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4. 성리학의 연구와 보급
  • 5) 성리학적 사회윤리의 실천

5) 성리학적 사회윤리의 실천

성리학은 송대 지주전호제 아래서 지주, 특히 중소지주층의 이해를 반영하여 성립된 사상이었다. 그러므로 성리학은 신분제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상하관계를 중시하는 名分論과 소작인과의 모순대립관계를 완화하기 위한 개량적인 分殊論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공자의 正名사상에서 비롯한 명분론에서는 그 이름에 따라 상하·존비·귀천이 정해진다고 보고 거기에 나타나는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나아가 이 차별은 지주와 전호의 관계뿐만 아니라 군신·부자·부부관계 등에 모두 적용되었으니 그것이 곧 사회윤리였다. 이러한 사회윤리는 理는 하나로 평등하나 동시에 각각으로 나뉘어 차별성을 지닌다는 理一分殊論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성리학적 사회윤리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덕목은 三綱五倫이었다. 父子·君臣·夫婦·長幼·朋友의 관계를 규정한 5륜은 어떤 시기,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진리, 즉 天理의 사회적 구현이었으며, 3강은 그 가운데서도 특히 군신·부자·부부의 관계를 상하 주종관계로 강조한 것이었다. 이 3강5륜은 다섯 가지 인간관계만을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처와 첩, 적자와 서자, 주인과 노비, 지주와 전호 등 사회의 모든 인간관계에 확대·적용되는 것이기도 하였다.718) 김항수,<조선 전기의 성리학>(≪한국사≫8, 한길사, 1994), 271∼280쪽.

성리학적 사회윤리는 성리학이 조선사회의 지배사상으로 등장하게 되면서 같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15세기 조선의 건국과 문물제도의 정비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신흥사대부들은 철학적인 측면보다는 실천윤리·의례적인 측면을 강조하였으며≪소학≫과≪주자가례≫ 등 성리학적 지배이념에 입각한 사회윤리와 유교의례의 시행에 적지 않은 관심을 기울였다.

≪소학≫은 12세기 후반 주자가 小子·童蒙에게 灑掃·應對·進退의 예절과 禮·樂·射·御·書·數의 익힘, 愛親·敬長·隆師·親友의 도리를 가르쳤던 三代의 교육법을 재현할 목적으로 그의 문인인 劉子澄을 시켜 편찬한 책으로, ‘日用之事’를 통해 학문의 근본을 배양하여 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이루는 것을 중요한 내용으로 담고 있다. 주자는 이 책을 성리학의 大綱을 서술해놓은≪대학≫을 배우기 전에 반드시 거쳐가야 할 단계로 설정함으로써 단순한 수신·제가의 학문이 아닌 修己治人과 천하를 다스리는 과정의 하나로서 제시하고 있다.719) 金駿錫, 앞의 글, 123∼127쪽.

체제는 立敎·明倫·敬身·稽古의 內篇과 嘉言·善行의 外篇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편은 주로 禮書와 경전 등에서 내용을 뽑아 편집하고 외편은 주로 송대 성리학자들의 언행을 기록하였다. 특히≪예기≫의 내용을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으며 기본 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입교와 명륜·경신은 대부분이 禮에 관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외편의 가언 역시 비슷하였다. 그러므로≪소학≫의 실천과 이해는≪주자가례≫를 비롯한 유교의례의 실천·이해와 표리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720) 高英津,<16世紀 禮學과 河西 金麟厚의 위치>(≪河西 金麟厚의 道學과 文學思想≫, 광주광역시·향토문화연구회, 1995), 75∼77쪽.

고려말 신흥사대부들에 의해 성리학과 함께 도입되어 유교적 수양의 한 방법으로 주목받은≪소학≫은 조선에 들어와서는 초기부터 官學의 중심 교과목으로 선택되었다. 또한 生員試를 보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考講과목으로 설정되고 武科 殿試의 선택과목으로 지정되는 과정을 통해721)≪太宗實錄≫권 8, 태종 4년 8월 기축.
≪世宗實錄≫권 31, 세종 8년 정월 임술 및 권 117, 세종 29년 8월 갑자.
≪經國大典≫에서는 生員 覆試의 필수과목과 武科 복시의 선택과목으로 규정되었다.722)≪經國大典≫권 3, 禮典 諸科 및 권 4, 兵典 試取. 나아가 각 지방마다 간행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이 책을 註釋한≪集成小學≫만여 부를 인쇄하여 판매하자는 논의가 제기되는 등 국가적으로 장려되었다.723)≪世宗實錄≫권 37, 세종 9년 7월 정해 및 권 68, 세종 17년 4월 기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15세기≪소학≫의 보급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당시≪소학≫교육이 주로 국가의 주도로 법령과 제도에 의해 이루어져 형식적·강제적인 측면이 강하였으며, 학생들이 이 책을 일상의 내용만을 다룬 진부한 것으로 받아들여 공부하는 것을 기피하고 시험 준비를 위해 마지못해 하는 정도였기 때문이다.724) 朴連鎬,<朱子學의 根本培養說과 朝鮮前期의「小學」敎育>(≪淸溪史學≫2,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5), 105∼112쪽.

