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1. 붕당정치의 성립
  • 2) 인조반정 이후의 공존체제

2) 인조반정 이후의 공존체제

 반정 후에는 숙청 작업과 더불어 공신 중심 인물들에 의해 새로운 정권에 참여시킬 인물들의 선별 작업이 행하여졌다.0093)이하 인조대 정국의 전체적인 추이에 대해서는 吳洙彰,<仁祖代 政治勢力의 動向>(≪韓國史論≫13, 서울大, 1985) 참조. 거사 직후에 尹昉·李元翼·李廷龜·申欽·鄭曄·吳允謙·鄭經世·李睟光·徐渻·朴東善 등 대북의 전횡에 반대하다 축출당했거나 자진해 퇴거하였던 인사들이 대거 불려들어와 당상관직을 제수받았다. 이러한 기준은 하위 관직에도 적용되어 여러 차례에 걸쳐 60여 명에 대하여 6품직 서용이 이루어졌다. 최명길은 이들을 ‘직언하는 선비’와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민간에서 독서하는 자’라고 표현하였다. 또한 당시 사림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산림에 대한 적극적인 포섭 정책이 추진되어, 반정 후에 김장생·張顯光·朴知誡 등을 바로 조정에 불러들였으며 인조 원년(1623) 5월에는 그들을 위하여 성균관에 정원 3인인 종4품의 司業을 새로 설치하였다.0094)禹仁秀,≪17世紀 山林의 勢力 基盤과 政治的 機能≫(慶北大 博士學位論文, 1992), 57∼67쪽.

 그러나 당색에 대해 아무런 논란없이 등용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가장 주류를 이룬 논의는 정엽이 경연에서 말한 바와 같이, 광해조의 폐모론에 불참했다는 점을 들어 서인의 우선권을 내세운 후, 남인이나 소북이라도 쓸만한 인재가 있으면 수용하되 대북만은 조정에서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신 이귀와 같은 경우 골자는 정엽의 입장과 같으나, 폐모정청에 참여한 것과 같은 하자도 본심에서가 아니었다면 용서하여야 하며 나아가 폐모론에 대한 자취를 없애 인심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한층 관대한 주장을 폈다. 거기에 비해 김장생과 김상헌 등은 폐모정청 참여 등 잘못이 있는 자들에 대한 배격을 좀더 강조하면서, 은혜만을 베풀어 폐단에 흐른다고 당시 인사정책을 비판하였다.

 이들에 비해 이원익으로 대표되는 남인은 인물 등용을 당색과 연결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는데, 반정 직후 한창 숙청과 등용이 행하여질 때의 이 주장은 우세한 입장의 서인을 의식하고 군주의 권위를 빌어 남인의 정치적 입장을 확보하려는 노력이었다. 국왕 인조는 인물을 광범위하게 등용하는 데 가장 적극적이어서 누구도 주장하지 못한 대북계열의 등용까지도 고려하고 있음을 나타냈다.

 반정으로 인한 인물의 선별과 등용 작업은 반정 후 2년 반이 지난 인조 3년 가을까지는 일단락되었다. 반정 직후부터 인조 3년 8월까지 2년 6개월간의 인사기록을≪仁祖實錄≫을 통해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중앙의 6품 이상 관직과, 부윤 및 관찰사로 등용된 인물들은 모두 164명에 이른다. 가장 큰 권한을 행사한 이들은 물론 반정공신들이었지만, 형식상으로 당시의 인사 관행을 완전히 뛰어넘은 것은 아니었다. 큰 공헌을 하여 1등공신이 된 최명길을 예로 들더라도 반정 후 처음 임명된 관직은 종6품 吏曹佐郞이었다.

 164명 중 129명에 대해 당색을 확인 또는 추정할 수 있는데 그 중 서인은 82명으로 64%의 비율을 보였다. 남인은 35명, 북인은 12명으로서 각각 27%와 9%의 비율을 보였다. 특히 남인 35명의 숫자는 서인에 대해서 43%에 이른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서인의 우선권을 주장하면서 남인에게도 차별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당시의 일반적인 인물 등용 논의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서인이 주도권을 장악한 가운데 그들의 정국주도에 파탄이 오지 않을 정도의 남인이 등용되었고 북인은 그 세력이 도태된 상황에서 소수의 인물들만이 붕당이라는 테두리를 떠나 개인의 경력이나 능력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다.

