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2. 왜란의 발발과 경과
  • 2) 의병의 봉기

2) 의병의 봉기

 임진란의 초기에 관군이 일본군과의 전쟁에서 연전연패를 당하니 조정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백성들의 불안감은 극도에 달했다. 일본군의 침략에 대한 공포감은 유언비어를 난무하게 만들었고 백성들은 자기 향토에 일본군의 침입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산속으로 피란하기도 하는 소동을 일으켰다. 조정이 무능하고 관군이 무력함에 백성들의 동요는 당연하다 할 것이다.

 이러한 소동이 일고 있을 때 향토에 침입한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또는 향토에 침입하려는 일본군을 막고 나아가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각 지방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의병의 봉기에 대하여≪宣祖修正實錄≫은 그 실정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각 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 때에 3도(충청·전라·경상) 兵使들은 모두 인심을 잃고 있었다. 때문에 왜란이 일어난 뒤에 병량을 독촉하니 사람들은 모두 질시하여 왜적을 만나면 피신하였다. 마침내 도내의 거족으로 명망있는 사람과 유생 등이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의를 부르짖고 일어나니, 소문을 들은 자는 격동하여 인근에서 이에 응모하였다.… 흩어진 인심과 국가의 명맥은 이에 힘입어 유지되었다(≪宣祖修正實錄≫권 26, 선조 25년 6월).

 이 기록은 임진란 초기 의병이 일어날 때의 전반적인 상황과 의병장의 성분 그리고 민중의 동태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다. 그 때에 일부 용감한 수령은 적은 병력으로 굳세게 저항하였으나 대부분의 수령들은 성을 버리고 도주하거나 싸우려고 하지 않아 스스로 무너져버렸다. 이는 국가기강이 문란하여 군대라기 보다는 오합지중에 가까운 질서없는 무리였다. 그 위에 인심이 떠나 있어 관리를 신뢰하고 협조하기보다 오히려 반관적인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으므로 수령들은 신변에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관군이 무너짐에 따라 지방에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던 거족이나 명망가는 지위의 위협을 받았을 뿐 아니라 직접 그들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위기를 목전에 느꼈다. 이러한 위기감에서 지방의 거족·명망가는 산중에 피란중인 농민을 위시하여 천민에 이르기까지 의병진에의 참가를 호소하였고 이러한 의병의 부르짖음에 민중들은 자진하여 참가하였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모든 의병들이 조정의 명령을 받고 일어난 것 같이 기술하고 있으나 관군도 조정의 명령에 잘 따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의병 장이나 의병들이 조정의 명령에 의하여 봉기하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경상도에서는 일본군의 직접적인 침략하에 있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전라도와 충청도 등지에서는 조정의 명령에 따라서 의병이 조직되기도 하였으나 거의 자발적인 의병의 봉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 이후 부대를 3대로 나누고 목표를 한양으로 정하 여 각기 간선도로를 따라 급히 북상하였다. 그들은 후방의 요충지에 소수의 병력만 남긴 이른바 선과 점의 점령이었기 때들에 그들의 점령지라 할지라도 군세는 주둔지에 한정되었다. 일본군의 침략을 당한 경상도나 충청도일지라도 대부분의 지역은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더욱 전라도는 침략을 면하였기 때문에 의병의 봉기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았다.

 당시에 경상도는 일본군의 침략을 받자 거의 저항도 하지 앉은 채 성을 버리고 도주하는 수령이 속출했고 백성들은 모두 깊은 산에 피란하여 숨어 지내고 있었다. 조정에서 근왕병의 召募令이나 지방관의 징발령이 있었으나 이미 관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백성들은 이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백성들은 난이 일어나기 이전 지방수령의 학정을 경험하였기에 오히려 이 기회에 지방관에 보복을 가하려는 분위기까지 나타나기도 하였다.

 또 전라도에서는 직접적인 일본군의 침략은 없었으나 경상도에서 대량의 피란민이 유입됨에 따라 사회적인 혼란이 야기되었고, 관의 계속적인 징병과 군량의 독촉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전라도에서는 관의 위령이 어느 정도 시행되어 전라도관찰사 李洸은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서울방어를 위한 군대를 동원하여 북상하였다. 그러나 왕이 서천하였다는 소식을 공주에서 듣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조정에서는 이러한 이광의 독단적인 처사를 엄중히 문책하고 시급히 관군을 동원하여 일본군을 격퇴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이광이 이끄는 전라도 군을 주력으로 하고 경상도순찰사 김수의 명목상의 군대와 충청도순찰사 尹國馨이 합세한 3도의 연합군이 行在所를 향하여 북진하였다. 이 연합군은 수만에 이르는 대군이었으나 지휘하는 순찰사는 모두 무능하였고, 대부분의 병사는 오합지졸이었으며 사기도 말이 아니었다. 이광의 전라도군은 용인에 이르러 소수의 적을 공격하다가 오히려 그들의 역습을 받아 스스로 무너지고 막대한 군수품만 상실하였다.