≪주자가례≫는 12세기 후반 주자가 그 때까지 私家에서 통용되던 冠·婚·喪·祭禮를 정리한 책으로, 宋이 외적의 침입으로 남으로 쫓겨가고 내부적으로는 소가족 중심의 가족구조로 변화하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따라서≪주자가례≫에서는 小宗主義에 입각한 종법이 강조되었으며 이는 현실적으로 중세 가부장적 지배질서로 구현되었다.725) 黃元九,<朱子家禮의 形成過程-王法과 家禮의 連繫性을 中心으로->(≪人文科學≫45, 延世大, 1981), 110∼116쪽.

조선시대에 들어와≪주자가례≫는≪소학≫과 함께 중시되었으나 학문적 연구보다는 법령과 제도의 정비를 중심으로 한 유교의례의 시행이라는 측면이 강조되었다. 즉 성리학적 사회질서의 확립과 사회관습의 변화를 주요 목적으로 시행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 시기≪주자가례≫는 일반민을 배제한 것은 아니었으나 주로 사대부층을 대상으로 시행되었다. 이는 국가 주도라는 한계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였으나 불교나 민간신앙적인 성격이 상당히 남아 있었던 사대부들의 생활관습을 유교적인 것으로 바꿈으로써 우선적으로 지배층 내부의 동질성과 일반민에 대한 문화적 우월성을 확보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726) 高英津,<15·16世紀 朱子家禮의 施行과 그 意義>(≪韓國史論≫21, 서울大, 1989), 89∼110쪽.

그리하여 제일 먼저 祭禮에서의 家廟制가 시행되고 이어 喪禮에서의 三年喪, 그리고 婚禮에서의 親迎과 冠禮 등이 사대부의 경우 강제성을 동반하면서까지 독려되었다. 나아가 국가는 당시 喪葬禮를 주관하던 經師에게≪주자가례≫를 가르쳐 상을 만나면 시행하게 하였으며≪葬日通要≫라는 葬禮書를 만들어 보급하기도 하였다.727)≪太宗實錄≫권 5, 태종 3년 4월 경술.
≪世宗實錄≫권 3, 세종 원년 3월 계축.
또한≪주자가례≫는≪경국대전≫에 문과 복시와 생원 복시의 필수과목으로 설정되는 등≪소학≫과 함께 관학의 교과목, 과거와 승진의 필수과목이었다.728) 鄭肯植,≪朝鮮初期 祭祀承繼法制의 成立에 관한 硏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6), 104∼107쪽.

그러나≪주자가례≫는 15세기말까지 사대부층 내에서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는 당시 집권세력이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유교의례뿐만 아니라 불교나 도교·민간신앙적인 요소들도 용인하는 정책을 취하였으며, 香徒·契와 經師制 등 이미 전통적으로 상부상조와 공동노동을 통한 방법들이 존재하여 새로이≪주자가례≫를 행할 필요성이 그만큼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불교나 민간신앙적인 방법보다는 비용이 적게 들었지만 역시 적지않은 경비가 필요했기 때문에 쉽게 행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729) 고영진, 앞의 책, 34∼45쪽.

이러한 상황은 16세기에 들어와 성리학적 소양을 강하게 지닌 사림이 등장하면서 점차 변화하였다. 이들은 법률적 강제로서의 刑政보다는 이념적 지배로서의 敎化를 우선시하며 성리학 修身書인≪소학≫과 儀禮書인≪주자가례≫를 중앙과 향촌에서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해나가는 양대 기반으로 삼았다.

