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4. 왜란중의 사회상
  • 3) 항왜와 부왜·부로
  • (2) 부왜·부로

가. 부왜의 실태

 왜군은 침입 당초에는 정책적으로 조선사람을 회유하고 기만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본뜻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들 중에는 附倭者로서 이적 행위를 서슴지 않은 자도 있었다.

왜국은 征戍 徭役이 없다는 말을 듣고 백성들은 마음속으로 그것을 좋아하였다. 왜적은 또 민간에게 令을 내어 회유하매 어리석은 백성들이 다 항복하면 반드시 살 수 있을 것이요, 싸우면 기필코 죽는다는 말을 믿었던 까닭에 沿海頑民들은 너도나도 削髮易眼하고 그들을 따랐으며, 곳곳에서 왜적행세를 하는 자가 倭奴는 얼마 되지 않고 그 반이 叛民이니 극히 한심스럽다(≪宣祖實錄≫권 27, 선조 25년 6월 병진).

 위의 내용은 경상우도 초유사 金誠一이 중앙정부에 알려온 왜란 초기 경상도지역 민심의 동태인데, 여기에서 보듯이 부왜자가 상당수에 달했음을 볼 수 있다. 이들 부왜자 중에는 적의 向導가 된 자도 있었으며, 붕당을 만들고 왜말을 흉내내며 마을에 침입하여 민가의 재산을 약탈하기도 하였다.210) 吳希文,≪鎖尾錄≫권 1, 壬辰南行日錄 8월.

 星州를 침입한 왜군은 조선인으로 判官을 삼았으며 관곡을 풀어 나누어 주고 환심을 얻으려 하였다. 백성들은 앞을 다투어 받으면서 엎드려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자도 있었다고 하며,‘새 上典이 나를 살려주었다’고 외치는 자도 있었다고 한다.211) 위와 같음. 부왜자들 가운데는 왜군의 첩자가 되어 아군에게 피해를 주는 자도 있었다.

경상도 靈山에 사는 孔僞謙이란 자는 왜란초에 附賊하여 함께 서울에 올라갔다. 자기 집에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나는 마땅히 경주부윤이 될 것이며, 못되어도 밀양부사는 놓치지 않을 것’이라 하고 상감을 범하는 말까지 하였다. 郭再祜가 그 말을 듣고 매우 분개하여 하루는 공위겸이 그 집에 돌아온 것을 알고 그를 결박지어 참수하였다(趙慶男,≪亂中雜錄≫권 1, 임진 7월 9일).

 위의 공위겸 같은 자는 대표적인 부왜자로 볼 수 있다.

 부왜자가 속출한 데는 內需司의 폐단이 컸던 데도 그 원인이 있었던 것 같다. 同副承旨 李石國은 開城행재소에서 직언하기를 난국을 수습하는 길은 내수사의 작폐한 사람을 찾아 처단하고 이완된 민심을 수합하는 것이 상책이라 하였다. 그는 근래 궁인들의 작폐가 크고 내수사 사람들이 宮物을 가칭하여 백성들은 원성을 누적하여 왔기 때문에 이를 원망하며 왜인과 같은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왜군들이‘우리는 너희들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너희 임금이 백성을 학대하지 않는가’라고 하면, 조선인들도‘왜도 또한 사람이다.어찌 꼭 집을 버리고 피난할 것인가’하며 부왜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212)≪宣祖實錄≫권 36, 선조 25년 5월 임술.

 황해도 여러 고을에서도 부왜자가 발생했다. 海州를 본거지로 삼고 여러 고을을 분탕하던 왜장 黑田長政(구로다 나가마사)은 한편으로 서해민을 회유하기 위해 각처에 榜文을 배포하였다. 요지는 벼슬아치건 농민·노비든간에 자기를 따르는 자는 살려줄 것이며 배반하는 자는 참수하겠다는 것이었다. 적의 점령지에 있는 민중은 살아남기 위해 부왜하는 자가 많았으나 그중에는 왜군을 가장하고 촌락에 침입하여 만행을 자행하는 자도 있었다. 해주 東面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왜군과 내통하고 민가를 분탕함이 적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하며, 延安 사람들은 부사가 왜군을 사살하자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적이 재차 침입해 오면 부사를 결박지어 적진에 넘기겠다고 위협까지 하였다.213) 李廷馣,≪西征日錄≫, 임진 6월 12일. 선조가 황해도 백성들이 모두 적 중에 투항했느냐고 묻는 말에, 尹斗壽가 “다른 고을은 듣지 못했으나 오직 鳳山郡은 모두 들어갔다”214)≪宣祖實錄≫권 28, 선조 25년 7월 병술.고 한 것을 보면, 봉산군에서 부왜자가 가장 많았던 것 같다.

