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1. 왜란 전의 정세
  • 2) 일본의 국내정세

2) 일본의 국내정세

 16세기의 일본사회는 應仁·文明의 난(1467∼1477) 이후 약 100여 년간 하 극상의 동란기인 전국시대로 들어갔다. 종래의 室町幕府의 중신이었던 守護大名들이 약화 내지 소멸되고 戰國大名이라 불린 세력들이 등장하였다. 이들 전국대명들은 치열한 전투 속에서 승리하여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들이 거느린 소속 영토의 경영에 힘써 제방 구축·수로 부설·농토 개간 등을 추진하고, 家臣·營民들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규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전국대명들의 영주국 안에는 「城下町」이 형성되었다. 이곳은 전국대명들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자기의 영토를 지키는 곳인 동시에 정치와 상업의 중심지였다. 전국시대에는 여러 형태의 도시가 생겼으며 항구에는 무역항이 번성하게 되었다. 이 중 「사카이[堺]」는 그 대표적인 항구도시이며 또한, 자치·자유도시로서 국내상업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스페인상인을 상대로 남방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번영하였다. 또 전국시대에는 불교교단·농민·무사 등 여러 계층에 의한 「잇키(一揆)」가 각처에서 일어났다. 織田信長(오다 노부나가)과 풍신수길은 전국시대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자유도시 사카이와 잇키를 제압하여야 하였다.

 한편으로 포르투갈·스페인 등 서양세력의 동진에 따른 이들과의 무역과 서양문물의 전래가 일본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543년 포르투갈인이 種子 島에 내항한 후 서양인과의 활발한 접촉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들에 의해 鐵砲(鳥統)가 전래되었다. 당시의 일본은 전국의 혼란기였기 때문에 새로운 무기인 조총은 빠른 속도로 전국적으로 도급되었고, 활발히 수입되었으며 자체 생산도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전술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조총의 보급에 의해 종래와 같은 전문적인 전투집단보다는 조총으로 무장한 보병집단에 의한 전투가 중요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전환기를 만들어 준 것은 1575년 「長篠의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직전신장의 철포대는 그 무기의 위력을 크게 과시하여 기병을 주력부대로 한 상대방의 군사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조총의 보급은 축성술에도 변화를 가져와 종래처럼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城보다는, 보병부대의 전개에도 유리하고 교통이 편리한 평야와 인접한 조금 높은 언덕 위에 성을 쌓는 平山城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조총의 위력을 막기 위하여 성벽을 이중으로 하여, 그 사이에는 돌을 넣어 튼튼히 하였다. 그리고 대명의 가신들은 언제든지 명령에 따라 전투배치가 가능하도록 성의 주변에 거주할 의무가 지워져 있었다.

 천주교단의 예수회 전래도 또한 일본사회에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1549년 예수회의 프란시스코 자비에르(Francisco Xavier)는 포교의 허가를 얻고자 京 都에 도착하였으나 전쟁으로 인하여 포교하기 힘들어 山口縣에서 포교의 허가를 얻었다. 무장층의 신자가 늘어나고 경도와 그 근교에 교회당까지 건립하게 되었다. 구주지방의 대명들은 외국무역에 의한 이익의 획득에 큰 관심을 가지고 그들 영토 밑에 포르투갈 무역선을 유치하기 위해 예수회에 대해서도 호의 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불교도와의 충돌사건도 일어 났다. 이에 따라 선교사와 예수회 신자들이 점차 長崎로 옮겨 살게 됨으로써 장기는 항구도시인 동시에 천주교의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인 1587년 풍신수길이 선교사의 국외추방을 명하고 장기를 예수회의 수중으로부터 빼앗아 직할령으로 삼음으로써 예수회는 일본 내에서 세력이 약화되었다. 전국대명 중의 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은 독실한 천주교신자였고 조선침략군 중 약 2천명의 장병이 영세교인이었다.003) 박철,≪세스뻬데스≫(西江大 出版部, 1987), 49∼50쪽.

 이상과 같은 변화 속에서 전국시대의 통일은 직전신장에 의하여 추진되어 풍신수길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직전신장은 1568년 반대세력들을 물리치는 한편 경도에 입성하여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畿內의 반대세력을 정복하고 자유도시인 사카이를 굴복시키는 한편 여러 영주국의 關所를 폐지하고 도로를 정비하는 등 상업을 진흥시켰다. 그러나 직전신장이 1582년 살해당하자 풍신수길이 그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면서, 3만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大阪城을 쌓고 통일사업 추진을 위한 본거지로 삼았다. 그리고 관동의 대명 德川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과 화평을 맺는 한편 천황에게 접근하여 1585년 7월 백관을 통솔하고 국정을 총괄하는 關白이 되어 1587년 구주정벌을 끝내고 그 여세를 몰아 국내통일 사업을 완수해 나갔다.