≪소학≫을 단순한 일상의 내용을 기록한 책이 아닌≪대학≫과 함께 천하를 다스리는 데 반드시 필요한 책으로 그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이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성종대 등장하는 영남사림이었다. 김종직은≪소학≫을 학문의 기초로 삼고 제자들에게 이 책을 공부할 것을 권장하였으며, 그에게서≪소학≫을 배운 김굉필은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하며 자신의 삶을≪소학≫이념의 실천으로 일관하였다.

또한 김굉필과 교분이 두터웠던 南孝溫·정여창·姜應貞·朴演 등은 小學契를 만들었으며, 특히 강응정과 박연은 金鍊叔·申從濩·孫孝祖·鄭敬祖·權柱·丁碩亨·康伯珍·金允濟 등과 함께 향약을 만들어≪소학≫을 講論하였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향촌에서 鄕射禮·鄕飮酒禮를 보급하는 운동과 관계를 맺기도 하였으니, 결국≪소학≫을 매개로 한 집단적인 연대를 통해서 자신들을 훈척과 구별하고 중앙과 향촌에서 그 이념을 실천하려고 했던 것이다.730) 李泰鎭, 앞의 글(1983), 17∼18쪽.

중종대 등장하는 기묘사림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소학≫을 국가적으로 보급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들은 이 책에 성리학의 요체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고 보고≪소학≫의 道를 실천하기 위해 그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고 과거에서의 考講을 철저히 하며 이 책을 인쇄하여 유생들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과 부녀자들에게까지 널리 보급할 것을 국왕에게 청하였다. 이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져 중종은≪소학≫교육을 진흥시키기 위한 傳敎를 내리기도 하였다.731) 朴連鎬, 앞의 글, 117∼125쪽.
≪中宗實錄≫권 26, 중종 11년 11월 계미.

기묘사림의≪소학≫실천운동은 여씨향약이≪소학≫에 실려 있는 관계로 향약보급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며 추진되었는데 이 운동에 앞장섰던 대표적 인물은 김굉필의 문인이었던 김안국이었다. 그는 중종 12년(1517)부터 己卯士禍가 일어나는 14년까지 경상·전라도관찰사를 차례로 역임하면서 여씨향약을 보급하고≪集成小學≫을 간행하였으며 지방학자들에게≪소학≫을 권하는 詩 70여 수를 지어 주는 등≪소학≫과 향약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732) 金恒洙, 앞의 글(1981), 137∼141쪽.

≪주자가례≫는 16세기 들어와 사림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하면서 일반민에게까지 그 시행의 범위를 넓혀갔다. 김숙자의<祭儀>·<祝文>·<墓祭儀>, 김종직이 저술한≪彛尊錄≫의<先公祭儀>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사림은 家訓이나 家令의 형태를 띤 글을 통해 자신들의 가문에서 행해 내려오는 유교의례의 내용을 정리하는 한편 국가적으로도≪주자가례≫에 기반한 유교의례의 시행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중종대에는 3년상과 친영·廟見 등을 둘러싸고 典禮論爭이 일어나,≪國朝五禮儀≫를 고수하며≪주자가례≫의 부분적 시행을 주장하는 대신 중심의 국조오례의파와≪주자가례≫의 전면적 시행을 주장하는 사림 중심의 古禮派가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하였다.

조광조를 위시한 신진사류들은 서민들도 3년상을 지낼 수 있도록 할 것을 요구하고 중종이 문정왕후를 새로 왕비로 맞아들일 때에는 친영례과 묘현례를 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 때까지 거의 행해지지 않았던 관례를 행할 것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군인과 향리가 3년상을 행할 수 있도록 하고 왕실 혼례에서 친영례를 행하게 하는 등 어느 정도 성과를 올렸으나 아직까지도 상황은≪국조오례의≫에 따라 주로 거행하되 부분적으로≪주자가례≫를 참조하는 정도였다.733) 고영진, 앞의 책, 59∼72쪽.

한편 기묘사림은≪소학≫과≪주자가례≫의 실천과 함께 禮俗書籍의 보급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들은 이미 15세기부터 간행되어온≪三綱行實圖≫ 외에도≪續三綱行實圖≫·≪二倫行實圖≫·≪警民篇≫·≪童蒙須知≫ 등을 간행하여 보급하였다.