 3도의 관군이 무너지자 조정에서는 招諭使를 각 지방에 파견하여 관군의 재건을 위한 근왕병의 궐기를 외쳤으나 백성들은 이에 호응하지 않았고 서민이나 천민 중 일부는 관권에 반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반항은 왕이 서울을 버렸다는 충격적인 사실에서 이제 국가는 망할 것이라는 생각에 연유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영남에서 郭再祐가 4월 22일에 의병을 일으키자 金沔·鄭仁弘 등이 뒤를 이이 의병을 규합했고, 이와 거의 동시에 호남에서는 김천일·高敬命 등이, 호서에서는 趙憲 등이 각각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의 대부분은 전직관료이거나 유생이며 이들이 근왕창 의를 부르짖고 궐기하면 그들과 뜻을 같이하는 민중이 스스로 모여들어 의병진을 형성하였다. 이들 의병장은 단독으로 전투를 수행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소수의 의병집단은 보다 명망있는 의병집단에 통합되어 대부대의 의병군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의병의 궐기를 창도한 의병장과 이에 호응한 의병들 사이에는 정치적인 입장이나 사회적인 신분 그리고 경제적인 이해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을 한덩어리로 뭉치게 하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의병장은 대부분 양반 중에서도 문반출신이며, 전직관료라 할지라도 야인으로 있었고, 지방의 거족인 이들이 평소에 배운 것은 유교의 도의적 교훈을 실천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이 유교에 연유한 도의적 교훈인 근왕정신은 지방의 유력층인 유생 들 사이에 팽배하였고 이들은 지방의 수령과 무장들의 무능과 비겁함에 격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병의 궐기는 향토와 동족의 방어를 위한 것이었고 더 나아가 일본의 야만성에 대한 민족감정의 발로였다. 유교적 윤리를 철저한 사회적 규범으로 하고 있었던 조선은 고려말부터 왜구의 계속적인 약탈행위로 인하여 일본인을 침략자로 여겼으며 문화적으로 멸시하여 「왜」 또는 「섬오랑캐」라고 불렀다. 이러한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받아 민족적 저항운동으로 일어난 것이 의병의 봉기였다.015) 崔氷禧,<日本의 侵寇>(≪한국사≫12, 국사편찬위원회, 1977), 295쪽. 의병의 바탕을 이룬 것은 민족의 저항정신이며 이를 촉발시키고 조직화시킨 것이 각 지방의 의병장이었다. 그들은 각 지방에서 사회의 상층부에 있으면서 정신적일 지도층이었고 경제적으로는 중·소지주 층으로 농민과는 토지를 매개로 유기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군의 향토 침입은 바로 그들의 사회적·경제적 토대를 무너뜨리는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한편 일반 민중들은 관권에 의한 강제징집으로 무능한 장군의 지휘를 받아 전국의 전선을 전전하며 싸우기 보다는 평소 잘 알고 신뢰할 수 있는 의병장이 휘하에서 싸우기를 바랐던 것이며 향토 주변에서 부모와 처자를 보호하기에는 관군보다 의병으로 가는 것이 유리하였다. 조정에서도 의병의 봉기를 촉구하기 위하여 의병을 공적인 군대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일반 민중의 의병진 참가는 줄을 잇게 되었다.

 각 지방의 의병봉기에 직·간접으로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 수군의 연전연승이었다. 임진란 초기에 경상도 좌우수영의 수군은 일본군에 단 한번의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스스로 무너져버렸다. 일본 수군은 그들 육군의 북상에 호응하여 남해에서 서해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라좌·우수영의 수군은 남해안에서 일본 수군을 쳐부수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들이 침략의 거점으로 삼고 있었던 부산까지 작전범위를 넓혀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본군은 보충병력으로 군수품의 수송에 지장을 초래하여 그들의 사기는 점차 저하되어 갔다.

 의병을 널리 일어나게 한 것은 또한 조정의 의병장에 대한 직첩의 부여였 다. 임진란 직후 조정에서는 관군의 모병을 위하여 각 도에 선전관이나 안집사를 파견하여 모병에 노력하였으나 그 성과가 미미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자발적인 의병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이들을 격려하고 의병집단을 공적인 군대로 인정하였다. 이러한 조치가 취해진 것은 5월 말 또는 6월 초로 보여진다.016)≪宣祖修正實錄≫권 26, 선조 25년 5월.

 이 소모의병에는 왕세자의 힘이 컸다. 7월에 세자가 친히 쓴 글이 의병장 김천일에게 전달되고 이어 의병의 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이 각 도에 전달되었다. 또 도원수 김명원이 이와 같은 조정의 뜻에 호응하여 각 도의 의병장에게 관군과 합심하여 일본군을 무찌르자는 격문을 보냈다. 이러한 分朝와 도원수가 취한 일련의 조치로 의병은 공적인 군대로 인정되어 관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그리고 특히 관군과 의병간에 알력이 심했던 경상도에서 경상도 초유사 金誠一은 관군과 의병간의 알력을 조절할 수 있었고 일본군 격퇴를 위하여 공동전선을 형성시키기도 하였다.

 소모의병은 의병봉기에 중대한 계기를 이루었다. 문치를 이념으로 하고 관료에 의한 통치를 시행하고 있었던 조선왕조에서 개인이 사병을 모집한다는 행위는 이유가 어디에 있든지 반역에 해당되며 위정자가 가장 위험한 행동으로 여기는 것이었다.

 처음 곽재우가 의병을 규합하고 있을 때 합천군수 田見龍이 곽재우를 역적으로 조정에 보고하고 의병에 참가한 자를 흩어지게 한 것은 관군과 의병간의 불화 등에도 원인이 있었으나 아무리 전시라 할지라도 사병을 모집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통념에서 비롯되었다. 호남에서도 김천일과 고경명이 의병을 규합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문제가 고려되어 유명무실하기는 하지만 관군이 있었으므로 의병의 봉기를 주저하였던 것이다. 특히 호남지방에서는 이른바 鄭汝立謀叛事件이 해결되지 않은 시점에서 의병의 봉기는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고경명이 전라도순찰사인 이광의 2차에 걸친 징모령에 전적으로 협조하였던 일은 이러한 문제와 무관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이를 헤아려 신속히 정여립모반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사면령을 내려 이 사건을 마무리한 것도 하나의 커다란 장애를 없애는 적절한 조치였다.

