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2. 붕당정치의 전개
  • 2) 제1차 예송
  • (1) 제1차 예송의 배경

(1) 제1차 예송의 배경

 삼년설과 기년설로 대립하였던 己亥禮訟은 그 직접적 계기가 국왕의 大喪에 母后의 服을 규정치 않은≪國朝五禮儀≫의 미비점 때문이었다. 논쟁은 주로≪의례≫喪服篇 斬衰章의 해석을 둘러싸고 일어났지만, 여기에는 단순히 자구 해석 이상의 근원적인 인식 차이가 내재해 있었다. 그것은 禮의 적용에 있어서 제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로 집약되는 것인데, 이는 신분문제에 대해 禮制가 가진 양면성, 즉 그 분별성과 보편성에 대한 이해 태도에 관련된 것이었다. 예의 분별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보면 제왕가는 사서인과 달라 왕위 계승자에게 종통을 주게 되므로 효종이 장자의 지위에 있고 그에 대한 모후의 복을 재최 삼년으로 단정하게 된다. 그러나 예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효종이 왕위에 올랐더라도 천생의 차례인 차자 지위에는 변함이 없으며 그에 대한 상복도 朞年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전자의 입장은 다분히 고전적·보수적 성향의 예학 전통을 반영한 것이며, 후자는≪가례≫의 보편화에 따른 새로운 예학 경향을 대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양자는 예송에 참여한 학자들의 개별적 동향을 대략 분류한 것이며, 이들이 확고한 전통을 가진 학파를 형성했거나 일관성 있는 이념으로 결집된 집합체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허목·尹鑴 등의 남인학자들이 분별주의적 경향을, 송시열·송준길 등의 서인학자들이 보편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0128)이러한 예학의 두 경향을 王者禮不同士庶派와 天下同禮派로 지칭하기도 한다(池斗煥, 앞의 글).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예송이 일어나기 전인 효종 10년(1659) 이전에 남인과 서인간에 특별한 갈등이나 분쟁은 보이지 않는다. 효종대에는 오히려 서인 내부의 갈등이 정치적 긴장을 조성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효종의 산림 우대 정책으로 정계에 진출한 김집 등의 산당은 김육을 중심으로 한 한당과 적지 않은 갈등을 빚고 있었다. 또 효종 2년에는 미묘한 대청관계 속에서 반정공신 김자점 일파가 산당의 공격을 받고 숙청되기도 하였다. 반면 남인들의 정계 진출은 미미하였다. 당시 남인의 영수라고 할 수 있었던 趙絅은 효종 초기부터 淸의 기피 인물로 지목되어 정계에서 은퇴하여 향리에 있었다. 효종대에 북벌 준비와 관련하여 허적·柳赫然 등의 극소수 남인들이 중용되고 동복 오씨 일가 등 몇몇 仕宦家 출신의 인사들이 조정에 있었으나 그 세력은 크지 않았다. 그리고 후일 남인에 합류한 尹鑴와 權諰 등은 이 때까지는 송시열 등의 서인들과 교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인으로 분류되지도 않았고0129)尹鑴의 아버지 尹孝全은 광해군 초기에는 小北의 柳希奮과 친하였고 후에는 大北의 李爾瞻과 친하였으므로 윤휴는 보통 북인출신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윤휴 자신은 경기도에서 생장하여 청년시절에는 주로 기호지방의 西人들과 교유하였다. 權諰는 李珥와 成渾을 사숙하였던 朴知誡의 제자였고, 송시열과 친구이며 사돈간이었으므로 서인이라고 할 수 있으나, 예송 이후 남인들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 하였다. 조정에 나오지도 않았다. 허목은 오랫동안 재야에 있다가 효종 10년에 65세의 나이로 겨우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어 입조해 있었다. 따라서 이 무렵 남인들이 압도적인 다수로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서인들과 정쟁을 벌일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따라서 제1차 예송은 정쟁적 차원에서 발단된 사건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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