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2. 왜란의 발발과 경과
  • 3) 수군의 승첩
  • (2) 초기 해전의 승첩과 전과

(2) 초기 해전의 승첩과 전과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당시 경상·전라도의 수군은 경상좌수사 朴泓·경상우수사 원균·전라좌수사 이순신·전라우수사 李億祺에게 그 지휘권이 맡겨져 있었다. 그런데 일본군이 부산진 앞바다에 쳐들어왔을 때 적의 선단을 요격했어야 할 경상좌수사 박홍이 스스로 성을 버리고 달아나버림으로써 경상좌수군은 자멸하였고, 경상우수사 원균은 적과 싸웠으나 수영이 함락되고 얼마 되지 않은 병력과 전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앞에서 본대로 경상우수사로부터 전라좌수영에 왜란의 급보가 전해진 것은 일본군이 침공한 지 2일 후였고, 그로부터 20일 후인 5월 4일 이순신 휘하의 전라좌수군이 경상도로 출동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의 출동이 지체된 까닭은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는 점과 경상도의 바닷길에 어두웠으며 도망병이 나오는 등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져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033) 崔永禧,<壬辰倭亂에 대한 理解의 問題點>(≪韓國史論≫22, 國史編纂委員會, 1992), 17쪽.

 어떻든 경상좌수군이 자멸한 후 영남해역에서는 경상우수군 단독으로 일본 수군과 맞서 싸우면서034) 경상우수사 원균은 전라좌수군이 출동하기 전인 4월 중에 영남해역에서 휘하 수군을 이끌고 일본 수군과 맞서 싸우면서 적선을 焚破하였다(吳希文,≪尾錄≫권 1, 壬辰南行日錄). 다른 한편으로는 전라좌수영에 원군요청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위와 같은 몇 가지 난점 때문에 경상우수군의 구원요청을 즉각 받아들이지 않아서 좀더 일찍 영남해역에 출전하지 못하였고, 이는 이후 원균과의 불화를 조성하게 된 불씨가 되었다. 출동하기 이틀 전인 5월 2일까지만 하더라도 전라좌수군은 경상도 해역에 출전하려는 분명한 뜻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5월 4일 출전을 결행한 것은 鹿島만호 鄭運·防踏僉使 李純信·흥양현감 裵興立과 흥양출신의 水使軍官 宋希立 등이 결사적으로 싸울 것을 다짐하면서 급히 출동할 것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5월 1일 관내의 장수들이 영내 鎭海樓에 회동하였을 때 방답첨사·흥양현감·녹도만호 등은 그들의 결의를 수사 이순신에게 개진하였다.035) 李舜臣,≪亂中日記≫, 임진 5월 1일. 그리고 일부의 장수들이 영남구원을 반대하고 나섰을 때 군관 송희립은 그 부당성을 논하여, “영남은 우리 땅이 아닌가. 적을 치는 데 있어서는 전라도·경상도에 차이가 없으니 먼저 적의 선봉을 꺾어 놓게 되던 전라도 또한 자연히 보전될 수 있을 것”036)≪礪山宋氏忠剛公派世德錄≫, 忠節篇 22(齋洞書院, 1971).임을 역설하였다. 출동 여부를 놓고 최후로 이순신과의 면담을 요청한 이는 녹도만호 정운이었다. 그는 5월 3일 이순신에게 말하기를, “전라우수군은 오지 않고 있는데 적의 세력은 이미 서울까지 박두하였으니 더없이 통분함을 이길 수 없다. 만일 (해전에서도 제해권 장악의) 기회를 잃게 되면 뒷날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037) 李舜臣,≪亂中日記≫, 임진 5월 3일.이라고 하여 즉각 출전하는 것만이 최선책임을 강조하였다. 정운과의 면담 직후 영남해역에 진군할 것을 결심한 이순신은 곧바로 中衛將 이순신을 불러 다음날 새벽에 출진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렇게 볼 때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과감하게 경상도 해역에 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휘하 장수들의 적극적인 戰意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순천부사 權俊·방답첨사 이순신·광양현감 魚泳潭·흥양현감 배흥립·녹도만호 정운 등은 이순신이 토로하였듯이 그가 특별히 믿어 같이 죽기를 기약하며 매사를 함께 의논하고 계획한 조선 수군의 중추적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전라좌수군 지휘부에 이와 같은 의기의 장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 조선 수군의 승첩과 제해권 장악도 가능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5월 4일 전라좌수군은 주전함인 板屋船 24척과 挾船 15척·鮑作船 46척 을 이끌고 여수 본영으로부터 玉浦海戰이 기다리고 있는 거제 앞바다를 향하여 출동하였다. 