 이같은 전쟁 수행과정에서 결코 富商의 협력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들은 군수물자의 보급과 수송을 담당하였다. 특히 풍신수길은 堺·博多·長崎 등지의 무역항을 직할지로 삼아 경영하였기 때문에 군자금도 윤택하였다. 한편 풍신수길은 정권의 기반인 토지와 농민을 일원적으로 파악하기 위하여 전국에 걸쳐 檢地를 실시하였다. 이 검지사업은 정비된 통일기준에 따라 1582년부터 시작되어 풍신수길이 죽을 때까지 16년간 계속되었다. 그리고 檢地帳에 作人으로 등록된 자는 경지의 보유권이 보장되었지만 반면 토지에 속박되어 직업의 자유를 박탈당하였다. 그러면서도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반항하는 것을 사전에 억제하기 위하여 1587년 그들로부터 칼·창·활·총 등의 무기를 거두어들이는 「刀狩令」을 발표하였다. 더욱이 1591년에는 小田原征伐이 끝난 것을 계기로 이후 백성들이 전토를 버리고 상업이나 임대업에 종사하는 것을 금하고 侍人·仲間·奉公人이 새로 백성이나 町人이 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 때문에 도시에 유입된 백성들은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신분규정과 함께 전국적으로 호구조사를 단행하여 家數人數臺帳도 제출하게 했다. 이것은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정책이기도 하였으나, 임진왜란을 앞두고 군대·인부의 징발 등의 동원계획에 필요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풍신수길은 전국의 통일이 끝나자 구상중이었던 대륙의 침략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의 원인론에 대해 많은 연구가 있으나,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조선에서는 물론이며 일본의 유학자들도 풍신수길이 「명분없는 전쟁」을 도발하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일본학자들 사이에서도 임진왜란의 원인으로 풍신수길의 개인적인 공명심과 영웅심, 대명무역 확대, 해외 발전 또는 봉건영주들의 세력 약화를 위한 것 등을 들고 있다. 일본의 소설가인 司馬遼太郎은 그 이유를 경제에서 구하려고 해도 구름잡는 것과 같고, 정치적으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으로 “풍신수길의 정권은 겨우 10년이었으나 그는 일본 역사상 유례없는 독재자가 되었다. 여러 봉건영주를 복속시킨 후 그의 권력은 무제한의 宙空에 떠서 무중력적 기분이 되어 망상세계의 병자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라고 하였다.004)≪文藝春秋≫68-11(東京;1990. 10), 77∼79쪽. 이는 역사가가 아닌 작가로서 흥미로운 분석이기도 하다.

 풍신수길은 임란 6년 전, 1백여 년간 군웅이 서로 할거하던 일본의 진국 시대를 통일하는 과정 중에서 소위 「大唐入」을 호언했다고 한다. 풍신수길은 미천한 출신이었으나 그가 일본의 최고권자에 오른 다음에는 일본에서 가장 고귀한 왕족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풍신수길은 조선의 사정 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중국의 山海關이나 만리장성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자였다. 그렇다고 임란의 원인을 풍신수길의 개인적 심리에만 돌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나 그의 조선침략에 대해서 후세의 역사가로서도 이해가 안되는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풍신수길의 소위 대명정벌을 위한 전쟁준비는 선조 19년(1586) 포르투갈 선교사 가스파르 고에리오(Gaspar Coello)에게 군함 2척을 주문한 것으로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직전신장도 외국원정을 말한 적이 있고, 풍신수길도 그 이전에 이와 유사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국내를 완전히 통일하지 못한 때라 구체적 복안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선조 20년 구주지방 토벌중에 대마도주 宗義調와 宗義智 부자를 불러 명 원정의 계획을 말하였다. 조선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대마도주는 2백여 년간 조선왕조의 무상원조인 歲賜米와 무역의 이익을 얻었기 때문에 내심 놀라면서 그 해결을 모색하기 위하여 선조 20년부터 해마다 조선에 3차례 사신을 파견하였다. 또 그는 조선왕을 일본에 오도록 하라는 풍신수길의 명령을 받았지만 조선에 와서는 통신사의 파견만을 간청하였다. 결국 조선은 선조 22년 9월에 통신사로 정사 黃允吉과 부사 金誠一을 파견하였다.