 선조 연간에 성립되어 다양한 분기와 대립을 보이던 붕당간의 정치질서는 이와 같이 인조대에 들어와 일단 서인과 남인이 공존하는 체제로 안정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질서는 어느 정도 논리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우선 복수 붕당의 존재는 대립과 갈등을 빚어내게 마련이었으므로, 거기에 대한 당시인들의 견해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인조 15년(1637)에 사간원에서 올린 啓에서는 ‘是非之心’은 누구나 지니고 있으므로 “의견이 다른 것을 억지로 같게 할 수는 없다고 하고, 논의할 때 크게 다른 점이 있으면 극언으로 힘껏 싸워 자기의 의견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신하들 사이의 대립을 합리화하는 논리였다. 鄭經世와 李廷龜는 국왕 앞에서도 그런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였다. 그들은 신하들간의 대립을 추궁하는 인조에게, “시비를 가리는 것은 君子의 일이며 각자 소견을 가지고 싸운다면 비록 不協함이 있더라도 무슨 害가 되겠느냐”고 하여 조정에서의 건전한 대립을 옹호하였다.

 歐陽修나 朱熹의 주장에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新儒學의 붕당론은, “君子는 같은 道로써 眞朋을 이루고 소인은 같은 利로써 僞朋을 이루므로 君主가 군자의 진붕을 등용할 때 천하가 다스려진다”는 것이었다. 또 “賢忠한 자들이라면 그 당이 작음을 걱정하되 奸邪한 자들이라면 철저히 몰아내고 국왕을 군자의 당에 끌어넣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붕당관은 조선 건국 당시에 그 이념적 기반을 마련한 鄭道傳이 이미 개진한 바 있거니와,0095)韓永愚,≪鄭道傳思想의 硏究≫改正版 (서울大 출판부, 1983), 142∼143쪽. 사림파의 정계 장악에 따라 16세기에 이미 일반화되었고 특히 “朋黨을 미워하여 없애려 하면 종종 나라가 망하는 데에 이른다”는 귀절은 계속 되풀이되었다.0096)사림파의 신유학적 붕당론 도입에 대해서는 李泰鎭,≪朝鮮後期의 政治와 軍營制變遷≫(韓國硏究院, 1985), 39∼45쪽 참조.

 그러나 17세기의 붕당 인식이 위와 같은 내용에 그칠 수는 없었다. 실제 정치에서 군자당과 소인당이 확연히 구분되는 상황을 상정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당시의 붕당은 학통과 가문에 따라 전승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구양수나 주희의 붕당론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자신의 당이 君子黨임을 주장하는 한 그것과 대립되는 黨은 소인당이 될 수밖에 없으므로 상대방의 당을 인정할 수 없게 된다. 그러한 상태에서 주희의 말대로 “소인들의 무리를 모조리 몰아내어 자기들이 人才를 쓰는 데 해가 없도록 하려 한다”면 상대당에 대한 심한 탄압이 가해져 복수 붕당에 의한 정치는 파탄에 달할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정치인들은 조선 붕당의 실제 상황을 이해하고 거기에 맞는 정치를 운영하려 하였다. 趙翼과 같은 경우 “지금의 黨이란 한쪽이 모두 군자이고 다른 한쪽이 모두 소인인 것이 아니며 각각에 善人과 不善人이 있습니다. 만일 한쪽만을 쓰고 다른 한쪽을 모두 버린다면 크게 옳지 않습니다”0097)≪仁祖實錄≫권 20, 인조 7년 윤4월 갑자.라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두루 나타난다. 兪伯曾은 당시 붕당에 대해 조익과 같은 인식 위에서 붕당들 사이의 調和와 保合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보다는 是非의 분별과 公論을 강조하고 당론을 배격하는 인조에게 공론에 입각한 반대당 공격을 공공연하게 합리화하였다.