이틀 후 한산도에서 경상우수군(판옥선 4척과 협선 2척)과 합류한 뒤, 7일 아침 마침내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최초의 해전이 벌어졌다. 이날 조선 수군은 30여 척의 일본선단을 공격하여 26척을 격파하고 이어 合浦·赤珍浦 등지에서 다시 16척을 불살라 없애는 등 모두 40여 척의 적선을 대파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옥포해전의 전승이야말로 조선 수군으로 하여금 적을 능히 제압할 수 있다는 확신감을 갖게 해준 중요한 일전이었다. 양측의 수군전력이 노출된 序戰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사실은 곧 조선측의 전력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반면에 일본측은 초전에 패전한 충격으로 인해 크게 전의가 손상되었음은 물론 그에 대한 심리적 부담이 그 후의 작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서전을 승리로 이끈 다음 5월 9일 본영에 돌아온 전라좌수군은 군비를 재정비한 뒤 2차 출전에 대비하였다. 그 후 20일이 지난 5월 29일 2차 출전을 결행한 전라좌수군은 6월 10일에 이르기까지 泗川·唐浦·唐項浦·粟浦의 해전에서 적선 70여 척을 불살랐을 뿐 아니라 일본의 수군장 來島通久(구르시마 미치히사)를 포함, 일본군 약 300명의 목을 베고 각종 군기와 갑옷류 등을 노획하였다. 반면에 조선측의 피해는 전사자 13명과 부상자 34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2차 출전 때부터 이억기 휘하의 전라우수군이 판옥선 25척을 동원하여 가세함으로써 이후 주 전선만도 50척이 넘는 증강된 전력을 보유케 되었다. 이 때부터 조선 수군은 전라좌·우도와 경상우도의 수군이 합세하여 이른바 3도 수군038) 임진왜란 초기에 자주 언급되고 있는‘三道水軍’의 3도란 전라·경상·충청도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전라좌·우도와 경상우도를 말하는 것이다. 임란초에 충청도 수군은 경상좌도수군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선조 27년에 가서야 비로소 충청도수군이 어느 정도의 병력을 갖추어 수군통제사 이순신 휘하의 수군부대에 소속되었다.의 연합전선이 구축되기에 이르렀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1·2차 출전을 통하여 남해에서 일본 수군을 크게 격파하였을 때 육상에 사는 이미 도성이 함락되었고 선조는 서울을 빠져나와 개성·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란하고 있었다. 육지의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 적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은 계속 북진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측 수군장들은 처음에 예상했던 조선 수군의 반격이 없자 육상전투에 가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바다에서 연패하자 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은 뒤늦게 수군장 脇坂安治(와키자카 야스하루)·九鬼嘉隆(구키 요사다카)·加藤嘉明(가토 요시아키라) 등에게 지시하여 단시일 안에 합동작전으로 조선 수군을 격파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 때 그들은 3대로 나누어 남해에서 전라도로 진격한 다음 서해로 북상할 예정이었다.039) 崔永禧, 앞의 글, 18쪽.