 그 위에 조정에서는 각처의 의병장에게 이례적인 벼슬과 상을 내려 의병을 고무하였다. 의병장의 대부분은 전직관료이거나 아직 벼슬을 하지 못한 유생과 서얼이었다. 그들이 희구해 온 것은 관직의 획득이었으므로 조정에서 의병장에게 관직을 부여한 것은 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다음의<표 1>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017) 金錫禧,<壬辰倭亂의 義兵運動에 關한 一考>(≪鄕土서울≫15, 1962), 125∼127쪽에서 전재하였다.
임진왜란 중에 활동한 의병장을 정확히 밝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표 1>에서 누락된 의병장의 대강을 소거하면 다음과 같다. 창령 成安義, 자인 崔文炳, 경산 崔大期, 달성 徐思遠, 의흥 洪天寶, 하양 申海, 대구 蔡先修, 흥해 鄭三畏, 영해 白仁境, 안동 柳復起, 상주 金覺·趙靖·李埈, 영일 金淸修, 전주 李廷鸞, 광주 金德齡·金德弘, 연안 李廷龍 등을 들 수 있고 이외의 의병장에 대해서는 李樹健,<南冥學派 義兵活勳의 歷史的 意義>(≪南冥學硏究≫2, 慶尙大 南冥學硏究祈, 1992), 15∼16쪽 참조.

봉 기 장 소 이 름 신 분 봉 기 장 소 이 름 신 분
영남(宜寧)
〃 (永川)
〃 ( 〃 )
〃 ( 〃 )
영남(三嘉)
〃 (宜寧)
〃 ( 〃 )
〃 (三嘉)
〃 ( 〃 )
〃 ( 〃 )
〃 (丹城)
〃 ( 〃 )
〃 (昌寧)
〃 (靈山)
〃 ( 〃 )
〃 (宜寧)
〃 (安東)
〃 (尙州)
〃 (金山)
〃 ( )
〃 ( )
〃 (安東)
〃 ( 〃 )
〃 ( 〃 )
〃 ( 〃 )
〃 ( 〃 )
〃 ( 〃 )
〃 (禮安)
〃 (   )
호남(光州)
〃 ( 〃 )
〃 (羅州)
〃 (玉果)
〃 (南原)
〃 ( 〃 )
〃 ( 〃 )
〃 (順天)
〃 (靈光)
〃 (泰仁)
郭再祐
權應銖
鄭大任
權世雅
朴 惺
郭 逡
郭 迫
尹 念
朴思濟
尹 鐸
權世春
權 春
辛邦楫
辛 
成天禧
郭 走昔
任 屹
鄭經世
呂大老
柳思敬
朴宗挺
禹性傳
金允明
裵龍吉
安 賓
金 涌
辛 敬
金 垓
李 魯
高敬命
高從厚
金千鎰
柳彭老
安大模
梁大樸
邊士貞
姜希說
任希進
閔汝雲
유학
전훈련봉사
유생
진사
전좌랑
전군수
생원
훈련봉사
학유
전참봉
생원
전목사
생원
유생
충의위
유학
생원
전봉사
박사
생원
진사
전사성
생원
생원
봉사
전검열
진사
전한림
전직장
전부사
현령
전부사
전학유
유학
전학관
전참봉
무사
첨정
전주부
영남(咸安)
〃 (陜川)
〃 ( 〃 )
〃 (居昌)
호남(寶城)
〃 (  )
〃 (和順)
〃 ( 〃 )
〃 (南原)
〃 ( 〃 )
〃 ( 〃 )
〃 (靈光)
〃 (海南)
호서(內浦)
〃  
〃  
〃  
〃 (沃川)
〃 (永同)
〃  
〃  
〃 (洪州)
〃 ( 〃 )
경기   
〃     
〃     
〃 (江華)
〃  
〃 (朔寧)
〃  
해서(海州)
〃 (鳳山)
관서(江東)
관북(鏡城)
영남(尙州)
관서   
관동   
호남   
해서   
權宗道
孫仁甲
鄭仁弘
金 沔
任啓英
朴光前
崔慶會
崔慶長
楊士衡
梁 樹
金得池
沈友信
成天祗
沈守慶
金弘敏
申 湛
趙 雄
趙 憲
韓明胤
洪季男
朴春茂
申蘭秀
張德蓋
李 軼
南彦經
兪大進
禹性傳
元 挺
金 績
李山輝
趙光庭
金萬壽
曺好益
鄭文孚
趙 靖
休 靜
惟 政
處 英
靈 圭
전현감
전첨사
전장령
전좌랑
전현감
전현감
전부사
전제독관
전현감
참봉
진사
전첨정
전판관
전대신
전목사
전참의
충의위
전제독관
현감
서얼
전찰방


충의위
전목사
전좌랑
전사간
진사
전부사
유생
생원
무사
생원
북평사
승려
승려
승려
승려
승려

<표 1>의병의 봉기

 이 모든 의병장들은 전직관료라 하더라도 호서의 沈守慶을 제외하고는 고급 관료는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바랐던 것이 현직에의 복귀나 보다 높은 관직의 획득이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의병장에 국한된 일이 아니고 농민이나 천민에 있어서도 그들이 처해 있는 현재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비변사에서도 민심의 안정이나 국가멸망의 위기감에서 의병의 역할이 관군보다 크다고 보고 의병을 권장하는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리하여 의병장에게는 벼슬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권한을 부여하였다. 의병이 작전을 위하여 이동하는 경우에는 국가에서 군기와 군량을 공급했고 저명한 의병장에게는 수령과 동등한 대우를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의병장은 지방에서 수령에 못지않은 위엄과 권위를 갖게 되었다. 그러기에 전라도 의병장인 고경명의 의병군에는 수령이나 무장이 그 휘하에 들어가기도 했고 관군과 의병군의 협동작전이 별로 잡음이 없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임진란이 일어난 이듬해 정월 명나라에 통보한 전국의 관군과 의병의 주둔지와 병력수는 다음의<표 2>와 같다.018) 李烱錫, 앞의 책, 176∼177쪽에서 전재하였다.

