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5. 경제개혁의 추진
  • 1) 농업장려와 농법개량

1) 농업장려와 농법개량

세종대에 편찬한≪農事直說≫은 중국과는 다른 우리 나라의 풍토와 농업기술 수준에 맞는 독자적 農書로서의 기능을 다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또한 上農層의 농업경영 방식을 기준으로 하고 식량 작물의 재배를 중심으로 하여 편찬한 농서였으므로, 농업 현실의 더 구체적인 면에서 그것을 보충할 다른 농서가 곧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한 요망에서 먼저 지어진 것이 姜希孟의≪衿陽雜錄≫과 편자 미상의≪四時纂要抄≫였다.

≪금양잡록≫은≪농사직설≫의 경우보다 훨씬 더 많은 곡물의 品種을 들어 그 각각이 어떠한 土性에 맞는 것인지를 자세히 설명하였으며,≪사시찬요초≫는 애초에≪농사직설≫에 수록되지 않은 九穀 이외의 다른 작물들의 재배법을 주로 서술하였다. 그래서 이 두 책은 농업기술과 농업정책의 양면에 걸쳐 여러 가지 구체적인 면에서 소농민층에게 더 도움이 되도록 배려하였다는 특징을 가진다. 즉 소농민경영의 안정이 국가 농정의 기본 방향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대변한 농서로 편찬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두 책은 개인의 저작 내지 발췌에 속하는 것인 만큼 15, 6세기 조선 농업의 현실에서 그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금양잡록≫은 선조 14년(1581)에≪농사직설≫과 함께 內賜本≪農事直說≫로 合刊되기에도 이르렀다는 사실을 보면, 그것이 국가 농정 수행의 보충서로서의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었음이 확실하며, 그 영향력 또한 자못 컸을 것임에 틀림없다.738) 金容燮,<금양잡록과 사시찬요초의 농업론>(≪겨레문화≫2, 1988 ;≪朝鮮後期農學史硏究≫, 一潮閣, 1988, 제Ⅰ장 3절) 참조. 여기에는≪사시찬요초≫또한 강희맹이 ‘抄’한 것이었다는 여러 가지 증거 사례를 소개하였다.

그같은 농서의 편찬 보급이라든가 권농정책과는 별도로, 15세기 후반 세조대부터 크게 대두하기 시작한 이른바 勳戚계열은 16세기 후반까지 사실상 정치권력을 천단하고 있었다. 그들은 원래가 지주층인데다 權貴로서의 정치·사회적 세력을 이용하여 더욱 축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선 각 지역의 守令이나 京在所·留鄕所와 결탁하여 그 힘으로 일반 軍民을 동원하여 연해지를 개간하고 영농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지주지 확장과 그 경영에 국가권력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각 지역의 水利를 독점한다든가 長利를 증식시키는 방법 등으로 소농민의 토지를 겸병하기도 하였다. 그래서“無勢한 사람은 비록 토지와 노비를 가졌다 하더라도 有勢之家에 빼앗기지 않으면 반드시 內需司에 빼앗기고 만다”739)≪明宗實錄≫권 182, 명종 16년 8월 무신.고 하는 정도로 소농민경영이 유린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740)≪明宗實錄≫권 13, 명종 7년 5월 무자.
이 시기 소농민경영의 분해와 지주지의 집적에 관해서는 金泰永,<朝鮮前期 小農民經營의 추이>(≪朝鮮前期土地制度史硏究≫, 지식산업사, 1983) 참조. 그리고 특히 勳戚의 농민침해 현상에 관해서는 李泰鎭,≪韓國社會史硏究≫(지식산업사, 1986) 제 8·9장 참조.

그런데 한편으로 16세기에는 사림계의 정계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상대적으로 소농민경영의 안정과 관련된 농업의 장려가 다각도로 전개되었다.