 풍신수길이 조선통신사를 만난 선조 23년은 일본 전국 66국을 완전히 통일 한 이후라, 그는 오만불손하였다. 그는 인도와 필리핀에 사신을 보냈는데, 필리핀총독에게 보낸 서간에서‘천하가 내 손안에 들어왔는데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정벌할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풍신수길은 조선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유력한 봉건영주 소서행장의 딸 마리아(천주교 영세명)를 종의지에게 시집보냈다. 종의지는 장인 소서행장에게 왜군이 쉽게 조선에 침입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지식과 정확한 정보를 주었으며 자신도 선봉대에 참가하기를 자원했다. 이러한 보고가 풍신수길에게 전해지자 풍신수길은 몹시 기뻐하였고 소서행장에게 선봉장의 명예를 주었다.

 이후 풍신수길은 관백의 지위를 조카인 秀次(히데츠구)에게 물려주고 조선침략에 몰두한 것 같다. 선조 24년(1591) 8월에 이르러 풍신수길은 조선침략을 위한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러자 일본은 전국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봉건영주들 중에는 내심 반대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영토를 몰수당하든가 처형될까 두려워 직언할 수가 없었다. 일본에 체재 중이던 포르투갈 신부 프로이스(Luis Frois)는 이 때의 상황을‘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쥐가 없었다’는 우화에 비교하였다. 풍신수길은 교활한 정치가였다. 반대하는 자를 단호히 처단하는 한편 일본인의 마음이 집단적으로 스스로 변화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 이를 교묘히 이용하였다. 즉 이제까지 멀리하였던 자들을 가까이 불러들여 은총을 베풀고 높은 자리에 앉혀 반대세력을 억압하였던 것이다. 또 富士山 아래에서 봉건영주들을 모아 큰 수렵잔치를 베풀어 2,500마리의 큰 새를 잡아 금박을 한 긴 대나무 꼬치에 꽂아 행렬함으로써 일본 역사상 최대의 성사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또 일본의 최고급 무장에게 사냥개의 고삐를 잡고 걷게 하여 신분이 높고 권세있는 자라 하여도 자기 앞에서는 천직을 맡을 수밖에 없다고 자신을 과시하였다. 이후부터 조선침략에 반대하던 봉건영주들도 절대 충성을 다짐하였다. 이리하여 일본은 전쟁의 광기에 휘말려갔다.005) 松田毅一·川崎桃太 譯,≪フロイス日本史≫(中央公論社, 1981), 195∼202쪽.

 풍신수길은 1591년 정월 전국에 걸쳐 군량·병선·군역의 수를 할당하였으며 구주의 한 촌락이었던 名護屋에 행영본부를 축성하여 조선침략의 전진기지로 만들었다.006) 中村質 等編,≪文祿·慶長の役城跡圖集≫(佐賀縣敎育委員會, 1985) 참조. 그리고 8월 23일에는 조선침공의 날짜를 다음해 3월 1일로 결정하였다. 다음해인 1592년 정월에는 일단 수륙침공군의 군대편성을 마치고 다시 3월에 재편하였다. 이를 살펴보면 육병은 침공군인 1번대에서 9번대까지 총 158,700명이고, 명호옥을 비롯한 일본국내 잔류병력은 118,300여 명 이었다. 그리고 이 중에서도 선봉대로서 최전선에 투입된 병력은 小西行長을 주장으로 하는 1번대의 18,700명, 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이 주장인 2번대의 22,800명과 黑田長政(구로다 나가마사)의 3번대 11,000명 등 52,500명이 었다. 그리고 九鬼嘉隆(구키 요시다카)·脇坂安治(와키자카 야스하루)·加藤嘉明 (가토 요시아키라)·藤堂高虎(도토 다카도라) 등의 수군장이 별도로 수군을 편성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각 대명들은 할당된 병사를 충당할 수 없어서 실제 군사는 이에 미치지 못했다. 침략군은 치밀한 침공계획하에 침공 중계지인 대마도로 속속 집결하여 풍신수길의‘渡海 중에는 한 필의 군마도 손실하여서는 안된다’는 엄명에 따라 침공의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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