주 둔 지 관 직 명 성 명 주둔병력
경상도 울산군
창령현
안동부
영산현
진 주
합천군
창원부
의령현
거창현
경상좌도절도사
의병장
경상좌도순찰사
의병장
경상우도순찰사
의병장
경상우도절도사
의병장
의병장
朴 晋
*成安義
韓孝純
*辛 
金誠一
*鄭仁弘
金時敏
*郭再禑
*金 沔
25,000
1,000
10,000
1,000
15,000
3,000
15,000
2,000
5,000
합 계 77,000 명
전라도 순천부

각처분둔
전라좌도수사
전라우도수사
예비군
李舜臣
李億祺
5,000(수군)
10,000(수군)
10,000
합 계 25,000 명
경기도 직산현
평택현

안성군
수원부
강화부



양 주
양근군
여 주
충청도절도사
각장 수백 명
의병 수백 명
경기도조방장
전라도순찰사
경기도순찰사
창의사
의병장
전라도절도사
경기도방어사
의병장
경기도순찰사
李 沃

*   
洪季男
權 慓
權 徵
*金千鎰
*禹性傳
崔 遠
高彦伯
*李 軼
成 泳
2,800
3,000
합약 5,000
300
4,000
400
3,000
2,000
4,000
2,000
600
3,000
합 계 30,100 명
강원도 인제현 강원도순찰사 姜 紳 2,000 명
황해도 황 주
재령군
연안부
황해도좌방어사
황해도우방어사
황해도순찰사
李時言
*金敬老
李廷馣
1,800
3,000
4,000
합 계 8,800 명
함경도 함흥부
경성부
안변부
함경도절도사
함경도평사
함경도조방장
함경도별장
成允文 *鄭文孚
金信元
金友고
5,000
5,000
100
100
합 계 10,200 명
평안도 순안현

동 법흥사





용강현



대동강
하 류
평안도절도사

평안도좌방어사


의병장

소모관
평안도우방어사

평안도조방장

주사장
李 鎰

鄭希賢


*李 柱

曺好益
金應瑞

李思命

金億秋
4,400
(내사수 1280)
2,000
(내사수 223)
(포수 50)
300
(내사수 300)
300
7,000
(내사수 770)
1,000
(내사수 90)
300
(내사수 120)
합 계 15,300 명
전 국 軍 馬 합 계 172,400 명

<표 2>

*는 의병

 앞의 표에 의하면 총 병력수는 168,400명이고 이 중 의병의 수는 27,900명 이다. 그런데 이 통계는 전시의 악조건하에서 작성되었기 때문에 정확성을 의심케 한다. 우선 부대의 편성단위가 1백 명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 등재된 의병장은 지명도가 높으며 일본군과 전투를 경험한 부대라고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한 느낌을 짙게 한다. 조정에서는 각처에 봉기하여 향토를 지키고 있는 많은 의병들을 이 보고에서 제외시켰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의병장들은 그들의 일신을 국가에 바치려 하였고 그들이 소유한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아 의병의 규합에 필요한 병기의 제조나 군량에 충당하였던 것이다. 의병부대가 소규모였던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으나 병기와 군량의 확보가 어려웠던 것도 그 한가지였다.

 의병의 전략이나 전술은 고경명과 같이 대부대로 정규전을 펼치는 경우가 있었으나 이는 예외에 속하고 일반적으로 지리와 지세를 이용한 유격전을 펼쳤다. 이는 의병군의 희생을 최소화하고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후방을 교란하여 전의를 상실케 하는 데 효과가 있었다.

 곽재우는 일본군이 침구한 지 13일 뒤인 4월 27일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沈大升을 비롯한 용사 50여 명과 함께 생사를 같이 할 뜻을 맹세하였다. 그는 의령현과 草溪郡의 창고에 있는 곡식과 岐江에 내버린 배와 稅米를 모아 의병의 보급에 충당하였다. 곽재우는 스스로 「天降紅衣大將軍」이라 칭하였으며 적이 많고 적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곽재우의 기병을 계기로 의병장 김면이 거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知禮縣과 금산현 방면의 적을 막고 있었다. 정인홍은 거창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고령현과 합천군 방면의 적을 견제하고 곽재우는 의령현에 웅거하면서 이들과 호응하여 남강과 낙동강의 요지를 지키고 있었다. 이 때 일본군은 창원으로부터 함안군에 들어와 의령의 鼎津에서 강을 건너오고자 하여 곽재우군과 강을 사이에 두고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곽재우의 의병군은 정진의 언덕 뒤에 군을 잠복시켰다가 강을 건너는 적을 습격하였고, 이에 견디지 못하고 달아나는 적을 추격해 1백여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가 있은 후 적은 감히 정진 근처에 접근하지 못했다. 이에 경상우도초유사 김성일이 三嘉縣의 군사까지 곽재우의 지휘하에 두게 하였으므로 곽재우는 尹鐸을 대장으로 吳濡를 소모관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곽재 우의 군세가 크게 떨쳐 남강과 낙동강의 요해처 10여 곳에 복병을 두어 상호 연락케 하였으므로 마침내 의령·삼가·합천 등의 여러 고을이 일본군의 유린을 면하게 되었다.

