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5. 경제개혁의 추진
  • 2) 수리시설의 발달

2) 수리시설의 발달

이 시기에는 권세가를 중심으로 하는 목장·강무장·堰田·저습지의 개간 뿐 아니라, 내륙지역에서도 개간과 水利가 많이 진전되고 있었다. 가령 고려시대에는 주로 邑治 중심의 지역에 士族과 吏族의 생활지반이 있었으나, 고려 말기부터 그것과는 떨어진 향촌지역, 더욱이 인구가 적고 낙후되어 있던 部曲지역 등이 특히 신흥 사족들의 노력에 의하여 개발되어 그들의 농장이 되고 생활지반이 되어가고 있었다.750) 李樹健,<古文書를 통해 본 朝鮮朝 社會史의 一硏究>(≪韓國史學≫9,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7) 참조. 조선왕조 사림계열의 출자도 주로 여기서 찾아지는 것이었다.

사림계열의 성장과 관련지을 수 있는 매우 주목되는 농업현상의 하나는 전통적 수리시설인 제언 이외에 川防 즉 洑의 설치와 활용이 본격화하였다는 것이다. 천방灌漑에 관한 본격적 권장은 15세기 문종초에 왕이 각 도 감사에게 지시한 다음의 기사가 처음인 듯하다.

제언을 수축하는 법은 元·續六典에 다 실려 있고, 또한 지금 수령을 포폄할 때에도 천방·제언이 모두 七事 가운데 들어 있으니, 그 입법의 절목이 지극히 상밀하다. 그러나 제언은, 水源은 얕은데 功役이 많이 든다. 천방은 물에 源流가 있어 공역은 적게 들고 이로움이 많다. 그러므로 천방이 가장 좋고 제언은 그 다음이다. 듣건대 여러 읍에는 천방을 할 만한 곳이 자못 많은데도 물의 이로움을 잃고 있다 하니, 卿이 巡行하면서 널리 알아서 啓聞하라(≪文宗實錄≫권 4, 문종 즉위년 10월 계유).

조정에서의 본격적 논의는 문종대부터 시작되었지만, 작은 溪流를 부분적으로 막아 부근의 수전에 관개하는 소규모 천방의 경우는 아마도 고대로부터 관행되었을 것이며, 특히 15세기 이래 低平地로의 농지개간이 일어나게 된 데에는 이같은 천방의 가능성과 유용성이 전제되고 있었을 것이다. 가령 세조대의 어느 堤堰敬差官 事目에서는 제언 관계의 사정을 논의하면서, “방천의 利는 제언보다 갑절이나 되니, 지세의 높낮이를 따라 곡진하게 제방을 만들면 그 取用이 무궁하다”751)≪世祖實錄≫권 20, 세조 3년 12월 정미.고 상하가 공인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성종연간에 가서도 經筵에서 국왕이 “내가 듣건대 천방·제언은 이익이 있다 하므로 이미 여러 도에 타일러 修築토록 하였는데, 별도로 朝臣을 파견하여 살피고자 한다”고 하자, 同知事 金宗直은 “천방관개의 이익은 매우 큰 것이니 불가불 거행해야 합니다. 제언은 그 이익이 멀리 미치지 못하고 또한 봄·가을로 수축해야 하므로 농민들이 매우 괴로워하며 폐단 또한 많습니다”752)≪成宗實錄≫권 182, 성종 16년 8월 갑진.고 하는 정도로 천방의 상대적 효용성은 깊이 인식되고 있었다.

우리 나라의 역대 수리정책으로는 제언이 항상 중심적인 것으로 거론되어 왔으나, 15세기 후반으로부터는 천방이 보다 우위인 것으로 널리 공인되기에 이르렀다. 비록 관행상의 용례로는 흔히 ‘堤堰川防’으로 ‘제언’을 앞세워 사용하고는 있었으나 그 중요성으로 말하자면 ‘천방’이 이미 훨씬 우위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종래 사용하지 못하던 하천수를 끌어다 활용하는 것이므로 제언의 경우에 비하여 쓸 수 있는 곳을 훨씬 더 많이 개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사회 생산력의 발달에 따라 종래에는 생각할 수조차 없던 대규모 관개가 가능하였으므로 앞으로의 전망은 더욱 밝았다.

그래서 16세기 중종대의 사림정치가 선을 보이면서도 권농정책과 함께 천방관개의 일이 논의되었고, 성종대에 일시 설치되었다가 혁파된 堤堰司를 다시 설치하자는 합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753)≪中宗實錄≫권 25, 중종 11년 7월 경자·갑진·을사.

천방은 防川·防築·灌漑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렸고, 현지의 실정에 정통하며 이해관계가 절실한 현지인들에 의하여 추진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천방은 국가정책의 적극적 추진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15세기 이래 많이 개발된 저평지의 水田化와 함께 다수 축조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가령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15세기의 官撰 地理志에는 제언만이 기재되어 있으나, 16세기말에 郡守로 재임한 사림 鄭逑가 편찬한≪咸州誌≫에는 제언 이외에도 龍淵防築 등 14곳의 천방이 더 기재되어 있고, 17세기초에 成汝信이 편찬한≪晋陽誌≫에는 明月岩防川 등 25곳이 더 기재되어 있으니, 이는 곧 16세기에 새로이 개발된 천방관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논증된 바 있다.754) 李泰鎭,<16세기 川防(洑)灌漑의 발달>(앞의 책).

아마도 16세기 이후로는, 비록 지역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겠지만, 천방이 전통적인 제언을 압도하고 우리 나라 수리관개의 대종을 차지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16세기에는 각 군현 단위로 사림계열의 인사들이 향권을 주도하게 되었으며, 이들에 의하여 새로운 경지의 개발과 함께 각 지역의 천방이 새로운 수리시설로서 많이 축조되기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이해된다.

뿐만 아니라 천방은 이후 특히 우리 나라 벼농사 기술의 대종을 이루게 되는 移秧法을 정착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기초적 관개시설로서의 기능을 다하게 되었다는 의미에서도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컸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