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1. 사림의 득세
  • 2) 척신세력의 약화

2) 척신세력의 약화

 윤원형은 李樑을 제거한 뒤 자신의 딸을 德興君의 아들과 혼인시켜 명종 사후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려 하였으나 명종의 반대로 실현하지 못했으며, 또한 당시 이조판서였던 權轍을 자신 편으로 끌어 들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윤원형은 결국 자신의 권력의 배경이 되었던 문정왕후의 죽음과 함께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명종 20년(1565) 4월의 문정왕후의 죽음은 훈구세력이 역사 무대에서 점차 사라지고 사림세력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는 16세기 역사의 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러한 정치세력의 획기적인 교체를 가능케 하였던 것은 기본적으로는 이 시기의 시대적 대세였던 사림세력의 성장의 결과였지만, 직접적인 계기는 문정왕후의 죽음이었다. 그녀는 명종의 즉위와 함께 수렴청정을 시작하였고 국왕의 친정이후에도 소윤세력의 보호막 역할을 하면서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국을 주도해 간 실질적인 실력자였다. 윤원형이 문정왕후가 60세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자 사후의 정국을 걱정할 정도로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윤세력의 몰락의 조짐은 이미 문정왕후의 사망 이전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소윤세력은 사림계의 공론에 입각한 정치를 묵살하고 政曹大臣 중심의 지배체제를 바탕으로 언관을 이용한 반대세력의 탄핵과 같은 강압적 방법으로 정국을 운영하면서 주도권을 장악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나타난 비공론성은 전랑직을 중심으로 하는 신진세력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소윤세력은 신진세력의 비판을 강압적인 방법으로 일시적으로 견제할 수는 있었으나 점차 확대되고 있는 사림파의 영향력을 계속적으로 막을 수 없었으며, 오히려 공론에 입각한 그들의 공격으로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갔다. 한편으로 대응세력으로 나타난 이량세력이 왕권을 배경으로 세력을 확대하면서 소윤세력은 점차 약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훈척세력은 관권을 이용한 사적인 이익 추구와 인사권의 전횡으로 민생의 파탄과 관료 사회의 기강 문란을 야기시키고 있었다. 특히 이 시기 훈구파에 의한 사치 생활을 위한 축재 행위는 백성들의 생활에 큰 피해를 가져왔다. 이에 따라 백성들은 국가의 수취체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권세가에 흡수 또는 유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유망민 중에는 일부는 도적이 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상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명종 연간에는 많은 민란이 일어났는데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고 오래 지속된 난은 1559년에서 1562년에 걸쳐 지속된 임꺽정의 난이었다. 이 난은 황해도를 중심으로 경기·평안·강원도에 걸쳐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이 난의 원인은 황해도 일대의 지역민이 공동으로 이용하였던 갈대밭을 권세가들이 개간을 구실로 소유권을 장악함으로써 야기되었다. 이 난은 진압되기는 했지만 바로 훈구정권의 몰락과 사림정권의 등장으로 연결되었다. 당시 이러한 사회경제적 모순은 농촌사회에 기반을 둔 사림세력이 등장할 수 있었던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 사림세력은 이러한 국가 권력을 이용한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권신들의 전횡을 비판하면서 성장하여 갔던 것이다.

