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Ⅱ. 정묘·병자호란
  • 3. 병자호란
  • 3) 남한산성 수어와 화전양론

3) 남한산성 수어와 화전양론

 일단 남한산성으로 들어온 인조는 12월 15일 이 성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다음과 같이 부서를 편성하였다. 都體察使에 金瑬, 協守使에 兪伯曾, 管餉使 에 羅萬甲을 임명하고, 訓鍊大將 申景禛에게 東城 望月臺를 지키게 하고, 李 穎達을 中軍으로 삼았으며, 摠戎使 具宏에게 南城을 지키게 하고, 수원부사 具仁垕를 부장으로 삼고, 李廓을 起復하여 중군을 삼았으며, 御營大將 李曙로 北城을 맡게 하고, 御營副使 元斗杓로 부장을 삼았으며, 守禦使 李時白으로 西城을 지키게 하고, 李稷을 중군으로 삼았다.

 원래 남한산성의 방비는 廣州鎭營에 소속된 여주·이천·양근·지평·파주 5개 읍의 군사와 강원도 원주와 경상도 안동·대구 등지의 군사를 관하에 소속시켜 남한산성 주변의 여러 진을 총괄 지휘하도록 되어 있어 병력 규모는 12,700명에 달하였다. 영남의 分防兵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나 여주목사 韓必遠·이천부사 曹明勖 양근군수 韓會一·지평현감 朴煥이 약간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에 들어오고, 파주목사 奇宗獻이 수백 명을 거느리고 들어와 구원하니 경군인 어영청·총융청·훈련도감군을 합하여 13,800명의 군사를 확보하게 되었다. 여기에 文·武·蔭官 200여 명, 宗室과 三醫司가 200여 명, 扈從官이 인솔한 노복이 300여 명이었으며, 이들도 군인과 함께 성을 나누어 맡아 지키게 하였다. 한편 도원수와 부원수 및 제도의 감사와 병사에게는 勤王의 군사를 모으도록 하고, 명에 告急使를 보내 來援을 청하기도 하였다. 당시 성안에는 精米 14,300여 석, 잡곡 3,700여 석, 皮穀 5,800여 석과 醬 220여 독이 있었다. 이것은 성안에 있는 군인과 백관이 50일 먹을 수 있는 분량이었으며, 절약한다 해도 60일에 불과한 양이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온 12월 15일 오후 늦게 홍제원 청진영에 들어갔던 정사 최명길과 부사 이경직이 남한산성으로 돌아왔다. 최명길은 급히 장계를 올려 “그들이 말하기를‘우리들의 행동은 오로지 화친하려는 일에 있는데, 너희 나라의 국민이 모두 흩어지고 국왕이 파천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마음이 편치 못하다. 만일 화친하려면 모름지기 장자와 대신과 斥和하는 사람을 보내야 한다. 그러면 즉시 여기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461) 위와 같음.라고 하였다. 이 때 적장은 살륙을 하지 않겠다는 등 조선측을 회유하려 하였다. 그것은 馬夫太가 청 태종에게 사람을 보내어 대병을 청하기 위한 시간을 얻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런데도 조선정부는 그들을 믿고 호조의 관원을 서울에 보내어 貨物을 취하여 화친하는데 쓸 준비를 하였으며, 各司에서 한 사람씩 도성에 들여보내 각 사를 看守하게 하였다. 그들이 회유책을 쓴 것은 아직 대군이 도착하지 않은 까닭에 잠시 감언으로 조선정부를 속인 것이었다. 적의 군사가 처음 도착했을 때는 그 숫자도 많지 않고 얼음길에 멀리 와서 형색이 말이 아니었고 마필도 모두 지쳐 있어서 조선군의 기습을 두려워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남한산성의 조선군이 이러한 청군의 허실을 모르고 성 밖으로 선뜻 출격하지 못하고 각도의 근왕병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 청군의 후속부대가 먼저 도착하여 남한산성을 포위하였다

