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2. 왜란의 발발과 경과
  • 4) 명군의 참전과 전세의 변화
  • (2) 제1차 평양성전투와 그 영향

(2) 제1차 평양성전투와 그 영향

 조승훈의 요동군이 평양성 진공작전을 감행한 것은 개전 후 3개월만인 동시에 조선측의 원군요청이 있은 뒤 2개월만의 일이었다. 명군이 시도한 최초 의 작전이기도 했던 이 전투는 소규모의 병력으로 무모한 공격을 펼친 끝에 단 1회전으로 끝난 패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명·일 양측에 모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여기에서 는 종래에 가볍게 취급해온 조승훈군의 평양패전의 실상과 그 결과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7월 10일경 압록강을 건너 조선땅에 진군해을 때 요동군은 도강 직전에 湯站에서 總兵 양소훈의 주관하에 작전회의를 갖고 전열을 정비한 다음 출동을 개시하였다. 조선측에서도 양소훈의 요청에 의해 사전에 淸川江·大定江에 浮橋를 설치하고 군량과 선척을 마련하는 등 명군과의 합동작전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068)≪宣祖實錄≫권 28, 선조 25년 7월 병인. 그러나 조승훈은 柳成龍과 金命元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급히 서둘렀을 뿐 아니라 일본군을 개미나 모기에 비유하는 등 처음부터 적을 지나치게 경시하는 태도를 보였다.069) 朴東亮,≪寄齋史草≫下, 壬辰日錄 권 3. 그는 본래 여진족과의 전 투에서 용장이란 이름을 얻어 일본군을 가볍게 보고 있던 데다 평양에 주둔한 적의 병력이 많지 않다는 소문을 듣고난 후부터 완승을 거두어 반드시 큰 공을 세우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嘉山에 이르러 평양의 적이 아직 그대로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그는 술잔을 들어 “왜적이 아직도 물러가지 않고 있는 것은 하늘이 나의 성공을 도우려는 것”이라 하여 미리 자축하였을 정도로 기고만장하였다.070)≪宣祖修正實錄≫권 26, 선조 25년 7월.

 그런데 요동의 馬兵이던 조승훈군은 현지의 지리에 어두었을 뿐 아니라 그 무렵 쏟아진 폭우로 길바닥이 온통 진흙투성이가 되어 마병으로서 그 기능을 전혀 발휘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071) 諸葛元聲, 앞의 책, 임진 7월. 7월 17일 평양성을 공격하던 날, 조승훈은 順安으로부터 자정을 넘긴 3경에 출진하여 곧바로 평양성 밖까지 육박하였는데 당시 도원수 김명원은 휘하 장수들로 하여금 병력 3천을 이끌고 그 뒤를 따르게 하였다. 이 때 평양성에 갑자기 군사가 밀어닥치자 일본군은 미처 성을 지키지 못한 채 성내의 요해처에 웅거하여 복병을 두고 명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승훈과 사유가 군사를 풀어 칠성문을 향해 공격해 들어가자 적이 좌우에서 일제히 조총을 쏘아댔다. 게다가 길바닥이 진창이 되어 있었던 관계로 명의 군사들과 말이 모두 진흙에 빠지고 미끄러졌고 선봉장 사유가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으며 조승훈은 급히 퇴각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러나 후미의 군사들 대부분이 살상을 당하였을 뿐 아니라 유격장 戴朝弁과 천총 張國忠·마세융 등 지휘부의 장수들 거의가 전사할 만큼 대패하였다.072)≪宣祖修正實錄≫권 26, 선조 25년 7월.

 이같은 명군의 패전상황은 일본측의 기록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어073) 北島万次, 앞의 책, 195쪽. 조승훈군의 패인에 대해서는 조·명·일 3국의 기록에 차이가 없다. 먼저 평양의 지리에 어두웠을 뿐 아니라 기병이 주축을 이룬 군사를 인솔하여 날씨조차 고려하지 못한 채 무모하게 펼친 공격전에서 一敗塗地한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승훈이 소속된 요동군은 도리어 조선이 명의 은혜에 보답하기는 커녕 평양성전투에서 오히려 그들을 배신하였다고 힐난하고 심지어 조선의 一小營이 倭陣에 투항했기 때문에 패하게 되었다고 무고하는 등 패전의 책임을 조선측에 전가하려 하였다.074)≪宣祖實錄≫권 28, 선조 25년 7월 정축. 이에 조선조정에서는 沈喜壽·尹斗壽·李幼澄·李誠中 등을 계속 요동총병 양소훈진영에 파견하여 사실을 거듭 반증하는 동시에 조승훈으로 하여금 평양성에 머물게 하여 적을 공격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遼鎭에서는 기후와 지세가 불순하다는 이유를 들어 계절이 바뀐 다음에 도모할 것이란 점과 군량비축에 최선을 다하라는 요구만을 되풀이하면서 재출병의 시일을 끌고 있었다.075)≪宣祖實錄≫권 28, 선조 25년 7월 정해.

