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Ⅱ. 정묘·병자호란
  • 3. 병자호란
  • 6) 전후처리와 조·청관계
  • (1) 전후처리문제

(1) 전후처리문제

 난이 끝난 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을 청으로 떠나보낸 인조의 마음도 아팠겠지만, 죽음의 길을 떠난 홍익한·윤집·오달제 등 3학사를 잃게 된 조야의 슬픔 또한 컸다. 그뿐 아니라 가족을 잃었거나, 포로로 청에 잡혀가서 생사를 알 수 없고 막연히 그들의 귀환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의 수심에 가득 찬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일단 전쟁이 매듭을 진 이상 그에 따른 공과를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강화도의 실함이 인조의 南漢出城을 재촉케 하였으니 우선 강화도 방수의 직임을 맡았던 장수들의 책임을 묻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먼저 강화유수 겸 주사대장으로 해상의 방어를 맡았던 張紳의 논죄가 대간과 전판서 金時讓의 강력한 주장으로 거론되었다. 그리하여 장신에게는 바다를 지키지 않고 도주한 죄로 賜死하되 사형을 결정하는 문안을 만들지 아니하고 왕이 명령하여 자살하도록 하는 형식을 취했다. 검찰사로서 강화 수비의 총책을 맡았던 김경징은 죽을 힘을 다하여 지키지 않고 도망한 죄과로 江界에 귀양갔다가 김시양과 참판 兪伯曾의 상소로 인하여 사헌부의 의논이 다시 일어나서 잡아다가 사사했다. 검찰부사로 강화도 수비의 부책임자였던 李敏求는 寧邊에 圍籬安置되었다. 충청수사 강진흔은 청군이 바다를 건너 강화도로 향할 때 적선 수척을 파괴하고 자기의 선척도 적의 포환을 맞고 부서지고 부상을 당하면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잘 싸웠으나 난이 끝난 후에 잘 싸우지 못하여 적이 바다를 건너게 했다는 죄명으로 먼 곳에 귀양보내졌는데 대간이 다시 잡아다가 梟示하기를 청하여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 충청수영의 군관과 병졸들은 원통한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통곡했다.

 한편 강화부성이 함락될 때 전현직 관료나 아직 벼슬에 나가지 않은 많은 선비들이 순절하였으여, 많은 부녀자들이 바다에 뛰어들거나 목을 매어 절개를 지켰다. 난이 끝나자 이들의 충절과 절개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는 벼슬을 추증하거나 旌門을 내렸으며 단을 설치하여 죽은 사람들을 제사하여 그들의 넋을 위로하기도 하였다.477) 李肯翊,≪燃藜室記述≫권 26, 仁祖朝故事本末 江華殉節人. 또한 남한산성 및 金化에서 싸우다 죽은 군인에게 특전을 주고, 險川峴·雙嶺·강화에서 싸우다 죽은 전사자 2천 6백여 명에게도 恤典을 시행하였으며, 전사자의 부모에게는 耗租 2석씩을 각각 지급토록 했다.478)≪仁祖實錄≫권 36, 인조 16년 정월 기묘. 관서지방에서 싸우다 전사한 자와 적을 죽여 공을 세운 사람에게도 일률적으로 시상했다.479) 위와 같음.

 적의 소굴이 되었던 경기지역은 다른 지역보다도 폐해가 컸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먹을 것과 농사지을 씨앗이 없는데다 농우마저 빼앗겨서 살길을 잃고 떠돌아 다니며 걸식을 하는 형편이었으므로 春耕의 희망마저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중앙정부는 賑恤廳의 곡식을 각 고을에 옮겨 기민을 도탄에서 구제하고 스스로 耕種에 힘쓰도록 권장하여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였다.480)≪仁祖實錄≫권 36, 인조 16년 정월 신사. 그러나 모두에게 고루 힘이 미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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