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Ⅱ. 정묘·병자호란
  • 3. 병자호란
  • 6) 전후처리와 조·청관계
  • (2) 반청의식의 고조

(2) 반청의식의 고조

 난 후에 조·청 두 나라 관계는 굳어가는 宗藩關係 속에 위압과 이에 대한 복종이 강요되어 갔다. 앞서 말했듯이 3학사는 斥和敗盟의 책임자로 참형을 당했고, 조선의 세자와 봉림대군과 대신의 자제들이 심양에 계속 억류되었다. 또한 척화반청이라는 구실로 많은 조신들이 곤욕을 겪어야 했다. 이들은 청의 강요로 체포되어 호송된 사람도 있었으나, 청의 관원이 직접 조선에 들어와 잡아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청나라 황제의 모진 학대와 갖가지 유혹에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初志를 지켜 민족의 정신을 선양했다.

 조선은 병자호란을 종결시키기 위한 화의교섭을 통하여 명과의 국교를 끊고 청조로부터 「조선국왕」으로 책봉받을 것을 약조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청 태종은 인조 15년(1637) 11월에 龍骨大·馬夫太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인조를 「조선국왕」으로 책봉함으로써 군신관계를 재확인하였다.481)≪仁祖實錄≫권 35, 인조 15년 11월 갑신. 이로부터 조선은 청국의 속국임이 확인된 셈이다.

 청국은 또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항복의 예를 행한 치욕스러운 장소인 三田渡에 청 태종의 공덕을 칭송하고 청군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비를 세울 것을 조선에 강요하였다. 이는 조선을 정복한 사실을 금석문으로 오랫동안 후세에 남기기 위함이었다. 이에 조선에서는 청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시일을 끌어가면서 청국의 조선에 대한 관심과 경계가 소홀해지기를 기다려 그 치욕을 모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청의 강압에 못이겨 인조 15년 11월에 張維·趙希逸·李景奭 등에게 비문의 초안을 작성케 하여 그 초안을 청국 사신에게 전달했다. 이 초안을 심양에서 한인학자들을 통해 검토해 보니 내용이 소략할 뿐 아니라 장유가 지은 초안은 은연중에 황제를 얕잡아 보는 대목도 있다고 하여 청은 성의있는 내용의 비문을 다시 지을 것을 강요했다. 인조는 여러 문신들에게 새로 지어 올릴 것을 명했으나 청 태종을 찬양하는 글을 지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인조는 다시 대제학 이경석에게 짓게 하였으며 이것은 다시 심양에 보내져서 검토되어 최종적인 문안으로 결정되었다. 조선에서는 비문을 새기고 비각을 건립하는 등 서둘러서 마침내 인조 17년(1639) 2월에 청나라 사신 마부태 및 吳超의 감독하에 삼전도 나룻가에 비를 세웠다. 비의 공식명칭은 「大淸皇帝功德碑」이며, 일명 「三田渡 汗碑」라고도 한다.

 청국정부와 청나라 장수들은 인질로 끌고간 대신과 자제들은 물론, 왕자와 세자에게까지도 온갖 학대와 모욕을 일삼았으며, 조선정부에 毁城과 병기파기를 강요하는 등 억압과 강요가 날이 갈수록 더했다. 또한 왕세자와 왕자 그리고 인질로 잡혀간 여러 사람들에 대한 의식주의 대우도 날이 갈수록 나빠져서 본국으로부터의 공급이 번거로워졌다. 인조 19년 말에는 세자와 왕자 館所에 농경지를 주어 식량을 자영자급하도록 하였다.482)≪仁祖實錄≫권 42, 인조 19년 12월 계해. 이 때문에 인조 20년 4월부터는 본국에서 농군을 보내어 농사를 지어 세자 등의 식량을 마련해야 하는 형편이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굳건해진 崇明思想과 조선민중의 항쟁의식으로 고조된 反淸감정은 연호 사용문제에서도 나타난다. 인조가 남한출성에 앞서 합의한 강화조약의 기본 원칙에는 연호문제가 주요 사안으로 채택되었다. 그것은 조선이 지금까지 사용해 오던 명의 「崇禎」 연호를 버리고 청의 「崇德」이라는 연호를 사용한다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에도 수개월 간은 제대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483)≪仁祖實錄≫권 36, 인조 16년 정월 무인. 이러한 현상은 중앙의 각 관아에서 뿐 아니라, 지방관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청은 수차에 걸쳐서 조선에 외교적 압력을 가하여 청국의 연호만을 쓸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중신들은 강하게 반대의사를 표시하고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는 것을 끝까지 거절하였다. 결국 인조는 동왕 15년 5월에 공사문서에 청나라 연호인 숭덕을 사용할 것을 명했으니 그것은 이 문제로 청나라와 불필요한 분쟁을 막자는데서였다. 그러나 개인 문서나 祭享祝詞에는 의례히 명의 연호가 사용되었으며, 명이 망한 뒤에도 「崇禎紀元之後某年」, 「崇禎紀元後何干支」 등으로 명나라 최후의 연호를 사용했다.