 곽재우군은 또 낙동강 좌편과 鼎湖 우편의 강기슭을 따라 상·하 50∼60리 사이에 감시소를 설치하고 적의 동정에 관한 정보를 얻어 그들을 공격하거나 또는 유인하여 섬멸하는 등 적이 감히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었다. 특히 기강의 싸움에서는 배에 타고 있던 적을 쏘아 죽인 자가 헤아릴 수 없었으며 참수한 적의 머리수만도 60구에 이르렀다. 이러한 곽재우 의병군의 전력과 선전을 뒷받침하였던 것이 거창의 의병장 김면과 합천의 의병장 정인홍이었다.

 또한 단성현에서는 權世春이 군사 5백여 명을 모았고 진주에서는 許國柱가 6백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였다. 연이어 草溪郡에서는 全致遠·李大期가 의병을 일으켜 沙漠·黃江의 적을 물리쳐 그들의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등 여러 고을의 의병은 서로 성원하고 있었다.

 한편 호남지방에서는 전라도순찰사인 이광의 2차에 걸친 북상군이 스스로 무너지기 전에 광주와 나주지방에서는 고경명과 김천일 등이 중심이 되어 의병규합에 대해 논의하였고, 남원·淳昌 등에서는 梁大樸·楊士衡·柳彭老 등을 중심으로 의병봉기에 대한 계획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김천일은 5월 16일 榮山璹·梁山龍 등과 함께 나주에서 기병하였다. 김천 일이 의병을 규합하자 나주와 인근지역에서 의병 3백여 명이 자진 참가하였 고, 이 의병군이 행재소를 향하여 북상하는 중에 그 수는 7백여 명으로 불어 났다. 비록 무기의 질은 관군보다 나빴지만 여태까지 전라도 관군이 행군하는 중에 도망병이 속출했고 군의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던 것과 달리 의병군의 사기는 왕성하였다.

 김천일의 의병군이 행재소를 향하여 북상한 후 전라좌도의 의병군이 형성되었다. 광주의 고경명과 남원의 양대박을 연결시켜 6천여 명의 의병군단을 이루게 한 것은 유팽로의 역할이 적지 앉았다. 유팽로는 한성에서 귀향하는 도중 순창읍에 이르렀을 때 시중의 부랑배가 소동을 일으키려는 것을 보고 그들 을 회유하여 의병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부랑배를 이끌고 전투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들을 옥과에 주둔시킨다. 유팽로는 이곳에서 각지의 수령에게 창의격문을 보내 의군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그는 同福의 丁巖壽, 화순의 崔慶會, 광주의 金德齡을 차례로 순방하여 의병문제를 상의했고, 남원에서 창의소를 설치하여 의병을 모집중인 양대박을 찾았다. 양대박과 유팽로는 고경명과 연락하여 의병군을 결성하기로 하고 潭陽에서 6월 3일 모이기로 하였다.

 담양에 모인 의병은 6천여 명에 이르렀고 고경명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 의병부대는 군대 편제를 마친 뒤 6월 11일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고경명의 의병군이 태인·금구를 거쳐 전주에 이르렀을 때 임진강의 방어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중의 동요가 있었다. 이 때 의병군의 군세를 더욱 증가시킬 필요가 있어 양대박을 모병책임자로 정했다.

 양대박은 스스로 추가모병을 자원하여 둘째 아들 亨遇와 함께 전주로부터 남인·순창·任實 등을 순회하면서 6월 24일까지 의병 약 1천여 명을 규합 하여 임실의 葛潭驛에 진군하였다. 양대박의 의병부대는 雲巖 長谷里에 진을 치고 있던 일본군을 기습공격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 운암전투는 전라도 의병이 처음으로 일본군과 벌인 전투였고 승리에 자신감을 갖게 하는 중요한 일전이었다.

 전주에서 고경명군이 북상하고 있을 때 黃澗에 있던 일본군이 錦山을 침범하였다. 이에 고경명군은 珍山에서 부대를 재편성하고 호서의병장 조헌에게 두 의병군이 합세하여 적을 토벌하자는 서신을 보냈다. 또한 이미 連山에서 전라방어사 郭嶸과 금산의 적을 함께 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므로 고경명군은 7월 9일 금산성 밖 10리에 진을 쳤다.

 당시 일본군은 小早川隆景(고바야카와 다카가게)의 별군인 安國寺惠瓊(안고구치 에케이)이 전라도 공략의 임무를 띠고 창원에서 남원을 거쳐 전주에 침입하려 했으나 곽재우의 의병군에 의해 진로를 저지당하자 방향을 바꾸어 星州로 가고 있었다. 한성에 있던 소조천융경군은 이 소식을 듣고 한성을 떠나 한 부대는 지례와 거창을 치고 또 한 부대는 황간과 順陽을 거쳐 茂朱에 침입한 다음 이어 금산에 침입하였다. 이 때 금산을 지키고 있었던 군수 權悰은 선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이리하여 금산에 있던 왜장 안국사혜경은 전주를 공략하려고 熊峙에 이르렀다가 金堤군수 鄭湛·해남현감 邊應井 그리고 의병장 黃璞 등의 굳센 저항을 받았다. 이 전투는 7월 7일에 시작되어 8일까지 계속된 혈투로서 관군 및 의병의 처절한 저항이었으나 끝내 방어하지 못했다. 7월 9일 일본군이 웅치를 넘어 전주성 밖에까지 진출하니 순찰사 이광이 먼저 도망치자 관군도 도주하였다. 이 때 성내에 있던 李廷鸞이 궐기하여 의병의 힘으로 적이 성내고 침입하는 것을 저지하였다. 웅치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8일, 梨峙에서는 권율이 소조천융경을 상대로 아침부터 싸움을 시작하여 종일 계속하였다. 권율군은 사력을 다하여 방어하였으며 특히 同福현감 黃進의 활약이 컸다. 적은 마침내 패색이 짙어지자 금산으로 후퇴하였다.