 여하튼 최명길의 장계를 받은 조선조정은 청의 요구를 따르기로 하고 綾峯守 儞의 직위를 올려 君으로 봉하여 王弟라 칭하게 하고, 형조판서 沈諿을 임시로 대신의 직함을 주어 적진영에 보내어 화의를 논의하도록 하였다. 적진영에 들어간 심즙은 평생 거짓말을 한번도 하지 않은지라 적이라고 해서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하고 마부태가 묻는 말에 자신이 대신이 아니라 임시직함이고 능봉군도 종실이지 왕제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에 능봉군은 심즙의 말이 잘못된 것으로 심즙은 진짜 대신이고 자신도 진짜 왕제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朴■와 朴蘭英이 사신으로 심양에 갔다가 마부태에게 잡혀 와서 진중에 있었다. 마부태가 박난영에게 물어 능봉군의 말이 옳다 하니 뒤에 마부태가 속 임당한 것을 알고 박난영과 능봉군을 베어 죽이고 세자를 보내온 다음에야 화의를 논의할 수 있다고 하였다.462)≪仁祖實錄≫권 33, 인조 14넌 12월 병술.
李肯翊,≪燃藜室記述≫권 25, 仁祖朝故事本末 丙子虜亂丁丑南漢出城.

 심즙이 돌아와 성안으로 들어오니 조정에서는 인조가 대신들과 備邊司堂上을 불러 다시 화의에 관한 논의를 거듭하다가 좌의정 洪瑞鳳과 호조판서 金藎國을 다시 적진에 보내어 화의를 논의하도록 하였다. 조선측에서 왕자를 보내지 못한 이유로 鳳林大君과 麟坪大君이 강화도에 있으므로 당장 보낼 수 있는 입장이 못된다고 하자, 마부태는 본시 王弟를 보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왕자를 보내라고 했던 것인데, 즉시 세자를 보내지 않으면 일을 그르친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왕자는 마침 중전이 돌아가서 服을 벗지 못하였으니 멀리 갈 수 없을 것이라고 반대하였다. 일이 자기들 뜻대로 되지 않자 마부태는 군사를 풀어 성 밖을 에워싸고 오후부터는 사람과 物貨를 약탈하였다. 각사의 인원으로서 도성에 들어갔던 자와, 호조의 물화를 싣고 오는 사람들이 모두 적에게 함몰되었다. 해가 질 무렵 홀연히 적이 남문에 이른 것을 보고하니, 체찰부에서는 곧 수어사 이시백에게 곤장을 때려 斥候하지 못한 것을 책망하고 성문을 닫고 지켰다.

 이날밤에 영의정 金瑬, 좌의정 홍서봉 및 김신국·李聖求·최명길·韓汝溭, 張維·尹暉·洪■ 등이 세자를 적진에 보낼 것과 臣이나 황제로 칭할 것을 청하니 왕이 따르지 않았다. 예조판서 金尙憲이 이런 의논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이 건의를 한 자들을 죽여서 하늘을 함께 이고 살지 않겠다”고 외치니 김류가 비로소 잘못임을 깨닫고 죄를 청하였다. 이처럼 主和·主戰의 격돌이 계속되다가 18일에 이르러 絶和·主戰으로 결정하게 되어 인조는 다음과 같이 하교를 내렸다.

지금부터 군신상하가 함께 이 한 성을 지킬 것이니 화의는 이미 끊어졌고 오직 싸우는 일이 있을 뿐이다. 싸워 이기면 상하가 함께 생존할 수 있을 것이며, 이기지 못한다면 상하가 같이 죽을 것이다. 오직 죽음 가운데서 삶을 구하고 위험한 곳에서 편안함을 구하여 마음을 합치고 힘을 함께하여 분발하여 적을 감당하면 저 오랑캐 군사가 깊이 들어와 강하다 해도 약해지기 쉽다. 사방에서 원병이 계속 이르러 하늘이 우리를 돕는다면 가히 다 이길 수 있다(≪仁祖實錄≫권 33, 인조 14년 12월 무자).