 이것이 거북할 때는 청이 연호 대신으로 「上之某年」, 「當宁某年」 등으로 표기하였으니 이것은 반청의식이 쉽게 없어지지 않은 때문이었다. 인조도 전쟁이 끝난 뒤인 동왕 16년(1638) 정월 초하룻날에 궁정에 歲拜席을 시설하고 서쪽으로 중원(明)을 향하여 명나라 황제에게 哭拜를 하며 숭명정신을 강조하였고 청을 胡虜·虜酋 등으로 불러 侮淸斥淸의 열을 고취하기도 하였다.

 반청의식이 고조되어가는 상황에서 청나라는 수차 조선군의 출병을 요구해왔다. 병자호란이 끝난 지 7개월이 지난 인조 15년 9월에 청 태종은 명의 錦州를 공격하기 위해 전군에 동원령을 내리고 조선에도 사신을 보내어 10월 초순까지 5천 명 규모의 원병을 보낼 것을 요구해 왔다. 조선조정에서는 중신회의를 열고 그 대책을 논의하며 찬·반양론이 맞섰으나 결국 파병이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날 격론을 벌이는 사이에 이미 기한이 늦어졌으며 이로 인해 청 태종은 크게 노하여 사신을 보내어 파병반대자를 청으로 압송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파병을 반대한 인물은 병자호란 때 주화론을 폈던 최명길이었다. 그는 자신이 청에 가서 파병요구에 응할 수 없다는 조선의 처지를 설명하겠다고 자원하였다. 최명길은 중국에 들어가서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명과 조선의 의리관계와 조선의 형편상 동원능력이 부족함을 들어 청의 파병요구를 들어줄 수 없음을 역설하였다. 청 태종은 최명길의 말을 듣고 파병 거절을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인조 16년 3월에 청 태종은 재차 조선에 국서를 보내어 5천 명 규모의 원 병 파견을 요청해 왔다. 논의 끝에 파병하기로 하고 李時英을 上將, 柳琳을 副將으로 삼아 포수·궁수 혼성의 5천 병력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3월 20일 에 출발하여 4월 5일에 通遠堡에 이르러 마부태가 이끄는 청군과 합류했다. 그러나 청 태종은 조선이 고의로 파병 기일을 어겼다고 트집을 잡으면서 원정군을 그대로 돌려보내고 국서를 보내 조선을 문책하면서 다시 침입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청 태종은 이듬해인 인조 17년 10월, 또 명을 정벌할 계획을 세우고 조선 에 수군 파견과 군량미 조달을 요청하였다. 조선정부는 평안병사 임경업을 상장, 황해병사 李浣을 부장으로 삼고, 전선 120척, 병력 6천 명, 군량 1만 포를 동원하여 12월 10일에 의주를 떠나 遼河河口 牛莊으로 이동하도록 하였다. 다음해 정월, 청군이 명의 금주를 공격하였다. 그런데 청군과 함께 참전 한 조선군의 상장 임경업은 청군 모르게 40여 척의 병선을 중도에서 빼돌리고 남은 80여 척의 선단만을 이끌고 大凌河·小凌河 하구를 거쳐 蓋州에 도착한 다음 더이상 나가지 않고 명·청 양군의 대결을 관망하고 있었다. 이를 알아챈 청 태종은 임경업에게 조선 전함 3척을 명과의 경계선인 登州 앞바다에 척후로 보내어 명군의 움직임을 살피게 하고 임경엄의 조선 수군을 철저히 감시하였다. 그러나 임경업은 이 척후선으로 명군과 은밀히·내통하여 청군의 동태를 명 진영에 제보하고 조선의 파병이 불가피한 것임을 알리게 하였다.

 임경업의 반청행위가 탄로되자 청 태종은 임경업의 군대를 조선에 돌려보내고 심양에 억류중인 소현세자에게 사람을 보내 항의를 하는 한편, 그해 11월 용골대 등을 조선에 보내 강화조약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엄중 항의하였다.

 인조 19년 청 태종은 또 원군의 파견을 요청하며 조선은 2천 명에 달하는 포수·기병·마부를 동원하여 통제사 유림을 主將으로 삼아 출동케 하였다. 조선군은 심양에 당도하여 청 태종의 열병을 받고 5월에 청군과 함께 금주싸움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명·청 양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전개하는 데도 조선군의 주장 유림은 병을 이유로 싸움에 나가지 않고 은밀히 군중에 명하여 공포를 쏘아 명군에 피해를 입히지 말도록 하였다. 조선군이 대명전에서 싸움을 기피하는 것을 알아차린 청은 조선군의 주장을 교체시킬 것과 포수 5백 명을 증원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정부는 통제사 柳廷益을 유림의 후임으로 삼아 포수 5백 명을 이끌고 금주로 향하도록 했다.

 수차에 걸친 조선원군의 파병은 청의 일방적인 강압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조선군이 전투에 임하는 자세는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따라서 조선군의 협력을 얻어 명을 치자는 청의 의도는 실효를 거둘 수 없었고 조선의 반감만 증폭시켜 청에 대한 적개심만 조장시키는 격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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