 적의 대군이 금산성에 들어가 고수작전을 펴고 있던 10일, 고경명의 의병군과 곽영의 관군이 공격을 시작하였다. 의병군은 서문으로, 관군은 북문으로 쳐들어갔는데 일본군은 관군진이 취약함을 알아채고 집중적으로 공격하었다. 이 때 선봉장이였던 영암군수 金成憲이 겁을 먹고 달아나자 관군진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는 의병진에도 영향을 끼쳐 의병장의 독전에도 불구하고 전선을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고경명을 비롯하여 安瑛·유팽로·高因厚 등의 의병장과 많은 의병을 잃어 전라도 최대의 의병군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웅치·이치·금산에서의 전투에 의하여 일본군은 열기가 꺾여 전라도 침입을 단념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전라도는 전화를 면하게 되었다.

 호서의병장 조헌은 5월 21일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수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報恩을 거쳐 충청도 서남지방에서 추가로 모병하여 군세가 1천 명에 이르렀다. 이와 동시에 승군장 靈圭가 궐기하여 수백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조헌은 영규의 의병군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공략하기로 하였다. 이 때 일본군은 蜂須賀家政(하치스가 이에마사)의 일부 병력이 청주성을 쳐서 李沃을 패퇴시키고 성에 머물고 있었다. 8월 1일 조헌의 지휘하에 영규 그리고 이옥군이 성을 파상적으로 공격하니 일본군이 견디지 못하고 밤사이에 후퇴하였으므로 성을 수복하였다.

 조헌은 이후 북상하고자 하였으나 순찰사 尹先覺의 간곡한 요청에 의하여 금산의 적을 치기로 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1차의 금산전에서 타격을 입었으나 무력화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금산에 있던 일본군을 견제하려고 보성과 南平縣의 관군이 북으로 진군하려다가 적에게 엄습을 당하여 남평현감 韓諄이 전몰하게 되자 관군은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조헌은 권율에게 서신을 보내 금산성 공격일을 8월 17일로 결정하였음을 알리고 양군이 서로 합세할 것을 제의하였다. 겨우 2천에도 이르지 못한 조헌과 영규의 의병군이 1만 5천여의 일본군을 정면으로 공격한다는 것은 무리였기에 조헌의 부장이나 영규 등이 전투의 연기를 건의하였으나 조헌은 이를 거부하고 16일 금산성 외곽에 진출하였다. 일본군은 공격군이 소수임을 보고 18일 성을 나와 조헌의 의병군을 공격하였다. 이리하여 대장과 죽음을 맹세한 7백 명의 용사 그리고 영규의 부하까지 혈투를 계속하였지만 중과부적으로 끝내 패하고 말았다.

 일본군도 이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어 마침내 금산성에서 철퇴하여 상주 방면으로 돌아갔다. 무주와 옥천에서 원호하고 있었던 일본군도 어찌할 수 없이 잇따라 철수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2차에 걸친 금산전투의 결과라 할 것이다.

 한편 安城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무찌르고 있었던 洪彦秀를 따라 무공을 세웠던 이는 洪季男이었다. 그는 아버지인 홍언수가 竹山府에 있던 적의 기습을 받아 전사하자 대신 의병을 이끌고 안성을 여러 차례 공격하였고 陽城縣·龍仁郡·振威縣·稷山縣 등 여러 고을의 적을 쳐서 많은 전과를 올려 경기도와 충청도 일원의 백성들이 무사할 수 있었다. 특히 선조 25년(1592) 가을 홍계남이 영천군수로 조방장을 겸하고 있을 때 安康縣에 적이 쳐들어와 남녀 5천여 명을 잡아가자 이를 추격하여 적을 격퇴한 다음 잡혀가 있던 남녀를 모두 구출하기도 하였다.

 선조 25년 5월 18일 임진강싸움에서 패한 다음 황해도에 침입한 일본군의 만행이 여러 고을에서 자행되었다. 전이조참의였던 李廷馣은 개성에서 북상하여 8월 상순에 白川郡에 이르러 그 곳 사람인 金德誠·朴春榮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이에 호응하여 延安府의 宋德潤·趙光廷·張慶棋 등이 모두 의병을 이끌고 합세하니 의병의 수는 5백에 이르렀다. 왕세자는 이정암이 거병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황해도초토사로 삼았다. 이정암의 의병부대는 8월 22일 연안성에 이르러 성의 방비를 공고히 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다. 황해도에 침입하였던 흑전장정은 재령근과 信川郡 등 여러 군현을 노략질하고 다녔으며 해주를 유린한 뒤인 8월 28일에는 약 5천 명의 병력으로 연안성에 쳐들어 왔다.