 이어 북문수비의 책임을 맡았던 이서가 신병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원두표로서 대신하여 그 군졸을 거느리게 하고, 黃緝을 중군으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서 청군의 선봉은 12월 16일에 벌써 남한산성에 이르고,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서울에 입성한 대신 譚泰의 군도 한강을 건너서 남한산성을 포위하였다. 청 태종도 다음해인 인조 15년(1637) 정월 초하루에 남한산성 아래 炭川에서 20만의 청군을 結障하고 성 동쪽 望月峰에 올라 성안을 내려다보았다.

 포위를 당한 남한산성의 조선군은, 12월 18일에 어영부사 원두표의 군이 출전하여 청병 6명을 죽이고, 동월 20일 훈련대장 신경진의 군이 출전하여 청병 30명을 죽였다. 또 自募軍이 출성하여 청병 50여 명을 죽이는 등 적에게 다소의 손해를 입히기도 하였으나 이렇다 할 큰 싸움은 없었으며 혹한과 굶주림 속에서 성안의 참상은 형언키 어려웠다. 인조도 침구가 없이 지냈다는 것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청이 침입하여 어렵게 되자 조선은 명에 원병을 청하였다. 그러나 그 때의 명은 국내의 流賊 때문에 조선을 구원할 힘이 크게 미치지 못하였고, 겨우 登萊總兵 陳弘範을 시켜 舟師를 발하려 하였으나 그것도 風波로 인하여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성중에서는 각처에서 원병이 와서 산성의 포위망을 배후로부터 끊어주기를 기대하였으나 도원수·부원수의 군과 8도의 감사·병사의 군은 도중에서 적과 접전하다 패산하여 기대에 부응할 수 없었다.

 인조는 蠟書463) 잔 글씨로 써서 蠟으로 뭉쳐서 몰래 전하는 비밀편지.로서 각 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유시하기를 “군신상하가 외로운 성에 붙어 있어 매우 위태롭기가 한 오리의 털끝 같으니 급급한 형세를 경들도 상상하리라. 밤을 새워 달려와서 앞과 뒤에서 합세하여 적을 섬멸하여 君父의 위급함을 구하라”고 지시하였다. 또 도원수와 부원수에게도 유시를 내렸다. 그 내용은 “남한산성이 포위당한지 벌써 7일째가 된다. 따라서 내가 이 외로운 성에 있으나 위태롭고 급박함이 더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들으니 경들은 이미 대군을 거느리고 경기도 땅에 와 있다 하는데 급히 달려와서 君父의 위급함을 구하라”464) 李肯翊,≪燃藜室記述≫권 25, 仁祖朝故事本末 丙子虜亂丁丑南漢出城.는 것이었다. 그러나 좀체로 근왕병의 구원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2월 17일 국왕의 근왕 명령을 받은 각 도의 감사나 병사들은 서둘러 관할지역이 군사를 소집하였으나 많은 병력을 단시일내에 집결시키기 어려웠다. 군사를 불러모았다 해도 조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오합지졸에 불과했고, 이들을 지휘하는 수령들은 다수가 문관출신이어서 싸움에 나가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미리 겁부터 먹었다. 각 도의 근왕병의 활동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장 먼저 근왕병을 소집하여 수도권으로 들어온 것은 강원감사 趙廷虎였다. 적의 침입소식을 들은 그는 도내 각 읍의 수령에게 동원태세를 명령하였다. 근왕명령이 정식으로 하달되자 그는 原州牧使 李重吉 및 原州營將 權井吉과 함께 도내 병력 7천 명을 이끌고 12월 24일에 楊根으로 진군하였다. 그는 원주영장 권정길을 선봉장으로 삼아 남한산성으로 진출하여 산성과 연락을 취하도록 하고 자신은 양근에서 후속부대의 합류를 기다렸다. 12월 26일 권정길은 1천여 명의 선봉대를 이끌고 남한산성 가까이에 있는 黔丹山에 설진한 다음 사람을 보내어 강원도 근왕병의 상황을 성안에 알리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산성이 청군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태라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신 포성과 횃불로써 근왕병의 도착을 성내에 알렸다. 이를 알아차린 청군의 일부가 검단산으로 침입하였을 때 첫번째 공격은 격퇴했으나 결국 두번째 싸움에서는 증원된 청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거의 전군이 전사했다. 권정길을 비롯한 수십 명만이 겨우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본대가 있는 양근으로 퇴각했다. 강원감사 조정호는 그후 약화된 전투력을 보강하는 등 재기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인조의 南漢山城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도성을 지키던 留都大將 沈器遠은 방어의 어려움을 알고 도성의 군량을 삼각산으로 옮기고 삼각산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으나 적의 침공에 제대로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리하여 도성을 포기하고 光陵으로 退駐했으나 수하에는 군사가 없고 훈련도감 千㧾 李井吉의 뒤떨어진 포수 수백 명이 속해 있을 뿐이었다.

