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Ⅱ. 정묘·병자호란
  • 3. 병자호란
  • 4) 의병의 봉기
  • (2) 다른 지역의 의병

(2) 다른 지역의 의병

 의병의 군세가 정묘호란 때 의병만은 못하나 평안도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특히 의주·평양·宣川·郭山 등지에서 의병의 활동이 두드러졌던 것 같다.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바 있는 崔孝一은 병자호란 때도 홀로 활약하여 적장을 사로잡는 등 전공을 세우다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후 의병을 일으켜 부원수 鄭忠信에게 의탁해 놓고 자신은 청에 들어가 거짓 내부하여 적의 장수가 된 뒤 계책을 써서 나라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했다.467)≪龍灣誌≫人物, 崔孝一. 江西 에 사는 전 萬戶 鄭志誠은 촌가에 있다가 난을 당하여 사람들을 따라 保寶山城에 들어갔다. 그는 졸지에 적의 기병이 이르러 성 밖에 있는 남녀 수백 명을 강제로 끌고가는 것을 보자 무장을 갖추고 말을 달려 적진에 뛰어들어 수 명을 죽였다. 적이 당황하여 그대로 달아나자 정지성은 끌려가던 사람들을 구제하여 돌아왔다. 성안에서 겁을 먹고 있던 사람들은 여기에서 힘을 얻어 비로소 생기를 찾아 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468)≪江西縣誌≫科宦, 鄭志誠.

 李汝覺은 난을 피하여 凌漢山城에 들어갔는데 定州牧使 安英南과 곽산군수 鄭賓이 서로 管城大將이 되고자 다투다가 안영남이 자살하자 정빈은 성을 지킬 계책을 찾지 못하고 휘하의 군사만 인솔하여 부원수가 있는 근처로 갔다. 이에 성안에 가득한 군사들도 궤산하기에 이르렀다. 이여각은 스스로 亞將이 되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힘을 다해 방수하여 성안 사람들을 보존했다. 이 공으로 그는 고산리첨사에 제수되었다. 洪天鑑은 담력과 용맹이 뛰어난 인물로 난중에 선천 劒山城에 들어가 의병장이 되어 청천강에 나가 싸우기를 자원하였다. 그 공으로 淸江僉使가 되었으며 죽은 뒤에는 장례원판결사에 추증되었다. 또 洪天祿은 의병장이 되어 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뒤에 절의로써 忠臣旋閭가 내렸다.

 황해도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다. 金應南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수문장에 이르렀다. 그는 길이 막혀 왕을 호종하지 못하게 되자 의병을 모집하여 滅惡山을 근거지로 삼고 적장을 참획하는 등의 공을 세웠다. 이를 의지하여 살아 남은 피란민들이 많았다. 김응남은 그 공으로 左副將에 제수되었고 후에 訓鍊院正이 증직되었다.469)≪平山邑誌≫人物, 金應南. 柳濈도 난중에 황해도에서 의병을 이끌고 힘써 싸워 많은 적을 참수하였고 그 공으로 訓鍊院副正에 제수되었다.470)≪海州邑誌≫上, 忠孝烈 柳濈.

 경기도에서는 강화성이 적에 포위되어 공격을 받을 때 의병이 혈전을 벌여 적 1천여 명을 살상했다.471) 趙慶男,≪續雜錄≫권 4, 인조 16년 7월 21일.

 경상도에서도 金湜會 등이 의병을 일으켜 여주에서 퇴각하는 경상감사 沈演의 군과 함께 조령과 죽령 사이를 잠행하였으나 청군이 침입해 온다는 와전으로 도산하여 무위로 끝났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있을 때도 自募軍이 성을 나가 적 50명을 살해하여 일시나마 성중 사람들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 자모군은 관군의 특공대로 볼 수도 있겠으나 의병으로 봄이 좋을 것 같다. 金集도 雨湖지방에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으나 적세가 매우 급하고 길이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병자호란 중에도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때와 같이 義僧軍의 활약이 있었다. 그 규모나 성과는 임진왜란 때의 의승군의 활약에 미치지 못하나 국난을 당하여 의승군이 봉기했다는 면에서는 같다. 정묘호란 때 의승군을 일으켜 활약한 虛白堂 明照大師는 병자호란 때도 의승군을 일으켜 義粟 수백여 석을 모곡하여 군량에 충당토록 하는 등 공을 세웠다. 조정에서 그를 가상히 여겨 「嘉善大夫國一都大禪師扶宗樹敎福國佑世悲智雙運義僧都大將登階」의 職牒을 내렸다.472) 李景奭 撰,<碧巖碑銘>(李能和,≪朝鮮佛敎通史≫, 新文館, 1918). 또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전공을 세운 바 있는 碧巖覺性은 지리산 화엄사에 있다가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戎服(군복)으로 갈아입고 起義하였다. 그는 남쪽 각 사찰에 격문을 보내 모인 수천 명의 의승군을 降魔軍이라 부르고 인조가 포위된 남한산성으로 향하다가 중도에서 적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갔다.473) 李章熙,<丁卯·丙子胡亂時 義兵 硏究>(≪國史館論叢≫30, 國史編纂委員會, 1991), 210쪽.

 이 밖에도 전라감사 李時昉이 右營兵과 親兵을 이끌고 공주로부터 천안에 나올 때 좌우도의 승군이 계속해서 이르고 있었던 것을 보면 관군과 함께 많은 의승군이 출동했음을 알 수 있다.474) 趙慶男,≪續雜錄≫권 4, 인조 14년 12월 26일.

 병자호란 때 의병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활약에 크게 미치지 못하며, 정묘호란 의병에 비해서도 부진했다. 그럼에도 임진왜란의 의병정신이 정묘호란으로 이어지고 다시 병자호란으로 이어져 관군의 무력을 의병이 대신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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