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3. 강화회담의 결렬과 일본의 재침
  • 4) 일본군의 패퇴
  • (2) 조·명연합군의 4로 총공격

(2) 조·명연합군의 4로 총공격

 경략 형개는 선조 30년 12월 하순 조·명 연합군의 반격작전이 실패로 끝나기 직전에 서울로 와서 왜군을 재차 전면공격하려는 작전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는 1차 울산성전투 후 방어형인 명군의 배치를 공격형의 전진배치로 바꾸어 선조 31년 7월 하순에는 조선에 들어와 있던 66,000여의 명군을 분군하여 동로의 안동·新寧·義城·醴川·迎日·長鬐에 25,000의 병력을, 중로의 선산·선산과 고령간 지역·상주에 13,000병력을, 서로의 남원·전주에 8,000의 병력을 주둔케 하였다. 그리고 증파 중인 육군 12,000의 병력을 동·중로에 추가로 투입하기로 하였다.

 명의 수군도 이미 도착한 유격 季金의 3천 군이 통제사 이순신의 조선수군과 합류하였고 도착 예정인 도독 陳璘의 5천 군은 水路에 배치하고 1만여 육병을 서로에 추가한 후 명의 수륙군이 동·서·중·수로로 병진하여 왜군을 전면적으로 공격하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4로군의 총공격 시기도 명군의 증원이 완료되는 선조 31년 9, 10월로 예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명 증원군의 도착이 늦어지고 군량공급의 조치도 불확실한데다 이 계획에 적극적이었던 경리 양호가 1차 울산성전투의 패전논의로 經略贊劃 丁應泰에 의해서 명나라 조정에 탄핵당하고 조선까지 무고되어 政情이 불안하였으므로 작전의 조기 결행은 어려웠다.

 당시 왜군은 경상좌도의 울산·양산·동해와 우도의 김해·창원·웅천·고성·거제·진주·곤양·남해·사천 그리고 전라좌도의 순천 등지를 점거하고 있었다.126)≪宣祖實錄≫권 104, 선조 31년 9월 경술. 그러나 울산의 가등청정은 전투를 재개할 의사를 포기하고 있었고 순천의 소서행장도 수세에 치중하였다. 사천의 도진의홍만이 휘하 부대를 여러 소대로 나누어 영·호남 등지로 유격전을 전개하여 왔다.

 도진의흥군의 유격전에 맞서 조·명군은 3월 24일 경상우병사 정기룡이 부총병 解生과 함께 三嘉에서 물리쳤고(삼가부근전투), 4월 8일 전라병사 李光 岳과 참장 李寧은 茂失에서 격퇴시켰다(무주전투). 4월 20일에는 정기룡과 부 총병 이령이 함양 沙斤驛 부근에서 대파하였고(함양 사근역전투), 7월초 정기룡은 德山에서 막고(덕산전투) 하순에 명군은 光陽 知分川에서 물리쳤다(광양 지분천전투). 이로써 도진의홍도 사천에서 묶이게 되었다. 앞서 6월에 소서행장군은 순천방면에서 준동하였지만 전라병사 이광악이 유격전으로 대응하여 倭橋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1차 울산성전투 후 선조 31년에 들어와서 조·명 연합군의 총공격이 있게 되는 9월까지 유격전을 제외하고 전투가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그것은 조·명군이 전면 공격을 준비하였던 반면 왜군은 수세에 몰린데다 5월에 들어와서 극심한 군량부족으로 순천의 소서행장·울산의 가등청정·사천의 도진의홍만이 잔류하고 그 주력이 본국으로 철수하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조정은 명군이 서울로 들어오는 선조 30년 5월부터 선조 31년 2월까지의 조·명군의 군량을 병신·정유년의 풍작을 조달원으로 경상·전라·충 청·경기·황해·강원도에서 田稅倉米 20만여 석을 수납하여 공급할 수 있었다.127)≪宣祖實錄≫권 98, 선조 31년 3월 무자.

 그러나 명군은 총공격을 위해서 66,000명의 병력을 조선에 계속 주둔시키면 서 공격이 개시되는 선조 31년 9월까지 후속군 4만여 명의 증파를 추진하고 있어서 조정도 군량의 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영의정 유성룡은 예정된 조·명 연합군의 총공격을 위해서 선조 30년(1597) 5월에서 31년 4월까지 소요된 수량인 22만여 석을 참작하여 1년간 필요한 군량을 미곡 30만여 석으로 추정하였다.128)≪宣祖實錄≫권 98, 선조 31년 4월 계미. 이를 마련할 대책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앞서 경략 형개와 경리 양호는 군량의 조달대책으로써 장기적으로 명군의 둔전과 단기적으로 조선곡의 조달 및 명곡의 지원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명군의 둔전설치에 대해서는 고려시대 일본원정을 위해 원에서 설치하였던 征東行省의 폐해를 재현시킬 것이라는 영의정 유성룡의 주장에 따라 조신들이 신중론을 제기하고 있어서129)≪宣祖實錄≫권 87, 선조 30년 4월 계유. 조·명간의 논의단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조선곡의 조달은 명군의 대규모 내원과 계속되는 주둔으로 그 한계를 드러냈으므로 명나라 조정이 약속하고도 조선까지 운반하지 못하고 있는 명의 원곡 30만여 석의 지원이 절실하게 되었다.130)≪宣祖實錄≫권 98, 선조 31년 3월 기유. 1597년 10월 에서 이듬해 3월까지 주로 육운에 의해서 명원곡이 조선에 공급되었지만 그 수량은 소미 14,000여 석, 황두 16,000여 석에 불과하였다(≪宣祖實錄≫권 98, 선조 31년 3월 신사).