16세기 사림계의 정치적 진출이란 단지 정치적 측면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이른바 사림의 出自 자체가 각 지역 중소지주층의 성장에 뿌리를 두고 있었는데, 그 중소지주층은 곧 당해 지역의 광범한 소농민경영의 안정을 바탕으로 하고서야 성장할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16세기 사림계의 농업장려는, 훈척계열과는 상대적으로 다른, 자신들의 계급적 안정 및 성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농업정책의 실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反正을 통하여 새로 정권을 차지하게 된 중종 초기의 훈신들은 사림계열은 아니었으나, 우선 연산군대의 亂政을 경계하는 의미에서도 권농정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가령 반정 직후에 “東·西의 蠶室은 先王朝에서 설치한 것이니 다시 그 제도를 회복해야 한다”고 하여 衆議를 모았던 사실이741)≪中宗實錄≫권 1, 중종 원년 9월 신사. 그러한 표현의 일단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권농정책은 사림계열의 정계진출과 더불어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중종 11년(1516) 11월 經筵에서 執義 成世昌은 권농정책을 새로운 국가정책으로 강조할 것을 요청하였다. 즉 그는 人君이 나라를 다스림에는 마땅히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그 數가 늘어나게 하며 그들을 가르치는 일을 우선해야 한다고 전제한 후, 세종대에는 農桑에 힘을 기울여 수령들이 사방을 순시하면서 권농하여 들에는 경작하지 않는 田地가 없었는데, 근래에는 힘써 농사하는 백성들이 없고, 수령도 들로 나아가 농상을 권하는 자가 없으며, 監司 또한 검찰하지 않으니, 이에 특별히 外方에 효유하여 농업에 힘쓰도록 권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742)≪中宗實錄≫권 26, 중종 11년 11월 임인.

그리고 다음해 정월 大司憲 金璫 등이 세종대의 勸農敎書를 써서 올리면서 그것을 모범삼아야 한다고 적극 주장함에 따라 권농정책은 본격화하게 되었다. 즉 “근래에는 국가가 농정을 폐기하여 餘事로 보기 때문에 농민은 末業으로 달려가 농사를 돌보지 않으며”, 수령과 감사는 권농에는 힘쓰지 않은 채 “빈객이나 영접하면서 태만하게 서로 이끌어 國典을 멸시 폐기”하고 있으며, 특히 “堤堰을 폐기하여 豪勢家의 田地로 되게 하고 良民을 숨기어 奸猾者의 私役을 들게 한다”고 하여, 당시 훈척계열 등의 지주지 확대와 그 경영양태를 비판하였다.743)≪中宗實錄≫권 27, 중종 12년 정월 정해.

그같은 사림계열의 농업정책은 뒤이어 국왕의 권농교서라는 형식을 통하여 8도에 申飭되기에 이르렀다. 이 때의 권농교서는 중종 12년 2월과 그 다음해 3월에 각기 내려졌는데,744)≪中宗實錄≫권 27, 중종 12년 2월 임신 및 권 32, 중종 13년 3월 병오. 이는 세종대의 권농교서 이후 실로 오랜만에 거행된 일이었다. 그 내용은 농업이야말로 堯舜 이래 王政의 大本일 뿐 아니라, 국가의 법전에도 권농의 조항745)≪經國大典≫권 2, 戶典 務農에는 觀察使·守令·勸農官 등의 농업권장 등에 관한 사항을 실어두고 있다.이 들어 있음을 밝히는 한편, 몽매한 小民은 권하지 않으면 스스로 분발하지 않는 것이므로 목민관들이 성의를 기울여 몸으로 권농에 나서라는 것이었다. 특히 이 즈음에 새로 일어나고 있는 중앙과 지방 각지 상업의 말폐를 지적하여 어디까지나 본업에 힘써 一家와 姻親, 鄕黨이 여유있는 바탕 위에서 교화되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왕정을 실현키 위한 바탕으로서의 농정이었던 것이다.

사림계열의 이같은 권농정책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가령 중종 13년 경상도감사로 있다가 체직되어 온 金安國의 건의에 따라,≪二倫行實≫등과 함께≪農書≫와≪蠶書≫의 諺解本도 “撰集廳에서 간행하여 널리 반포하라”는 국왕의 傳旨가 내려지기도 하였다.746)≪中宗實錄≫권 32, 중종 13년 4월 기사. 그리고 중종 14년(1519)에도 鄕約의 시행을 논의하면서, 이전에 내린 권농교서의 효력이 나타나지 않음을 개탄하고, 수령과 감사의 분발을 촉구하는 傳旨를 다시 내리기에 이르렀다.

