부 위주로 운영됨에 따라 名利만을 좇게 되어 오히려 士習을 부정케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우선 시급한 것은 학교의 修擧와 같은 외형적인 조처가 아니라 사림 스스로의 수련과 내적 성숙을 통한 자발적인 흥기를 꾀하는 사림 위주의 흥학책 마련이라고 보았다. 그들의 이러한 교학진흥책은 道學의 정통인 鄭夢周·金宏弼의 文廟從祀運動으로 전개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이러한 운동이 祠廟의 건립으로 나타나면서 이후 서원·祠宇의 출현을 준비하고 있었다.563) 鄭萬祚,<朝鮮 書院의 成立過程>(위의 책).

이러한 관학의 부진은 다른 한편으로 사학의 발달을 촉진시키는 요인이 되었으며 따라서 당시 많은 유생들은 관학을 떠나 私第에서 면학하고 있었다. 관학쇠퇴의 주요인이 교사의 무자격에 있었다면, 사학은 학덕을 겸비한 有志人士의 힘으로 개설되었으므로 관학의 결점을 보완하여 번창할 수 있었다. 중종 말년에 이르러 관학은 더욱 쇠퇴하였고 따라서 私塾을 영위하는 이도 속출하였다. 이러한 사학을 통한 강학활동은 이 당시 사림사회의 절실한 소망이자 공통된 욕구였다. 중종 9년(1514) 9월 特進官 韓亨允이 경상도 좌우도에 각각 學舍를 別立하여 유생 30명씩을 모아 강학에 전념하게 할 것을 청한 것은 그 단적인 예이다. 이러한 학사 신설의 주장은 종래의 향학·국학을 대신할 만한 새로운 교육기관의 설치를 바란 시대적 사회정신의 발로로서 서원설립의 제1차적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교육기관 신설의 긴급한 시대적 요구에 호응하여 명유·지방유림들은 常住地·赴任地·流配地 등에서 서당·정사 등을 개설하여 후학을 敎誨하는 데 이바지하였다.564) 柳洪烈, 앞의 글(1939). 이러한 지방사학의 발달은 한편으로 세조의 왕위찬탈과 연산군대의 양대 사화를 거치면서 기성학자들의 은둔사상이 크게 고조됨에 따라 더욱 활발하였다.

이후 중앙관료 사이에서도 관학에 대신할 새로운 교육기관의 설치가 주장되기도 하였다. 지방학제 진흥을 위한 새로운 방안의 하나로서 지금까지의 향교가 아닌 교육기구로서의 中國書院制 도입이 처음 제기된 것은 白雲洞書院 설립 1년 전 공신계 관료인 行副司果 魚得江에 의해서였다.565)≪中宗實錄≫권 98, 중종 37년 7월 을해. 어득강은 중국의 정사·서원제도를 소개하면서 이러한 것들이 우리 나라에는 없기 때문에 ‘遐裔之儒’가 問業치 못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충청·강원·전라도에는 한 곳, 경상도에는 좌우도에 大刹을 하나씩 지정하여 도내의 명유와 유생을 함께 聚集·讀書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어득강이 제시한 이러한 방안은 유생에 대한 修己, 즉 ‘爲己之學’ 보다는 과거를 위한 製述 바로 ‘爲人之學’에 치중한 것으로, 관학과 마찬가지로 관인 획득을 위한 조처에 그쳤다. 이는 당시 조광조계열 사림의 교화론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으나,566) 鄭萬祚, 앞의 글, 35∼37쪽. 이러한 조정의 분위기 속에서 관학에 대신할 사학의 발달은 필연적이었으며 서원 성립의 기초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마련되었다.

이 시기 서원으로 대표되는 사림의 교육기관이 관학이 아닌 고려말 이래의 사학의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은 이들 계층 자체가 본래 재지 중소지주라는 데 일차적인 이유가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재지지주적 입장의 이들 사림파가 가지는 새 왕조의 중앙집권 일변도적인 제반 시책에 대한 비판의식의 소산이기도 하다.567) 李泰鎭, 앞의 글(1977). 이는 교학체계로 말한다면 관학아카데미즘의 전통으로부터 사림아카데미즘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568) 丁淳睦,≪韓國書院敎育制度硏究≫(嶺南大 出版部, 1979). 이 시기 뜻있는 선비는 사화발생 이후 山林에 숨어서 도학을 닦고 정사·서당 등의 사학을 열어 후진을 가르침에 힘씀으로써 서원성립의 사회적 여건을 조성하였다. 이와 동시에 사림의 숫적 확대와 함께 학연도 크게 확대되었다. 한편 이들 사림은 출세의 학문인 詞章學보다는 우주의 본질과 이성의 탐구라는 내면적 학문연마에 주력하였다. 이 시기 서원이 성립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성리학의 성격변화와 학파의 형성도 일정하게 작용하였다.569) 崔完基, 앞의 글.

서원제도가 성립되는 16세기는 여러 면에서 하나의 전환기였다. 특히 정치적으로는 사림파가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집권 훈구세력과 대립하면서 여러 희생을 치른 끝에 집권하고, 사상적으로는 성리학이 점차 이기론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는 시기였다. 서원의 성립은 이러한 정치·사회적인 여러 변화와 사림세력 성장의 결과로 나타난 시대적 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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