殿下께서는 (臣下들의) 자기와 다른 자에 대한 배격을 미워할 줄만 아시고 나라를 위하여 원망을 사는 것이 가상한 것임을 모르십니다. 오늘날 조정에서 자기와 다른 자를 끝내 배격하지 못하게 한다면, 꼭 서인이 서인을 탄핵하고 남인이 남인을 탄핵하며 소북이 소북을 탄핵한 다음에야 公論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仁祖實錄≫권 53, 인조 8년 3월 병오).

 이와 같은 붕당간의 상호 비판에 대한 합의는 많은 사람들의 발언을 통해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국왕 인조는 붕당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면서 서인의 정국 주도를 견제하였고,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김류·최명길 등 일부 반정공신들이 그러한 입장에 가세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는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큰 권한에도 불구하고 일반 士類들에게 설득력을 가지지 못하였고 당사자들이 정치권에서 사라짐과 함께 영향력을 잃었다.

 한편 붕당 혹은 상대당의 존재를 인정하는 정치인들 역시 붕당의 폐해에 대해서도 원론적으로 광범위한 동의를 이루고 있었지만, 붕당을 타파하려는 인위적인 노력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반대함으로써 기존 붕당의 존재를 정치운영의 한 실체로서 확실히 인정하였다. 이러한 논리가, 정치 권력을 서인이 장악하였으나 남인도 함께 공존하는 체제와 짝을 이루고 있었다.0098)이 시기를 포함하는 조선시대의 붕당론에 대해서는 그것을 調停論, 君子小人·是非明辨論, 調劑論으로 나누어 정밀하게 설명한 연구가 있다(鄭萬祚,<朝鮮時代 朋黨論의 展開와 그 性格>,≪朝鮮後期 黨爭의 綜合的 檢討≫,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2). 그들은 서로의 권력을 확대하기 위해 대립과 갈등을 빚었지만 더욱 근본적인 이념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입장과 행동을 함께 하고 있었다.

 1623년에서 1649년까지의 인조대에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킨 정치적 쟁점은 元宗을 追崇하는 문제와 후금·청에 대한 외교 관계였다. 원종 추숭이란 인조의 아버지이자 선조의 五男으로 인조 즉위 전에 죽은 定遠君을 왕으로 追尊한 일로서, 인조가 즉위한 후 정원대원군에게 올려야 할 親屬의 칭호와 인조 4년(1626) 인조의 어머니인 啓運宮의 喪에 인조가 입어야 할 服의 문제, 인조 10년에 정원대원군을 원종으로 추숭하고 3년 후에 宗廟에 들이는 문제들은 모두 13년에 걸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인조의 기본적인 의도는 아버지인 정원대원군을 왕으로 높임으로써 선조로부터 원종을 거쳐 자신에게 이어지는 왕통을 확립하여 정통성을 높이려는 것이었다. 여기에 가장 적극적인 학자가 朴知誡였고 이귀·최명길·許示啇 등이 추숭에 찬성하였다. 반면에 서인 산림 김장생과 남인 산림 張顯光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官人과 학자들이 정원군을 종통으로부터 배제하려 하였다. 서인과 남인은 그들 사이의 정치적 대립에 앞서 禮의 문제에 대한 합의를 바탕으로 인조의 왕통 강화에 함께 반대하였다.0099)元宗 追崇의 과정과 정치적 배경 등에 대해서는 李迎春,≪朝鮮後期 王位繼承의 正統性論爭 硏究≫(韓國精神文化硏究院 博士學位論文, 1994), 124∼153쪽 참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서의 척화론 및 그 이후의 反淸論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척화론은 성리학적 명분론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으로서, 정치적 성격은 공신세력의 국정 주도에 대한 非功臣士類의 반발이라는 것이었을 뿐 척화라는 大義名分 앞에 당색에 따른 입장의 차이는 찾아볼 수 없다. 예를 들어 병자호란 당시의 척화론은 북인출신이며 이 시기에 남인과 정치적 입장을 함께 한 鄭蘊이 서인 金尙憲과 더불어 중심 인물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당시 관인들 대부분이 당색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만큼 붕당간의 대립도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자기 당의 정치적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이고 확실한 정책은 같은 당색의 인물을 등용하는 것으로서, 인조 연간에도 그러한 노력은 서인·남인간에 꾸준히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립의 전면에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뚜렷이 드러난 붕당간의 첫번째 쟁점은 선조의 아들로서 평소 신망이 있어 인조의 정통성에 위협이 되고 있었으며 인조 즉위후의 여러 역모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仁城君 珙에 대한 처우문제였다. 그가 폐모정청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이귀가 인조 초년에 처벌을 주장한 이후 서인들의 공격이 점점 심해져 인성군은 몇 차례의 유배를 거쳐 인조 5년에 사사되었다.