 한편 黃州 正方山城에 주둔하고 있던 도원수 金自點은 남침중인 적을 공격하여 다소의 타격을 주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兎山에서 청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막대한 병력은 손실했다. 그후 그는 양근 북쪽의 迷原에 도착하여 삼각산 전투에서 패한 유도대장 심기원의 잔류병과 함경감사 閔聖徽, 강원감사 조정호의 군사를 통합하여 1만 7천 명의 군사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때 청군이 利川·驪州 등지에 주둔하여 남한산성으로 통하는 길을 차단하였고, 조선측 부대들의 전투태세가 갖추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김자점과 심기원은 적의 동태를 살피고만 있다가 인조의 남한출성으로 시기를 놓치고 근왕병의 임무를 수정하지 못했다.

 함경감사 민성휘는 12월 22일에 근왕의 명을 받고 도내 각 고을의 군사를 집결시켜 동월 27일에 7천 명의 근왕병을 이끌고 北兵使 徐佑申과 함께 경기도 양근 방면으로 출전을 개시했다. 감사와 병사간에 진로에 대한 의견이 달랐으나 상관인 감사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 큰 길을 따라 남한산성으로 직행하자는 주장이 묵살되고 적을 피하여 양근으로 향했던 것이다. 미원에서 도원수 등의 군과 합류한 이후 북병사 서우신은 김자점에게 군사를 남한산성으로 진출시켜 포위된 산성의 위급을 구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묵살당했다. 이로써 남한산성의 위급을 구하는 데는 아무 도움을 주지 못했고 단지 난이 끝난 후 본도로 귀환하는 길에 함경도 방면을 거쳐 철군하는 몽고군의 만행을 견제하는 데 기여하였을 뿐이다.

 휘하의 2천 명의 군사를 가지고 慈母山城을 지키던 평안감사 洪命耈는 청 군이 평양성을 통과하여 남침을 계속하자 청군의 배후를 교란시키기로 계획하고, 부원수 申景瑗과 평안병사 柳琳에게 격문을 보내어 휘하병을 이끌고 평양으로 모이도록 하였다. 이 때 부원수 신경원은 淸將 多爾袞의 군과 寧邊 鐵甕山城에서 싸우다 패하여 포로가 됨으로써 근왕의 대열에 끼지 못하게 되었다. 홍명구는 유림의 부대와 합류하여 5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정월 26일에 金化에 진군하였다. 이 때 청군 6천여 명은 철원·연천·포천 등지에 진출하여 강원도 방면과 수도권과의 통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김화에 병력을 집결시킨 평안도 근왕병은 청군을 격파하고 수도권으로 진입하고자 하였다. 감사와 병사는 군대 배치를 놓고 이견을 보여서 논란을 벌였으나 결국 평지와 고지에 군사를 나누어 진을 설치하고 서로 협력하여 싸우기로 하였다. 인조 15년(1637) 정월 28일 근왕병을 경계하던 청군 6천여 명이 김화의 조선군 진영으로 공격해 왔다. 유림은 홍명구 진영에 사자를 급파하여 두 진영이 진을 합하여 청군에 대항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청군은 평지에 자리잡은 홍명구 진영을 포위하고 일부 병력을 홍명구 진영과 유림 진영 중간에 배치하여 유림군의 지원을 차단시켰다. 청군은 3, 4차에 걸쳐서 맹공을 퍼부었으나 조선군은 목책을 엄폐물로 삼고 총포를 연발하여 그들을 물리쳤다. 청군은 죽음을 무릅쓰고 화공으로 목책을 제거하고 조선군 진영에 달려들었다. 피아간의 백병전이 전개되었으나 결국 수적으로 열세한 조선군이 패하여 평안감사 홍명구, 순안 현감 許輅를 비롯한 조선진의 전장병이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한편 고지에 진을 설치한 평안병사 유림은 홍명구군이 무너지게 되면 그들에게로 공격이 가하질 것을 예상하고 방어태세의 만전을 기하였다. 홍명구군을 격파한 청군은 그날 오후 부대를 4개 대로 편성하여 유림군에 공격을 가 해왔다. 지리적으로 우세한 위치에 있었던 유림군은 적이 침입하자 미리 쌓아 두었던 바위를 굴려 청군을 혼란에 빠지게 하였고 이 틈을 이용하여 앞에 배치된 창검병들이 일제히 내달아 청군의 배후를 공격하였다. 1차 공격에 실패한 청군은 2차, 3차에 걸쳐서 공격을 반복하였으나 실패를 거듭하였다. 유림군측에서도 사상자가 속출하고 피로가 겹쳐서 이탈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병사 유림의 사기 진작으로 전의를 되찾게 된 조선군은 다시 적군의 침입에 대처하였다. 청군은 해질 무렵에 4차의 공격을 가해왔는데 뜻하지 않은 조선 매복병의 역공을 받고 많은 사상자를 내고 병기를 버린 채 앞을 다투어 도주하였다. 이에 조선군은 산 아래로 추격전을 전개하여 많은 청군을 사살하였다. 4회에 걸친 공격에서 청군은 병력의 태반을 잃고 철수했다.

