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Ⅰ. 임진왜란
  • 5. 왜군 격퇴의 전략·전술
  • 1) 육전
  • (3) 관방설치와 청야책

(3) 관방설치와 청야책

 關防이란 要害地에 방어시설을 공고히 하는 것을 말한다. 즉 도로가 밀집하거나 험한 고개마루에 성을 축조하고 군사를 배치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다는 뜻이다.233)≪萬機要覽≫軍政篇 4, 關防. 산성 중심의 거점방어나 江灘防守도 이에 해당한다 하겠다. 관방시설은 본래 城柵과 姻臺·墩臺 등의 지상 시설물과 溝池·壕塹 등의 지하 시설물이 있으나 그 가운데 중심을 이루는 것은 역시 성책·구지라 할 수 있다.234) 車勇杰,<朝鮮前期 關防施設의 整備過程>(≪韓國史論≫7, 國史編纂委員會, 1980), 83∼84쪽. 그런데 조선 초기의 이러한 관방체계는 전쟁없이 오랜 기간을 내려오는 동안 해이해져서 임진왜란이 일어날 즈음에는 본래치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러한 관방실태는 왜란이 곧 있을 것이라는 확증이 있으면서부터 달라져 정부는 전쟁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축성 등 관방시설에 힘을 기울였다. 변 방 방비책은 왜군이 가장 먼저 침입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상도에서 시작되었다.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바 있는 김수가 경상도의 실정을 잘 안다하여 다시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임지에 도착하자 곧 왜란에 대비하여 병기의 보수 와 城池의 신축 및 증축에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永川·淸道·三嘉·大丘·星州·釜山·東萊·晉州·安東·尙州·左兵營·右兵營의 성을 신축 또는 증수하여 그런대로 성의 모습을 갖출 수는 있었다.235) 柳成龍,≪懲毖錄≫권 1. 그러나 무리한 진행으로 말미암아 도민들로부터 많은 불평을 듣게 되었다. 그런데 다른 지역에서는 음성이나 산성의 보수가 제대로 이루어진 것 같지 않으며 후방에서는 오직 황해도의 延安城만이 부사 신각에 의해 완벽한 보수가 이루어져서 왜침에 대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의 축조는 왜란중에 더욱 강조되었다. 郭再祐는 산성 수축의 필요성에 대하여 “安市城을 지켰기 때문에 고구려가 멸망하지 않았고, 卽墨城이 홀로 보존되었으므로 齊나라가 다시 일어날 수 있었으니, 城池의 수비를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236) 趙慶男,≪亂中雜錄≫권 4, 경자 2월.라고 하여 守城戰의 중요성을 주장했고, 수성을 위해서 평지의 성보다 산성의 수축을 강조하였다.

 수성의 중요성은 왜란중에 입증된 바 있다. 선조 26년(1592) 9월초 招討使 李廷馣의 연안대첩도 수성전이었으며, 이듬해 2월 전라관찰사 권율의 幸州大 捷도 산성의 이점을 이용하여 이룰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선조 26년 9월 이 후 명·일간에 강화교섭이 진행되는 기간 재차 왜침에 대비하여 산성의 수축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고, 야전보다도 수성전의 유리함을 아는 도체찰사 유성룡은 수성전을 펴기 위한 구체안을 선조에게 건의하기도 하였다.237)≪宣祖實錄≫권 46, 선조 26년 12월 무긴. 이것이 곧 산성방어 및 淸野策이다. 비변사 역시 왜적이 재차 침입할 경우 수성전에 대비하여 산성수축이 당면한 급무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적이 박두하면 백성들도 입성시켜 굳게 지키도록 하고 적이 멀리 가면 산성에서 나와 농사지을 수 있게 하고 민심을 의지할 수 있게 하여 전쟁초와 같은 일시의 奔潰를 막아 보자는 데서였다. 비변사에서 도원수에게 하달된 이 조치는 곽재우로 하여금 경상우도 축성의 工役을 관장토록 하고 선조 27년부터 일을 시작하라는 것이었다. 곽재우가 성주목사 겸 조방장의 직임을 갖고 삼가의 岳堅山城을 수축한 것은 이 때의 일이다.

 다음해 선조 28년에 곽재우는 진주목사 겸 조방장으로 악견산성뿐 아니라, 玄風 石門山城의 신축까지 관장하게 되나 곧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서 완성을 보지는 못했다. 그 후 선조 30년에 서둘러 석문산성을 수축하려 했으나 완성을 보기 전에 왜군이 재차 침입하였다.