 적의 대군이 성에 이르자 겁이 난 종사관 禹俊民 등은 수성에 반대하였으나 이정암은 죽기를 각오하고 성을 지키기로 결심하였다. 이리하여 28일에 시작한 피아간의 공방전이 4일간에 이르렀고 의병과 성민이 사력을 다하여 성을 지켰을 뿐 아니라 많은 적을 사살하고 우마 90여 필, 군량 130여 석까지 얻는 전과를 올렸다. 이 연안성의 전투가 있은 뒤에 적은 다시는 연안 경내에 침범하지 못하였다.

 함경도 회령에 머물고 있었던 임해군과 순화군은 7월 22일 鞠景仁을 괴수 로 하는 반란민에 의하여 잡힌 몸이 되었다. 이 때 가등청정은 경성에서 宣寧府를 지나 會寧을 치고자 했다. 그런데 국경인이 가등청정에게 항복하고 두 왕자를 넘겨주었다. 이와 같이 함경도는 일본군의 만행을 당했을 뿐 아니라 적의 비호를 받는 국경인·鞠世弼 등이 행정을 오로지하고 있었다.

 당시 北評事로 있었던 鄭文孚가 鏡城 유생인 池達遠의 권유에 의하여 의병을 일으키자 수백 명의 의병이 모여들었다. 이들 의병에 鍾城부사 鄭見龍과 경원부사 吳應台가 합세하여 경성에 나아가 국세필을 회유하고 다시 함경남북 지방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니 그 병력이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정문부는 9월 16일의 경성전투에서 승리한 다음 반역자 국세필의 일당을 경성에서, 국경인을 회령에서, 鄭末秀를 明川에서 각각 처단하고, 이들 지역을 수복하였다. 정문부는 이어 10월 30일 1천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종성부사 정견룡 등과 연합하여 吉州에 있는 적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일본군 1천여 명이 인근지역을 약탈하고 성으로 돌아가려 하였는데 정문부의 의병군은 이들을 長坪石嶺에서 맞아 싸워 대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12월에 정문부의 의병군은 雙浦에서 적과 싸워 또 이겼고 이듬해 정월에는 길주에서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여 白塔에서 격파하였다. 이로써 전의를 상실한 일본군은 북상을 단념하였고 함경도가 점차 수복되었다.

 전라도에서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켰던 김천일은 강화도에서 활약하다가 일본군이 남쪽으로 후퇴함에 따라 그들을 쫓아 경상도를 이르렀다. 일본군은 진주를 공격하기 위하여 함안을 점거하고 班城을 유린한 후 6월 18일에는 의령을 점령하였다. 이 당시 관군과 의병군은 모두 함안 부근과 그 서쪽에서 일본군을 견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공격목표가 진주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관군과 의병군은 이에 대처할 작전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진주성을 지키자는 김천일의 주장과 성을 포기하자는 곽재우의 주장이 맞서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장군들의 독자적 판단에 의해 행동하기로 하였다.019) 趙慶男,≪亂中雜錄≫권 32, 임진 10월 정사. 이리하여 도원수 김명원과 순찰사 권율은 휘하군을 이끌고 남원·운봉 등지로 떠났고, 순변사 李蘋과 의병장 곽재우도 이곳을 떠나버렸다. 또 전라좌의병장 任啓英은 호남으로 돌아가고, 그외 전라병사 선거이 등의 여러 장수들도 흩어졌다.

 이에 반하여 진주성에 들어간 관군과 의병장은 다음과 같다. 경상좌병사 최경회·충청병사 황진·사천현감 張潤·거제현령 金俊民 등의 관군과 의병장으로는 김천일·高從厚·李繼璉·姜希悅·李潛 등이었다. 외부의 원군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진주에 입성한 수천의 관군과 의병에 비하여 적군은 10만여의 대군이었다. 이리하여 10일간의 진주성 공방전에 죽을 힘을 다해 항전을 벌였으나 끝내 성을 보존하지 못했다. 이 진주전은 관군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의병으로서도 임진란중 나라를 위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정신을 가장 선명하게 나타내는 일전이었다.

 의병장의 중심세력은 전직관료나 유생이었으나 특수부대로서 僧軍의 활동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미 금산전에 참가한 靈圭 외에 묘향산에 있던 休靜(西山大師)은 수천의 문도에게 구국궐기를 촉구하여 승군을 일으키고, 전국의 각 사찰에 격문을 띄워 승병봉기를 재촉하였다. 이에 그의 제자인 處英은 호 남에서, 惟政은 관동에서 승군을 일으켰으며 이에 호응하여 전국의 사찰에서 승군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승군은 독자적인 전투를 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각 지방에서 봉기한 의병진에 참가하여 그들과 합세하였고, 군량을 운반하는 등 그들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임진란의 초기에 큰 역할을 수행했던 의병은 전란의 장기화에 따라 점차 변질되어 갔다. 선조 25년(1592) 10월 이후에는 각 지방에서 의병이 우후죽순격으로 일어나고 이들 의병이 난입하여 여러 가지 폐단을 일으켰다. 또한 의병중에는 명목뿐인 의병도 있었다. 이와 같이 의병이 변모하였던 것은 임진란 초기에는 각 지방에서 명망이 두터운 의병장이 봉기하였으나 이후에는 이들을 대신할 만한 의병장이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관군의 징모를 꺼리는 의병들이 의병장으로서 적격유무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이름없는 의병장의 휘하에 모였기 때문이었다. 100여 진에 이른 의병 중에는 안전한 곳에서 영세한 적이나 쫓고 전공을 탐내거나 관군과 대립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등 국가의 통제권 밖에 있었기 대문에 독자적이고 자의적인 행동으로 오히려 국가에 해독을 끼치는 경우가 많아졌다.020)≪宣祖實錄≫권 32, 선조 25년 11월.