 이 무렵 경략 형개는 요동에서 악화되고 있는 㺚者들의 소요사태를 진정시키고 조선에서 예상되는 명군의 군량결핍을 해결하기 위한 명곡의 지원과 명 증원군의 조기 출병을 명나라 조정에서 조치케 하려고 선조 31년 3월 18일 요동으로 귀환하였다. 이에 앞서 명나라 조정도 해빙기를 맞아 20만여 석의 군량을 의주로 해운·육운하여 왔고 많은 명곡을 운반중에 있었다.131)≪宣祖實錄≫권 98, 선조 31년 3월 갑인.

 3로에 배치된 명군도 선조 31년 4월에 들어와 군량의 결핍을 계속 호소하고 있어 조선조정도 주둔중인 명군과 증원될 명 후속군을 위해서 명곡의 해 운에 나섰다. 당시 명곡을 해운할 수 있는 조선의 능력은 1회 5만여 석이나 되었으므로132)≪宣祖實錄≫권 99, 선조 31년 4월 계미. 4월 23일 105척의 명곡 운반선대는 20일 예정으로 장연을 떠 나 의주로 가서 5월말 天津의 쌀 7,400여 석과 山東의 좁쌀 17,930여 석 및 황두 4,650여 석을 처음으로 京江에 운반하여 왔다. 그 후 9월 말까지 명곡 약 22만여 석을 해운하여 왔다. 이 명곡은 다시 충주·여주·은진·전주·나주로 해운·강운되어 조·명 연합군의 4로 총공격을 위한 군량으로 공급되었다.133)≪宣祖實錄≫권 104, 선조 31년 9월 경술.

 명의 증원군도 계속 조선으로 들어와 6월까지 제독 유정과 董一元軍이 서 울에 도착하였고, 뒤이어 도독 진린의 수군도 내원하게 되었다. 명수군은 조 선수군의 한산도방어가 실패한 후 왜수군이 서해로 진출하여 산동지방을 해상으로 침공하는 것을 막고,134) 崔韶子,<壬辰倭禍와 明朝>(≪아시아문화≫9, 翰林大 아시아文化硏究所. 1992), 10쪽 참조. 명곡의 해상수송로를 보호하려는 임무수행을 위해서 곧 남하하였다. 즉 진린이 이끄는 浙江水師 500여 척의 함대는 唐津에 와서 정박하였다가 남쪽으로 내려가 당시 莞島郡 古今島에 통제영을 설치하고 전라좌우도의 내해를 제어하고 있던 통제사 이순신의 함대와 조·명연합함대를 구성하고 7월부터 倭橋의 왜군을 해상에서 봉쇄 견제하는 함대작전에 들어갔다. 제독 유정과 동일원도 7월 하순 각각 전주와 성주로 남하하였다.

 경략 형개도 명나라 조정이 天津巡務 萬世德을 신임 경리에 임명하고 명곡과 증원군을 보내주자 8월초 서울로 돌아와서 귀경한 4로의 제독과 협의하여 9월 중순 조·명 연합군이 4로에서 총공격할 것을 확정하였다. 조·명연합군의 4로 총공격 계획을 보면 제독 마귀는 동로로 나아가 울산 도산성의 가등청정을, 제독 동일원은 중로로 나아가 사천 新賽의 도진의홍을, 제독 유정은 서로로 나아가 순천 왜교의 소서행장을, 도독 진린은 수로에서 왜군을 협공하기로 하여 조·명 연합군이 4로로 수륙병진하여 왜군을 전면 공격하기로 하였다.135) 李烱錫, 앞의 책, 1086쪽 참조.

 이에 따라 조정은 평안·강원·경상좌도군을 동로에, 경기·황해·경상우도군을 중로에, 충청·전라군을 서로에, 이순신의 수군을 수로에 투입케 하였고, 도원수 권율은 유정과 함께 동행케 하여 명군 143,700명과 조선군25,100명은 선조 31년 9월 20일 전후 왜군을 총공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로의 조·명 연합군은 가등청정의 울산 도산성을 공격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고(2차 울산성전투 또는 도산성전투) 중로의 조·명연합군도 사천 신새를 쳤지만 도진의홍의 유인작전에 빠져 오히려 왜군에게 볼모를 보냈다. 서로의 조·명 연합군은 소서행장의 왜교를 공격하여 포위하였지만 유정이 싸움을 기피하고 화의공작에 급급하여 조·명 연합함대의 해상봉쇄와 상륙전의 지원을 받고도 승패를 결정짓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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