 4차에 걸쳐 청군의 공격을 물리친 유림은 진중에 화살과 탄약이 다하여 적이 공격해와도 싸울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승세를 이용하여 지름길을 통해 남한산성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낭천에 당도한 유림의 근왕병은 이 곳에서 군비를 정돈한 다음, 정월 30일에 남한산성으로 진군을 개시하여 2월 3일에 가평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미 강화가 성립된 뒤였으므로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던 청군을 물리치는 데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충청감사 鄭世規는 인조 14년(l636) 12월 18일에 근왕의 명을 접하며 남한 산성의 포위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는 바로 각 읍 수령들로 하여금 근왕병을 모집하여 공주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7천여 명의 군사를 확보한 정세규는 충청병사 李義培로 선봉장을 삼아 그달 25일 공주를 출발하여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도록 하고, 자신은 尼城縣監 金弘翼·藍浦縣監 李慶 등과 함께 그 뒤를 따랐다. 다음해 정월 2일 이들 근왕병은 남한산성에서 남쪽으로 40리 떨어진 險川峴에 진을 치고 남한산성과의 연락을 취하려 하였다. 이 때 청군 7천여 명은 험천현 북쪽 20리 지점에서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는 근왕병의 통로를 봉쇄하고 있었다. 충청도 근왕병이 험천현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접한 청장 額駙場古利가 군사를 이끌고 험천현으로 공격해 왔다. 전투가 시작되자 충청병사 이의배는 적의 기세에 눌려 단신으로 진영을 이탈하여 몸을 감추었으나 니성현감 김홍익과 남포현감 이경 등은 역전 끝에 전사하였다. 병력의 태반을 상실한 충청감사 정세규는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려 하였으나 주위의 만류로 10일에 공주로 돌아갔다.

 인조 14년 12월 20일에 근왕명령을 받은 전라감사 李時昉은 6천여 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그달 29일에 전라병사 金俊龍과 함께 남한산성을 향하여 진군하였다. 이 때 華嚴寺의 승려 碧巖覺性도 義僧軍을 이끌고 근왕대열에 합세하였다. 정월 2일 陽智에 도착한 이시방은 전라병사 김준룡을 선봉장으로 삼아 군사 2천 명을 먼저 진군케 하고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그 뒤를 따랐다. 정월 4일 수원과 용인 사이에 있는 光敎山으로 진출하여 장기항전의 태세를 갖추고 남한산성과의 연락을 취하려 하였다. 이 때 험천현에서 충청도 근왕병을 격파한 적장 액부양고리는 병력 2천을 광교산 동쪽 일대에 배치하여 남한산성과의 연락을 차단하고, 주력 5천 명을 이끌고 광교산 주변으로 진군하여 총공격을 감행했다. 정월 5, 6일에 걸쳐서 일진일퇴의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졌으나 청장 액부양고리가 아군에 의해 전사함으로써 청군은 순식간에 전열이 와해되었다. 조선군은 이 틈을 타서 일제히 반격을 가하여 청군을 대파하였고 병력의 태반을 잃은 청군은 결국 패주하였다. 이 싸움은 병자호란중 청군과 싸운 최대의 전투이자 최초의 대승이기도 하였다.

