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Ⅱ. 정묘·병자호란
  • 3. 병자호란
  • 5) 강화 실함과 남한산성
  • (2) 인조의 남한출성

(2) 인조의 남한출성

 한편 남한산성에서는 적의 포위망 속에서 화·전양론이 팽팽히 맞서다가 주화론이 우세하여 인조의 出城이 목전에 다가오자 예조판서 金尙憲과 이조참판 정온 등은 화의를 반대하여 자결을 꾀하려다 실패했다. 이 때 청군은 강화에서 포로가 된 대군의 手書와 宰臣 尹昉과 韓興一 등의 狀啓를 보이면서 출성을 독촉하였다. 강화함락의 사실을 확인한 인조는 출성을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洪瑞鳳·崔鳴吉·金藎國 등이 적진을 왕복하며 항복 조건을 교섭하고, 청 진영에서도 龍骨大·馬夫太 등의 사신이 성중에 들어와서 조건을 제시한 결과 다음과 같은 약조에 합의하였다.

(1) 청과 조선은 군신의 의를 맺을 것.

(2) 명에서 받은 誥命冊印을 바치고 명과의 交好를 끊으며, 조선이 사용하는 명의 연호를 버릴 것.

(3) 조선 왕의 장자와 차자, 그리고 여러 대신의 아들(아들이 없는 자는 동생)을 인질로 청에 보낼 것.

(4) 청의 正朔을 받고, 萬壽·千秋·冬至·元旦과 그 밖의 慶吊時에 貢獻의 예를 행하며 사신을 보내어 奉表하되 이들 儀節은 명과의 舊例와 같이 할 것.

(5) 청이 명을 정벌할 때 조선은 기일을 어기지 말고 원군을 파견할 것.

(6) 청이 회군시에 椴島를 정벌할 때 조선은 원병과 병선을 보낼 것.

(7) 압록강을 건너간 후에 被擄人 도망자는 전송할 것.

(8) 내외제신과 혼인을 맺어 和好를 굳게 할 것.

(9) 조선은 新舊城垣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10) 조선의 대일교역은 종래대로 계속할 것.

(11) 조선 안에 있는 瓦爾喀人은 마땅히 쇄환할 것.

(12) 조선은 기묘년(인조 17년;1639)부터 歲幣를 보낼 것.

 이상 12조문은 무리한 것으로 조선으로서는 힘겨운 부담이며 고통이었다. 세폐의 품목과 수량은 다음과 같다.476)≪通文館志≫권 3, 方物數目 歲幣.

황금 100냥, 백은 1,000냥, 水牛角弓面 200副, 好大紙 1,000권, 好小紙 1,500 권, 豹皮 100장, 水獺皮 400장, 鹿皮 100장, 靑黍皮 300장, 茶 1,000포, 胡椒 10근, 蘇木 200근, 好腰刀 26把, 順刀 20把, 五爪龍文簾席 4장, 雜彩花席 40장, 白苧布 200필, 各色綿紬 2,000필, 各色細木綿 10,000필, 各色細麻布 400필, 麻布 1,400필, 米 10,000포.

 드디어 정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청의 강요대로 藍戎服을 입고 성안 에 울음소리가 가득한 가운데 서문으로 나아가 한강 동편 三田渡에서 「城下의 盟」을 행한 뒤 한강을 건너 도성으로 돌아왔다. 청은 왕자를 비롯한 강화의 俘虜를 일부 송환하고 군중에 유치하였던 조선의 세자·빈궁·봉림대군(뒤의 효종)을 인질로 삼고 미리 유치하였던 척화론의 주모자 吳達濟·尹集을 잡아 각 도의 군사를 거두어 瀋陽으로 돌아갔다. 平壤庶尹 洪翼漢도 뒤이어 잡혀 갔다. 홍익한·오달제·윤집 세 사람은 청 태종의 설득을 끝내 거절하고 심양에서 사형을 당했으니 이들을 三學士라 부른다.

 병자호란은 비록 한 달 남짓한 짧은 전쟁기간이었으나 그 피해는 임진왜란에 버금가는 큰 것이었으며, 조선으로서는 일찍이 당해보지 못한 일대 굴욕으로 결말을 맺었다.

 청군은 철수하는 도중 4월에 椴島의 東江鎭을 공격하였다. 이 때 태종은 貝勒 碩託과 명의 降將 공유덕·경중명 등에 명하여 용산에서 병선을 만들게 하였다. 조선측에서도 황해도의 병선을 얻어 그 준비를 갖추었으며, 항복조건에 따라 평안병사 柳琳을 首將, 의주부윤 林慶業을 副將으로 삼아 청군을 도와 싸우게 하였다. 임경업은 척후장 金礪器를 밀파하여 명 도독 沈世魁에게 피할 것을 은밀히 권하였다. 그러나 심세괴는 굴하지 않고 1만여 명의 군사와 함께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고 마침내 동강진은 17년만에 완전히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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