 조정에서는 이러한 의병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난이 일어나던 해 10월부터 논의를 거듭하여 남도의 의병을 禹性傳으로 하여금 통솔시키려 하였고, 또 경기·충청·전라도의 의병을 권율과 權徵에게 분속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직 우의정 심수경이 의병장을 칭하게 되자, 그로 하여금 모든 의병을 통솔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조정의 일련의 조치에 의하여 의병의 통합이 명목상으로는 이루어진 것 같았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각지에 의병이 난립하였고 그들은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은 채 독자적인 행동을 취했던 것이다.

 선조 26년에 명나라의 본격적인 원군이 조선에 이르러 관군과 명군에 의하여 평양이 수복되고, 위축된 일본군에 대한 대규모의 반격이 시작되자 조정에서는 전투를 담당시키려는 목적이 아니라 군량을 나르기 위하여 의병을 쓰려고 했다. 이와 같이 의병의 전투역할이 감소되고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관군도 군량의 부족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국가에서 의병에게 군량을 공급한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의병은 스스로 군량을 마련하거나 백성들의 자진납부에 의지해야 했다. 그러나 전란에다 기근이 겹쳐 경기·전라·경상도에서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하는 등 백성들이 곤경에 처해 있어 의병에게 군량을 내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의병은 존립이 위태로워지고 도망병이 줄을 잇게 되어 의병 중에는 떼도둑으로 변하는 일조차 있게 되었다.

 관군과 명군이 전쟁의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전란이 초기와는 달리 관군의 권위가 높아지고 민심이 안정됨에 따라 의병의 존재가치는 떨어졌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각 지방의 의병을 관군에서 흡수하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 관군이나 수령의 강력한 통제를 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선조 26년(1593) 조정의 이러한 의병의 관병화 방침에 따라 상당수의 의병장은 관인이 되었다. 원래 의병장은 관인지향적이어서 조정과의 연관을 희망했었다. 의병장 중에는 소기의 목적을 이룬 자도 있었고 전투중에 순국하여 사후에 보상을 받기도 하였다. 정월에 조정의 대신들이 관군과 명군만으로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의병은 쓸모없는 군대’라고 공언할 만큼 의병은 질적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후기에 이를수록 의병장의 질적 저하와 관군에서 도망했거나 이기심에서 의병에 참가하는 등 의병의 저질화가 가속화되어 의병에게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또 설사 훌륭한 의병장이 대국적 견지에서 행동하려 해도 의병들의 집단의사가 이를 따르지 않아 진퇴가 임의로이 결정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의병군은 갖가지 폐단을 일으켰고 전란중의 기근으로 의병의 난행이 점점 늘어났다.

 임진란중 집단적인 약탈이 시작된 것은 당년 겨울부터였고 시일이 지날수록 악성화되어 갔다. 전란으로 질병과 기근이 심해지자 의병 중에는 떼지어 관을 습격하여 관곡을 약탈하는 가짜 의병도 나타났다. 전란으로 인한 관권의 공백상태와 관의 권위상실로 말미암아 초기부터 크고 작은 반란이 일어났다. 반관적 경향이 특히 심했던 함경도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하였고 다른 지방도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민심이 불온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후 기근과 질병이 만연되자 반란의 온상이 되었고 모처럼 의병군이 형성되었다 할지라도 식량의 부족으로 도망자가 뒤를 이어 의병으로서의 역할을 하기가 어려웠다.

 임진란 최후의 저명한 의병장은 김덕령이었다. 그는 선조 26년 12월 광주에서 기병하니 조정에서도 그에게 기대하는 바가 적지 아니하여 忠勇將이란 칭호를 내린다. 그리고 전국에 난립한 의병진을 통제하기 위하여 8도의병대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군량확보의 어려움으로 3천여 명의 의병 중 5백여 명을 남기고 그 외는 귀가시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뒤에 5백명의 군량확보도 어려워 둔전을 계획하였으니 식량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때마침 李夢鶴의 반란이 일어났고 김덕령이 이 사건에 관계가 있다는 무고에 의하여 희생을 당한 후에는 의병장이 존재하였어도 이미 의병으로서 가치를 상실한 것이었다.

 명과 일본의 강화회담에 의하여 전쟁이 소강상태를 이루다가 선조 30년(15 97) 정유재란이 일어날 즈음 전비를 강화하고 초기 의병을 본뜬 奮義復讐軍을 조직하였다. 복수의병군의 효시는 고경명의 큰아들인 從厚의 의병군에 연유하는 것이지만 복수의병군이 정식으로 광범하게 조직된 것은 선조 29년 12월부터였다. 즉 일본군에게 부모·형제·처자 중에서 희생을 당한 자를 자원케 하고 그 중에서 대장을 뽑아 수효의 다소를 불문하고 이른바 복수군이라 칭하게 하여 일본군을 물리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복수병은 소리만 요란했지 아무런 전과도 없이 유야무야가 되었다.

 정유재란으로 일본군이 침입한 지방에서 자생적인 의병이 다시 일어났다. 그러나 이 때의 의병은 규합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지만 소수로 구성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소수의 의병에게는 향토에 침입한 영세한 적을 소탕하기도 벅찬 일이었다. 더욱이 임진란 초기에는 일본군의 전선이 거의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병력이 분산되었으나 정유재란에서는 일본군이 항상 대군으로 작전을 하였기에 소수의 의병으로서는 성과를 올리기가 극히 어려워 의병의 활동이 미미하였다.

<宋正炫>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