 그러나 남인들은 정경세·李埈과 북인출신의 정온을 중심으로, 숙부를 비호할 수밖에 없던 인조와 함께 처음부터 인성군 처벌에 반대하여 서인들과 열띤 공방전을 벌였다. 반대의 논리는 왕자를 보호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때로는 문제를 확대하여 인성군 처벌을 광해조의 사건들에 비유하거나 광해군대의 잘못을 바로잡았다는 인조반정의 명분을 뿌리째 흔드는 등 서인정권의 명분에 대한 도전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이 문제로 인한 대립에서 반대당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은 나타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인조 4년 서인으로 구성된 사간원에서는 인성군의 무죄를 강력히 주장한 남인 睦性善을 인조가 諫官으로 등용한 데 대해 항의하면서도, 목성선이 名士여서 당시 淸顯의 인물들보다 처지지 않으며 그의 주장도 임금의 求言에 따른 것이므로 영영 버려야 할 사람이 아니라고 인정하고 있었다.0100)≪仁祖實錄≫권 14, 인조 4년 8월 을축.

 서인과 남인은 붕당의 기반이 되고 있던 학통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경쟁적으로 기울였다. 먼저 서인들은 집권하자마자 선조대에 죄를 입은 자기 당 인사들에 대한 伸寃運動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成渾을 복관시키고 李海壽·鄭澈 등의 관작을 환수받았다. 여기에 대해 인조는 시간을 끌거나 동인쪽 인물들에 대한 처벌을 함께 취소하는 처분을 내렸는데, 그것은 鄭汝立의 옥사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의 재연과 서인의 세력 강화를 저지하려는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남인들도 鄭逑의 시호와 추증을 요청하고, 柳成龍의 시호를 내려 받았다. 그러나 서인들이 이이와 성혼의 文廟 從祀를 요청하여, 그들 학통의 권위를 이황을 먼저 문묘에 들인 남인들 수준으로 강화하려 하자 적지 않은 갈등이 야기되었다.

 그 주장은 인조 초년에도 제기되었으나 국왕의 반대로 가라앉았다가, 인조 13년(1635)에 본격적인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5월에 성균관 유생 270여 명에 의한 종사 요구의 상소와 57명에 의한 반대 상소가 같은 날 올라온 것을 시작으로 상소가 계속됨에 따라 분란이 확대되어 갔다. 남인들은 주로 이이가 佛門에 들어갔었다는 것과 성혼이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어 종사에 반대하였는데, 이에 대해 영의정 尹昉, 좌의정 金尙容 등 몇몇 서인 관인들이 종사를 주장하면서 반대자들을 비난하고 나섰다. 그리고 영남을 제외한 전국 각처에서도 이이와 성혼을 종사하자는 상소가 빗발쳤다.

 그러나 중앙 관인들 사이에서는 큰 논쟁이 없었고 종사는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서인들이 권력을 장악했을지언정 문묘 종사와 같이 막중한 일을 남인들의 반대에 맞서 실행할 수 있을 만큼 학문적 기반이 강화되지는 못하였으며, 서인 전체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인조 또한 이이·성혼의 도덕이 높지 못하고 비방이 있었다는 과격한 답을 내리는 등 서인을 견제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와 같이 인조 연간의 서인과 남인은 그들의 공통 기반에 충실하였으며 대립은 그러한 동의하에서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인조대 서인과 남인의 공존관계는 병란을 극복하고 나라를 유지시킬 수 있었던 기반으로 인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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