 조승훈의 패전소식이 전해진 뒤 명의 조정에서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 당시 명의 국내 사정은 왜변 이외에도 「寧夏의 變」이라고 하는 또 다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부총병을 지낸 哱拜가 영하를 거점으로 일으킨 반란이 아직 평정되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때 평양의 패보가 전해지자 명나라 조정은 크게 동요하여 곧 바로 登州·萊州·天津·旅順·淮陽지방의 방어체제부터 보강하고 증치하는 응급조치를 취하였다.076) 茅瑞徵,≪萬曆三大征考≫倭上. 그리고 잇따라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다. 명은 먼저 宋應昌을 經略防海備倭軍務로 임명한 다음 薊州·密雲·天津·永平을 중심으로 山東·遼東·寧前·通州 등 12개 도에 총동원령을 내려 철저한 방어책을 강구케 하였다. 아울러 명측에서는 沈惟敬을 遊擊으로 삼아 평양의 소서행장에게 보내 적정을 탐지한다는 명목하에 화의교섭을 갖게 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행인사행인 설번을 조선에 칙사로 파견하여 10만 대군을 일으켜 조선의 일본군을 토벌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명은 좀처럼 재출전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8월 하순에 이르러 조선측에서 다시 鄭崑壽를 陳秦使로 파견하여 출병을 요청하였으나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서도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다. 다만 유격 葛逢夏가 기병 2천을 거느리고 査大受와 함께 행궁을 호위하며 오랫동안 의주에 머물렀을 뿐이다. 이처럼 명이 파병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조선의 관리들이 조속한 원병을 요청했을 때 명측에서 “用兵의 道는 天時와 地利를 얻는 것이 귀하므로 쉽게 처리할 수 없는 일이다. 전일 조승훈의 경우에도 시세를 헤아리지 못하고 경솔히 진군하였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므로 반드시 만전을 기하여 거사해야 한다077)≪宜祖實錄≫권 29, 선조 25년 8월 임인. 고 하였듯이, 요동군의 평양패전으로 인한 심리적 부담감이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

 한편 소서행장군이 평양을 점령한 지 1개월만에 요동군의 급습을 받고 이 를 격퇴한 뒤 일본측의 움직임은 어떠하였을까. 이에 앞서 풍신수길은 5월 16일 名護屋에서 일본의 침략군이 조선의 도성을 장악하였다는 소식을 접수한 후, 6월 3일에 내린 작전명령에서 征明計劃을 하달하였다. 조선에 주둔한 9군 가운데 宇喜多秀家(우키다 히데이에)와 羽柴秀勝(하시바 히데가츠)이 지휘하 는 제 8·9군을 제외한 나머지 7군의 병력 13만을 총동원하여 명을 공략한 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7월 15일 三奉行을 통하여 여러 장수들에게 전달된 朱印狀에서 그는 돌연히 정명계획을 변경하여 당년에는 조선평정을 완전하게 이룩할 것이며 정명의 문제는 자신이 조선으로 건너간 후 이듬해 봄 결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078) 池內宏,≪文祿慶長の役≫付編·解說(東京;吉川弘文館, 1987), 22∼23쪽. 물론 이것은 일선 장수들의 견해가 반영되지 않은 풍신수길 개인의 뜻이었으므로 조선에 주둔한 장수들의 의견을 수렴할 경우 달라질 수도 있는 계획이긴 하였다. 그러나 풍신수길의 정명계획이 이처럼 바뀔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일본군의 도상점령 이후 조선 전역에서 확산된 의병의 봉기와 개전 직후부터 큰 위력을 발휘했던 수군의 활약으로 인해 전세가 불리해 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079) 北島万次, 앞의 책, 197쪽 참조.

 그와 같은 상황에서 불의에 평양성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조승훈의 실책으로 명군을 쉽게 격퇴하긴 하였으나 예상외로 명군의 개입이 빠른 데 대하여 크게 당황해 하고 있었다. 바로 이 때 풍신수길의 주인장과 함께 그의 軍師인 黑田孝高(구로다 요시다카)와 삼봉행이 일본으로부터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8월초 서울에서 현지의 장수들을 소집한 가운데 당장 제기된 명군의 개입을 포함한 정명문제와 전세의 변화에 따른 향후대책을 논의하였으니 이른바 「京城軍議」가 그것이었다. 여기에서 풍신수길의 軍師인 흑전효고를 중심으로 한대다수는 장차 명군이 계속 올 것으로 보고, 전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보급선을 짧게 하는 것이 유리하므로 평양성을 버리고 도성 가까운 북방에 본진을 구축한 다음 후일을 도모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그런데 소서행장만은 그들과 견해를 달리하여 강경론을 주장하였다. 즉 그는 조선측이 이미 전력을 상실한 상태이며 명군이 수만의 원병을 보낸다 할지라도 압록강을 건너 많은 군사와 군량을 조달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명나라 경내에 쳐들어가 농성하는 것이 좋은 대책임을 거듭 역설하였다.080) 北島万次, 위의 책, 199∼200쪽. 당시 함경도에 주둔하고 있던 가등청정이 빠진 가운데 이루어진 「경성군의」는 결국 소서행장의 고집을 꺾지 못하여 뚜렷한 결론을 얻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때 일본군이 감지한 분명한 사실은 전세가 그들에게 매우 불리 해졌다는 점이다. 명군이 시도한 제 1차 평양성전투는 일본측에도 적지 않 은 충격을 안겨주었고, 나아가서 이후의 전황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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