 한편 관군 4천 명과 의승군 2천 명을 거느리고 양지에 집결한 전라감사 이시방은 중군인 영암군수 嚴愰을 선봉장으로 삼아 남한산성 진출을 서두르 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김준룡의 군이 수원으로 철수했다는 소식을 패전에 의한 퇴진으로 잘못 알고 정월 7일에 휘하군을 이끌고 공주 방면으로 철수했다. 또한 수원으로 철수한 전라병사 김준룡은 본대인 감사의 진영과 연락이 끊겨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형세를 관망하게 되어 남한산성의 위급을 타개하는 데는 큰 힘이 되지 못했다.

 인조 14년(1636) 12월 19일에 근왕의 명을 받은 경상감사 沈演은 8천 명 의 군사를 모아 경상좌병사 許完과 경상우병사 閔栐을 선봉으로 삼아 각각 병력 1천 명을 이끌고 12월 24일에 대구를 출발하여 충주·여주를 거쳐 남한산성 방면으로 진군하도록 하고, 자신은 6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뒤를 따랐다. 선봉부대는 서둘러 강행하여 군량과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병사들도 홑옷을 그대로 걸치고 길을 떠나 추위를 이기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진군하는 도중에 이탈자가 많이 발생하였으나 감사 심연의 독촉이 심하여 계속 행군하여 남한산성 동남쪽 40리 지점에 위치한 大雙嶺에 이르렀다. 좌병사 허완은 대쌍령 우측 고지에, 우병사 민영은 좌측 고지에 각기 진영을 설치하고 목책을 구축하였다.

 인조 15년 정월 3일 남한산성 동남쪽에 주둔한 6천 명의 청군이 먼저 좌 병사의 진영을 공격해 왔다. 좌병사의 군은 조총과 弓矢로써 힘을 다하여 싸웠으나 대패하고 좌병사 허완과 안동영장 宣若海 등 장수가 전사하였고 전군이 함몰되었다. 좌병사의 진영을 대파한 청군은 이어 우병사 민영의 진영으로 공격을 가해왔다. 청군은 근왕병의 총포·궁시의 사격을 받아 병력과 군마의 손상을 입고 후퇴하였다. 그러나 적극 공세를 취하던 아군진영에서 화약이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화약분배를 감독하던 수령 두 사람을 비롯한 수십 명의 병사가 폭사하여 혼란에 빠졌다. 청군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일제히 공격을 가하여 근왕병은 대패하고 우병사 민영 등 일군이 함몰하였다.

 이상에서 볼 때 근왕병은 광교전투와 김화싸움에서 전승을 거두는 등 활약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각 도의 근왕병은 대부분이 패하여 고립된 남한산성을 구원하는 데 힘이 되지 못했다. 이리하여 남한산성 안에서는 강화론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이를 찬성하는 수가 증가했다. 그들과 반대파와의 논쟁이 여러 번 거듭되었지만 주전파라고 해서 난국을 타개할 방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예조판서 김상헌, 이조참판 鄭蘊 등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강화론으로 기울어졌다. 인조는 이조판서 최명길에게 국서를 초하게 하고 좌의정 洪瑞鳳, 호조판서 金藎國 등을 청 진영에 보내어 和好를 청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청태종의 답서는 완강하여 인조가 친히 출성하여 군문에 항복하고 맹약을 깬 주모자 2, 3명을 결박하여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응하지 않고 주저하던 차에 강화 함락의 소식이 남한산성에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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