근일에 8도가 失農하여 민생이 곤췌하니 憂慮됨이 망극하다. 이는 나의 自修가 미진하여 그러한 터이지만, 監司 또한 그 책무를 벗어날 수가 없다. 전에도 이미 下諭하여 農桑에 힘쓰도록 하였으나 오히려 힘쓰지 않고, 학교의 교화 또한 그 道를 다하지 않는다. 呂氏鄕約도 권면할 만한 것이다. 무릇 (賦斂을) 줄이는 일이 있더라도 다만 형식만 갖출 뿐 백성들은 알지도 못하게 하고 있으니, 모름지기 궁벽한 향촌 사람도 모두 恤民의 뜻을 알도록 할 것이다. 守令으로서도 삼가지 않고 貢獻을 빙자하여 濫徵하는 폐단이 어찌 없을 터인가. 혹시라도 이런 일이 있거든 즉시 啓罷해야 할 것이요, 만약 검찰하지도 않는다면 감사 역시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中宗實錄≫권 35, 중종 14년 4월 무진).

즉 사림계는 역시 왕정을 실현하고자 하는 교화정책의 일부로 권농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이같은 노력은 이 해말에 己卯士禍가 일어나면서 곧 중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사화의 여파가 가라앉고 다시 사림계열이 차차 등장한 중종 만년에 중국의 江南農法을 집대성한 거질의 농서인 王禎의≪農書≫를 간행하여 널리 활용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지만,747)≪中宗實錄≫권 101, 중종 38년 11월 을사·병오.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아직도 훈척세력이 정권의 핵심을 잡고 있었으며, 결과적인 일이지만 다시 한 번의 처참한 乙巳士禍를 뒤에 예비하고 있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16세기의 농서 간행은 훈척의 시대를 지나고서야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선조 14년(1581)에 가서야≪농사직설≫에≪금양잡록≫을 합쳐 이른바 내사본≪농사직설≫을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이 시기에는 농업기술 자체의 개량에 따라 한편으로는 이른바 低平·低濕地에서의 수전 개발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748) 李泰鎭,<16세기 沿海地域의 堰田 개발>(앞의 책).
―――,<15·6세기 低平·低濕地 開墾 동향>(≪國史館論叢≫2, 國史編纂委員會, 1989) 참조.
두 글에서는 16세기의 대대적 농지개간이 이 시기 인구의 증가와 상업의 발달이라는 사회경제적 요인에 따라 촉발된 현상이었다고 하는 매우 주목할 만한 이론이 제시되었다.
원래는 海島의 저습지에 설정되었던 국가 목장이 16세기에 이르러 권세가의 절수에 따라 대대적으로 개간되고 있었다는 사례가 그 하나이다. 내륙지역의 목장도 권세가에 의해 사실상 耕墾되어 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워낙 物力과 人力을 많이 소요하는 海澤의 경우도 훈척을 비롯한 세력가가 평안도 등 북변의 것까지 절수·개간하여 농장을 만들어 갔다.

下三道에는 海澤으로 자못 경작할 만한 곳이 있으면 다투어 築防하였으므로 남는 땅이 없어졌다. 그러므로 금후에는 평안도로 옮겨 개간하는데…朝官·宰相이 本道의 해택으로서 비옥한 곳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 곳 수령이 告辭하는 날에 힘써 요청하므로 수령 등이 農糧을 많이 대주고 또 伴人을 정해주어 耕墾케 하며 자기 等內에는 그들을 復戶시켜주고, 留鄕所로 하여금 監護까지 시킨다. 거기서 나는 곡식 수가 적으면 다시 官庫의 곡식을 실어다 그 수를 채우고, 배로 실어서 바로 그 집에까지 갖다 바친다.…농민은 해택 때문에 聊生할 수가 없다고 한다(≪明宗實錄≫권 16, 명종 9년 5월 경술).

16세기에는 위와 같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저평·저습지의 농지화라고 하는 경작지의 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 개간 주체가 훈척을 비롯한 권세가였으므로 비리의 국가권력을 통하여 많은 소농민을 동원하였고 이에 따라 이들의 소경영은 유린되었다. 그리고 講武場 같은 경우 매우 긴요한 것만을 제외하고는 농민들에게 경간을 허락한다는 정책이 이 시기 사림파 정권에 의해서도 채택되고 있었다.749)≪中宗實錄≫권 25, 중종 11년 7월 갑진.

그래서 이 시기에는 한편으로 水田農業에서 거대한 진전이 일어나고 하나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즉 권세가에 의한 지주지의 확대와 그 대극에서의 소농민경영의 분해현상이 크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상대적으로 소농민층의 안정을 도모하는 사림계의 권농정책이 추진되고 있었지만, 아직도 그 효과는 미미한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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