 그런데 협판안치가 공명심에 사로잡혀 합동작전을 무시하고 7월 8일 단독으로 73척의 전선을 이끌고 거제 見乃梁에 이르렀다. 이 무렵 조선측에서는 전라좌수군이 이억기 휘하의 우수군과 합세하여 7월 6일 전라좌수영을 출 발, 노량에서 다시 경상우수군과 합류한 후 다음날 당포에 이르러 밤을 새우면서 일본의 대선단이 견내량에 정박중이란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렇게 시작 된 3차 출전에서 조선 수군은 7월 8일 견내량의 적선단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풍신수길의 조선침략에 대한 사형선고’를 내렸다. 협판안치의 일본 선단은 약 60척의 전선을 잃고 거의 전멸상태에 빠졌고 계속 이어진 安骨浦 해전에서 구귀가융과 가등가명 휘하의 수군까지 대패함으로써 사실상 일본 수군 전체가 궤멸되고 말았다.040) 일본수군의 한산대첩에서의 패전, 또는 앞서의 옥포패전은 일본군의 사기저하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고 오히려 좋은 자극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有馬成甫,≪朝鮮役水軍史≫, 海と空社, 1942 참조). 이후 계속된 수년간의 전쟁은 오직 풍신수길의 실망을 덜어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041) Muldoch, History of Japan;德富猪一郎,≪近世日本國民史 豊臣氏時代≫丁篇(東京;民友社, 1925), 677쪽에서 재인용.

 한산대첩의 결과는 해전에서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전반의 戰局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해전의 전승 의의는 다음과 같은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대개 왜적은 본시 수륙이 합세하여 서쪽으로 쳐내려오려고 하였는데 이 한번의 해전에 의해 마침내 그 한 팔이 끊어져버린 것과 다름없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小西行長이 비록 평양을 빼앗았다고는 하나 그 형세가 외롭게 되어 감히 더 전진하지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국가에서는 전라·충청도를 보전하였고 나아가서 황해도와 평안도의 연해지역 일대까지 보전할 수 있었으며, 군량을 조달하고 호령을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국가중흥이 이룩될 수 있었다(柳成龍,≪懲毖錄≫권 1).

 즉 한산도해전은 일본군으로부터 제해권 장악의 기회를 완전히 박탈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 전체를 반신불수가 되도록 하여 평양까지 진출한 소서행장군이 더 이상 일보도 전진할 수 없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만큼 중대한 의미가 있었다.042) 德富猪一郎, 위의 책, 661쪽. 따라서 이 때부터 풍신수길은 일본 수군장들에게 해전을 중지하고 거제도에 축성하여 웅거하면서 기회를 보아 육지로부터 조선 수군을 쳐부수는 작전을 모색케 하도록 지시하였다.043) 北島万次,≪朝鮮日日記·高麗日記≫(株式會社 そしえて, 1982), 183∼184쪽.

 7월 6일 이후 약 1주간에 걸친 3차 출전에서 일본 수군을 완전히 제압하 여 전국 전반의 전세를 반전시킨 다음, 조선 수군이 선조 25년 초기 해전을 마무리한 전투가 바로 부산포해전이었다. 9월 1일부터 그 다음날까지 이어 진 이 해전에서도 역시 100여 척의 적선을 깨뜨렸을 정도로 큰 전과를 올렸다. 부산포해전의 전과가 컸던 만큼 수군 장졸들의 전공 또한 그만큼 컸다. 이 점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장계에서, “전후에 걸쳐 4차례 출전에서 10번 접전하여 모두 승리하였다 해도 장졸들의 공로로 말하면 이번 부산싸움보다 더한 것이 없다”044)≪李忠武公全書≫권 2, 狀啓 2, 釜山破倭兵狀.라고 강조한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따른 희생도 작지 않았으니 특히 이순신 휘하에서 가장 투철한 충의로 가장 뛰어난 용맹을 떨쳐왔던 녹도만호 정운이 이 해전에서 전사한 것은 큰 손실이었다.

 옥포해전으로부터 부산포해전에 이르기까지 약 5개월간에 걸친 초기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일본의 전선만 해도 약 330여 척을 격파하거나 불태워 없애는 엄청난 전과를 세웠다. 아울러 그 결과는 해전에서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전세에 있어서 조선측으로 하여금 종래의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시킨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해전의 승첩은 명장 이순신의 작전지휘 밑에서 싸운 전라좌·우수군과 원균의 경상우수군이 연합전선을 펴 이루어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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