 이와 같이 해서지방의 민심이 악화일로를 거듭하자 정부에서는 수습책으로 민간에 招諭敎書를 배포하고 서둘러 그 대책을 세웠다. 적에게 부역한 자라 하더라도 과오를 뉘우치고 마음을 바꿔먹는 자는 전에 지은 죄를 용서해 줄 것이며, 적에 부역한 자로서 왜군을 포획하는 자는 叛하지 않은 자와 동등하게 시상기준에 따라 후하게 상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이반자의 개심을 촉구하기도 하였다.215)≪宣祖實錄≫권 28, 선조 25년 7월 병술.

 철저히 부왜를 한 자는 앞에서 말한 바 있지만, 함경도 회령에서 반기를 든 국경인과 그의 숙부 국세필이었다. 그는 설움을 받아 오던 함경도민을 충동하여 부왜에 앞장섰고 두 왕자와 從臣 김귀영·황정욱 등을 납치하여 가등청정에게 넘겼다는 사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諸鎭堡의 토병들도 반하여 본도 감사 柳永立이 숨어있는 곳을 탐지하고 적병을 인도하여 잡히게 하였으며, 관리들을 잡아 반란을 일으키고 적진에 투항하였으며, 남병사 李渾은 반민에게 잡혀 죽었다. 그리하여 함경도에 침입한 왜군은 피를 흘려 싸우지 않고 함경도 전역을 수중에 넣을 수 있었다. 그 후 가등청정은 部將으로 하여금 吉州 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安邊府로 내려왔으며 明川 이북의 8진은 부왜한 자들로 刑伯·禮伯의 일본 관직을 주어 다스리게 하였고, 국경인에게 判刑이란 왜직을 주었으며 국세필에게 예백을 주어 각기 회령과 鏡城을 지키게 하였다. 附敵者를 시켜 지키게 한 것은 관북뿐이 아니고 관남지역도 그러했다. 이는 “關南州鎭 또한 반민이 웅거하면서 모두 淸正의 절제를 받았다”고 한 것이 잘 말해주고 있다.216) 李章熙,<鄭文孚의 義兵活動>(≪史叢≫21·22, 1977), 331∼332쪽.

 다음은 도성의 실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선조가 서울을 빠져나가자 도성의 사족들은 왜군을 피하여 먼 곳으로 피난하였고, 일반 양인이나 천민들도 흩어져 근기지역으로 나가 도성은 텅비어 있었다. 그런데 왜군이 방을 붙여 선정을 약속하면서 도성으로 돌아올 것을 권유하고 그들을 따르면 재능에 따라 관직을 내리겠다는 등 회유책을 펴자 주민들이 점차 성안으로 들어와서 坊市에 가득하여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왜군은 성문을 지키며 그들이 발급한 통행증인 帖을 가진 자는 출입을 허용하여 도성민들이 모두 이 첩을 받았고, 그 중에 무뢰배들은 왜군에게 붙어 향도노릇을 하며 악한 짓을 하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왜군은 싸우는 것을 엄금하고 싸우려는 조선 사람을 고해바치는 간사한 자에게 상을 주고 자기들을 비방하는 자는 모두 살해하였다고 한다.217)≪宣祖修正實錄≫권 26, 선조 25년 5월. 李肯翊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때 성안 백성들이 모두 달아났다가 얼마 되지 않아 차차 들어와서 동리와 시장이 전일과 같고 적과 섞여서 서로 물건을 매매하였다. 적이 성문을 지키고 우리 백성들로서 적의 帖을 가진 사람은 출입을 금지하지 않으므로 모두들 적의 첩을 받아 적에게 복종하여 감히 그들의 令을 거역하지 못하였다. 또한 적에게 아첨해서 가까이 하고 길잡이가 되어 못된 짓을 하는 자도 있었다. 혹 적을 죽이려고 모의를 한 사람들은 그들이 밀고하여 鐘樓 앞이나 崇禮門(南大門) 밖에서 불태워 죽이고 극히 참혹한 짓으로 시위하며 위엄을 보여서 해골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李肯翊,≪燃藜室記述≫권 15, 宣祖朝故事本末 壬辰倭亂大駕西狩).

 대부분의 도성민들은 난리가 장기화됨에 따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도성 안 본가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불가피하게 倭帖을 받아야 했던 것이 다. 그러므로 첩을 받았다고 해서 모두 부왜자로 볼 수는 없다. 도성민의 극 히 일부가 부왜하여 왜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을 뿐이었다. 문무관원으로 항부하는 자는 우대해 주겠다고 하였으나, 그러한 감언에 따라 왜적에 부역한 문무관은 거의 없었다. “文官附賊者는 오직 前工曹參議 成世寧 뿐이다”218)≪宣祖修正實錄≫권 26, 선조 25년 5월.라 한 것이 그것을 잘 대변한다.

 난초에 각처에서 있었던 부왜자들은 난이 장기화되면서 왜군들이 잔악한 본성을 드러내자 뉘우치게 되며, 의병의 봉기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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