 선조 29년 당시 조정에서 꼽히고 있던 경상도내의 산성으로는 金烏山城(善山)·天生山城(仁同)·富山山城(慶州)·악견산성(三嘉)·龍起山城(伽倻山)·公山山城(大丘)·火旺山城(昌寧)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금오산성과 천생산성은 동서로 서로 마주하고 있으면서 낙동강의 天險을 끼고 있어 중로의 요충으로 꼭 지켜야 할 곳이었으며, 부산산성과 악견산성도 긴요한 곳이라 의당 지켜야 할 곳으로 꼽혔다. 공산산성과 용기산성은 비록 대로의 요충은 아니었으나 이미 산성이 수축되어 있어서 수성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으며 화왕산성은 급히 보수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238) 李章熙,≪郭再祐硏究≫(養英閣, 1983), 214∼216쪽.

 적의 재차 침입이 예상되는 전라도에서도 성의 신축과 보수를 등한히 할 수 없었다. 선조 26년 12월 乾達山城과 修仁山城을 수축하였고 龜城山城(智異山)을 수축하였다. 이들 산성의 수축은 의승대장 유정에게 전담시켜 공역을 지휘케 하였다. 또한 長城縣監 李貴의 요청에 따라 승려 法堅에게 大禪帖文을 주어 笠巖山城을 수축케 하였으며, 행주대첩에서 전공을 세운 處英으로 하여금 남원산성을 수축케 하였다. 선조 28년 3월에는 都摠攝 義嚴에게 경기도의 요충인 驪州의 婆娑山城도 수축케 하였다. 이러한 각처의 축성은 장기전에 대 비한 중앙정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239) 李章熙,<壬辰倭亂 僧軍考>(≪李弘稙博士回甲紀念 韓國史學論叢≫, 新丘文化社, 1969), 351쪽. 축성에 동원된 사람들은 농민이 다수였지만 그들의 힘이 부족하여 의승군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그런데 산성의 신축 및 증수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곽재우 등이 수비한 화왕산성을 제외하면 별로 큰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는 정유재란이 일어난 뒤 곽재우가 다음과 같이 상소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지금 각처 산성이 모두 버려져서 군량과 무기를 보존하여 지킬 계책이 없으니 만약 많은 적병이 밀어닥쳐서 버리고 간다면 비록 關羽와 張飛 같은 용맹을 지녔거나張良·陳平 같은 지략을 가졌다 해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郭再祐,≪忘憂集≫권 1, 辭起復䟽 정유 9월).

 특히 정유재란 때는 왜군이 堅城固守의 대비책을 철저히 한 경상도지역으로 침입하지 않고 전라도지역을 택하였던 만큼 경상도지역에서의 전략은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왜란중에 크게 대두된 것은 「鳥嶺設關」 문제였다. 이것은 조선측에서 보다 명나라측에서 더 적극적이었다. 다음과 같이 明經略은 조령설관의 중요성에 대해 지적하였다.

듣건대 경상-道는 조령이 가장 험준하니 불가불 設關하여 방수해야 후일의 근심을 대비할 수 있으니 귀국의 善後策은 이보다 더 급한 것이 없다. 귀국이 王京을 지키고자 한다면 꼭 먼저 조령을 지켜야 한다(≪宣祖實錄≫권 39, 선조 26년 6월 무자).

 이에 대하여 조선은 조령이 비록 험한 요새이기는 하나 조령 이외에도 小白山脈을 넘는 고개의 갈래길이 많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지킬 수 없다고 하면서 반대의사를 표시하였다. 이에 대해 명나라측에서는 도순변사 신립이 조령과 같은 천험을 버리고 충주에서 대적한 실책을 예로 들면서 조령설관의 뜻을 강력히 나타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산을 의지하여 싸우는 것은 물을 의지하여 싸우는 것만 못하다’고 하면서 江灘墻守를 주장했다. 그러나 끈질긴 명측의 주장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으며 유성룡도 조령을 차단하는 계획이 가장 긴급하다 하여 설관을 추진하기로 하고 把截將 辛忠元으로 하여금 民丁을 모아 성을 축조하고 냇가의 물을 끌어 참호로 삼는 등 설관의 공역을 마칠 수 있었다.240) 車勇杰,<鳥嶺關防施設에 대한 硏究> I (≪史學硏究≫32, 韓國史學會, 1981), 9쪽. 조령설관이 끝나면 이어 신충원을 시켜 죽령의 설관도 맡기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물력이 다하여 이룰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측이 조령설관을 주장한 것과 조선측이 설관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반대한 이면에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즉 명측의 의도는 조정을 비롯한 소백산맥 위의 모든 險要處를 방비하면서 그 내지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소극적인 방어뿐만이 아니라 지구전을 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조선측은 명측에 의지하여 방수하려는 데 대해서는 찬동하면서도 그럴 경우 왜군이 머무는 연해지방과 멀리 떨어져 있게 되며, 따라서 왜군을 속히 구축하려는 의도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241) 車勇杰, 위의 글, 14쪽.

 이상에서 볼 때 왜란에 대비한 축성·設險 등 관방시설은 임진왜란 직전 보다 왜군이 남쪽으로 물러가고 명·일간에 강화회담이 논의되는 기간에 더 활발히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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