≪속삼강행실도≫는 세종대에 간행한≪삼강행실도≫를 보완한 것으로 본문 위에 한글로 된 번역문을 붙여 놓아 일반민들도 볼 수 있게 하였으며,734) 朴珠,≪朝鮮時代의 旌表政策≫(一潮閣, 1990), 70∼75쪽.≪이륜행실도≫는 長幼와 朋友간의 윤리를 내용으로 한 것으로 재지지주였던 사림의 성장과 함께 대두되기 시작한 鄕黨倫理를 제시한 것이었다.≪경민편≫은 일반민들을 보급 대상으로 하고 저술한 것으로 口訣과 諺解가 첨부되어 있었으며,≪동몽수지≫는 어린이가 지켜야 할 예절을 기록한 책이었다.735) 金勳埴,<16세기 『二倫行實圖』 보급의 社會史的 考察>(≪歷史學報≫107, 1985).
―――,<中宗代 『警民篇』 보급의 고찰>(≪李載龒博士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1990).

예속서적의 간행과 함께 언해작업도 활발히 이루어져≪소학≫·≪正俗≫·≪女戒≫ 등이 언해되고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속삼강행실도≫와≪경민편≫은 언해가 첨부되어 반포되었다. 중종대의 이러한 변화는 사대부뿐만 아니라 여자와 일반민도 교화의 적극적인 대상으로 등장하였으며 성리학적 사회윤리가 이들에게까지 확산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기묘사림들의 이러한 노력은 기묘사화로 일시 좌절되었다. 그리하여 향약이 전면 혁파되고≪소학≫의 보급 문제 역시 일체 논의가 사라졌다. 심지어 부형들은 자제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소학≫을 사람을 죽이는 독약으로 여길 정도였다. 중종 말년 사림들은 다시 소학과 향약의 보급을 꾀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乙巳士禍로 무산되었다. 더욱이 문정왕후의 불교 숭상으로 인해≪주자가례≫를 비롯한 유교의례의 시행도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향촌으로 돌아간 사림은 오히려≪소학≫과≪주자가례≫의 실천을 강화해 나갔다. 그리하여 명종대에 가면 朴世茂가≪童蒙先習≫을, 유희춘이≪續蒙求≫를 편찬하고 盧禛이≪養正篇≫을, 柳仲郢이≪童子習≫을 간행하는 등 다양한 소학류의 책들이 편찬·간행되었으며 학문적 접근도 이루어져 이이는 小學註釋書인≪小學集註≫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선조대에 이르면 중종대에 언해한 것을 수정한≪小學諺解≫가 만들어지고 이이가≪擊蒙要訣≫을 완성함으로써≪소학≫을 통한 성리학적 사회윤리의 보급은 일단락되었다.736) 李泰鎭, 앞의 글(1983), 20∼23쪽.
金恒洙, 앞의 글, 154∼156쪽.

명종대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심화와 함께≪주자가례≫와≪儀禮經傳通解≫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과 실천은 家禮書의 저술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특히 사림은 宗法과 효의 강조를 통해 가문의 통합성을 이루기 위해 제례를 중심으로 한 가례서인 祭禮書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제례서는 내용과 형식에서 거의≪주자가례≫를 따랐는데 학문적이기보다는 실용적인 성격이 강하여 生活規範書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

동시에 사림은 예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성리학의 체계화를 위해 노력하였던 이언적·서경덕·김인후·이황·조식 등이 모두≪주자가례≫의 시행에 적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예의 내용과 의의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다양한 예서를 저술하였다. 이언적은 수준높은 제례서인≪奉先雜儀≫를, 김인후는 초보적인 가례주석서의 성격을 띠는<家禮考誤>를 저술하였으며 이황이 문인들과 주고받은 예에 관한 서신들은 그가 죽은 뒤에 문인인 趙振에 의해≪退溪喪祭禮答問≫이라는 책으로 편집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서경덕·이황·조식의 문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심화와 더불어 예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본격화되면서 학문으로서의 예학이 성립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선조대에 가면 문장을 주로 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성리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의 거의 대부분이 예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며 예에 관한 글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들의 주도 아래≪주자가례≫가 사회전반에 걸쳐 확산되었음은 물론이다.737) 고영진, 앞의 책, 64∼104쪽.

성리서의 수입과 간행·보급, 이기심성논쟁을 통한 학문적 심화,≪소학≫·≪주자가례≫ 등의 보급을 통한 성리학적 사회윤리의 실천 등, 16세기 조선사회의 전면에 등장한 사림에 의해 주도되었던 이 세 흐름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들은 사림이 학파를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파화하여 중앙 정계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함으로써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끝이 아니라 또하나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高英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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