 문정왕후 사후 이러한 훈척세력의 몰락을 가속화시킨 것은 사림계 言官과 지방의 유생들이었다. 이들 사림세력들은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곧 바로 척신세력의 상징이었던 普雨와 윤원형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였다. 보우에 대한 탄핵은 유생의 空館사태까지 불러온 이후 결국 6월에 제주 유배로 결말이 나고, 곧이어 8월에는 대사헌 李繹, 대사간 朴淳을 중심으로 한 양사에서 영의정 윤원형을 탄핵하였다.0023)≪明宗實錄≫ 권 31, 명종 20년 8월 정묘. 이는 윤원형이 宗社에 功이 있고 문정왕후의 동기라는 이유로 윤허받지 못하다가 결국 削奪官職 放歸田里로 처리되었다.0024)≪明宗實錄≫ 권 31, 명종 20년 8월 신묘. 윤원형 치죄 이후 소윤세력이었던 尹春年·黃大任 등이 정계에서 축출되면서 소윤세력은 정계에서 사라졌고 따라서 정상적인 사림정치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문정왕후를 정점으로 척신세력에 의해 운영되던 정국은 문정왕후의 사망과 윤원형의 축출 이후 사림계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의 척신세력의 잔재 청산은 사적으로 연결된 국왕과 권신과의 특별한 관계로 인해 단번에 이 모든 것을 해소할 수는 없었다. 권신과 밀착되었던 대부분의 관료들은 여전히 관료사회 내에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궁실과도 관련된 권신들의 물적 기반은 윤원형이 축출된 이후에도 쉽게 제거되지 못하였다. 실제로 당시 윤원형과 연결되어 거론된 인물은 윤춘년 등 소수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는 윤원형의 집권이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장기간 지속되면서 직접·간접으로 관계가 없는 인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명종 또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母后의 영향력하에 있었다고는 하나 척신정치의 형성과 전개에 책임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었고, 따라서 척신정치의 청산 작업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한편 사림계는 윤원형 제거 이후 계속해서 20여 년간 지속되었던 척신정치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움직임을 표면화하였다. 이를 위해 일부이긴 하지만 을사피화인에 대한 신원이 제기되었다. 그 결과 盧守愼·柳希春·白仁傑·李元祿 등 을사피화인에 대한 減刑·放還·職牒還給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을사인의 신원은 과거 정치의 청산이라는 면과 함께 사림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정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이와 함께 關西지방 船運의 금지, 內需司 印信의 제거, 禪敎 兩宗의 혁파, 海澤 折受의 금지0025)≪明宗實錄≫ 권 31, 명종 20년 12월 계미.
≪明宗實錄≫권 32, 명종 21년 4월 신미·경진·신사.
≪明宗實錄≫권 33, 명종 21년 6월 정묘.
등으로 권신들이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들도 혁파하였다.

 그러나 이로서 훈척세력이 완전히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윤원형 사후에도 왕권과 결부되어 다시 조정에 복귀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당시 명종은 문정왕후 사후 급격히 약화되어 가는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이들을 다시 등용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문정왕후 사후 尹百源·李樑을 近道로 移配하라는 傳旨를 내리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한편으로는 이량의 무리가 심통원의 도움을 받아 放還을 꾀하고 또한 이들이 다시 敍用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해지면서 사림계를 불안케 하고 있었다.

 소윤세력의 몰락 이후 정국은 국왕 중심으로 운영되는 가운데, 정계는 크게 沈通源으로 대표되는 沈家勢力과 사림파의 양체제로 개편되었다. 심가세력은 윤원형·이량으로 대표되는 척신세력이 제거된 상황에서 그 공백을 메워 나갔다. 이들은 앞의 두 세력의 몰락을 정치적 교훈으로 삼아 윤원형이나 이량처럼 擅權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전보다 강해진 왕권의 견제하에 조심성을 띠었다.

 한편 심가세력 중에서 명종과 연결되어 이량을 제거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沈鋼·沈義謙 父子는 이후 영향력이 더욱 확대되었다. 물론 이들 부자는 당시 사류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등 이전의 척신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 것은 사실이다. 심강의 父로 영의정을 역임한 沈連源은 金安國의 문인으로 친사림적인 인물이었으며, 심강도 명종 16년(1561) 임백령의 시호문제로 朴淳과 朴謹元이 위험에 처했을 때 그를 보호한 바 있었다. 심씨 외척은 윤원형·이량 등과 비교하여 그 권세가 약화되어 조심하는 면이 있었다고 하나, 그 세력이 커지는 것과 함께 사림세력의 그들에 대한 논핵은 그만큼 어려워졌다. 특히 仁順王后 심씨와 심의겸은 명종 후의 儲副를 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이후 그들의 영향력은 선조 연간 사림정치 시대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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