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2. 붕당정치의 전개
  • 2) 제1차 예송
  • (4) 예론의 정치분쟁화

(4) 예론의 정치분쟁화

 허목의 상소로 야기된 예송은 송시열·송준길의 반박으로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조정에서는 대신들의 의견를 받는 한편 사관을 赤裳山 史庫에 보내 실록에서 전례를 찾아오게 하였다. 정태화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신들은 국제를 근거로 기년을 고집했으나, 우의정 원두표는 당초의 견해를 바꾸어 허목의 삼년설을 지지하였다.0152)≪顯宗實錄≫권 2, 현종 원년 4월 정유. 이 무렵 조야의 분위기는 상당히 삼년설에 기울어진 것 같았고0153)尹 鑴,≪白湖全書≫권 26, 書宋貳相小說後(慶北大本 中卷, 1,053쪽). 현종도 내심 기년설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0154)현종은 같은 복제 개정 문제로 3차례나 대신·유신들에게 수의케 하였는데, 이는 삼년설에 상당히 동요된 증거라 하겠다.

 그런데 이 때 윤선도의 상소가 들어감으로써 예송의 진행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윤선도의 복제소는 허목의 두번째 상소와 실록 고출로 제2차 수의가 진행중이던 현종 원년(1660) 4월 18일 승정원에 제출되었다. 그러나 내용을 미리 검토한 도승지 金壽恒 등은 그것을 곧바로 왕에게 올리지 않고 요지를 보고한 후 그것이 예론을 가탁한 음흉한 중상모략이라고 아뢰어 왕이 친람하지 않고 반려케 하였다.0155)≪顯宗實錄≫권 2, 현종 원년 4월 임인. 다음날부터 윤선도에 대한 삼사의 탄핵이 시작되어, 24일 權諰의 구원 상소에도 불구하고 25일 疏章을 불태우고 30일 삼수로 정배하게 되었다. 서인들은 이 때 그를 극형에 처하기 위해 논박을 계속했으나, 그가 오랫동안 효종의 師傅를 지냈던 인연때문에 겨우 극변유배에 그치게 된 것이다.

 그의 상소는 대체로 허목의 재최 삼년설을 지지한 것으로서 그 근거와 논리를 보충하기 위해 五服制의 정치적 의의를 강조하고, 새로이 효종 적장자설을 내세웠다. 또 그는 이른바 嫡統宗統說을 제기하여 송시열·송준길의 기년설을 맹렬히 비판하였다. 즉 그는 송시열 등의 중자설이 효종의 적장자 지위를 부정함으로써 그 정통성을 위태롭게 하고 종통과 적통을 분리시키려 한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는 또 여기에 덧붙여 송시열의 정치적 실책과 개인적 과오에 대한 심한 인신공격을 가하였다.0156)尹善道,≪孤山遺稿≫권 3, 論禮疏.

 윤선도의<服制疏>는 제1차 예송의 전개에 커다란 계기가 되었고 그가 제기했던 종통·적통설은 왕실 전례 논쟁을 정치문제화하여 정국을 변동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또한 이 시대의 전형적인 정쟁의 한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며 동시에 인조반정 이후 당시까지 견제와 비판의 원리에 의해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되어 오던 서인 주도와 남인 참여의 정치틀을 파괴하는 원인이 되었다. 윤선도의 상소로 조정은 충격과 공포에 쌓이게 되었고, 결국 그가 서인들의 공격을 받아 삼수에 유배되고 난 직후에 우의정 원두표의 헌의가 뒤늦게 들어왔다.

 원두표는 서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허목의 삼년설을 변호하였다. 그의 논리는 대부분 허목의 것을 답습한 것이었지만, 윤휴와 윤선도 등의 예설에도 약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을 요약해 보면 첫째, 장자를 위한 삼년복은 繼體와 承重을 위한 것으로 장차 계승할 자에게도 삼년복을 입으니 하물며 이미 계승한 자에게는 말할 것도 없으며, 둘째 제왕가에서는 실제로 대를 이은 계통만을 중히 여기며, 셋째 종통과 적통은 나눌 수 없으며 종통이 있는 곳에 적통이 있다는 논리였다. 이와 같이 대신들 중에서 중대한 이의가 제기되었으므로, 왕은 또 다시 수의하게 하였다. 이번에는 원두표의 건의에 따라 李惟泰·尹鑴·沈光洙·許厚·尹宣擧 등 유현으로 알려진 재야 학자들도 헌의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에 이유태는 기년설을, 심광수는 삼년설을 간단하게 진술하였고, 허후와 윤휴는 명백한 의견을 표시하지 않았으며, 윤선거는 헌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윤휴·심광수·허후 등은 모두 삼년설을 주장하던 인물들이었으나 그들은 당시의 흉흉한 분위기에 위압되어 제대로 의사를 개진하지 못하였다.0157)≪顯宗實錄≫권 2, 현종 원년 5월 정미.

 원두표의 건의로 이루어졌던 유신들의 헌의가 미진하였으므로, 예조의 건의에 따라 왕은 최종적으로 대신들의 수의를 받도록 하였다. 이에 대신들이 모두 고례는 불문하고 당초 헌의한 국제에 따라 기년복으로 확정할 것을 청하였고, 실록을 상고한 결과도 일찍이 삼년복을 행한 적이 없었으므로 왕은 다수 의견에 따라 시행할 것을 명하여 마침내 기년제로 귀결되었다.

 이렇게 하여 현종 원년(1660) 3월 허목이 제기하여 일대 파란을 일으켰던 삼년설은 결국 채택되지 못하였으나, 송시열 등이 주장했던 고례에 의한 기년설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역시 조정에서는 인정하지 않았고, 정태화 등이 고수한 國制(≪經國大典≫)에 의한 기년설이 국가의 공식적인 결정으로 채택되었다. 이는 효종의 장자·차자 지위를 구별하지 않아도 좋은 일종의 편이주의적이며 절충론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것은 목전의 문제를 무마하기에는 적당한 처사였으나 문제의 불씨는 계속 남아 있게 되었다. 더구나 서인들은 국제이든 무엇이든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그들의 예론이 승리한 것으로 믿게 되었다. 그러나 송시열 일파의 기년설은 고례에 근거한 것으로서 효종을 중자로 간주하는 것이었으므로, 장자와 중자를 구분하지 않는 국제 기년설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서인들의 승리에 대한 이러한 착각 때문에 그들은 제2차 예송에서 패배를 자초하게 되었다.

 제1차 예송에서 최대의 파란을 일으킨 윤선도의<복제소>는 남인들의 집단적 의사 표시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의 상소가 일으킨 물의는 곧 당론이라는 집단적 형태로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이 소로 인해 미증유의 정치적 위협을 느낀 서인들은 이론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윤선도를 중형에 처하고자 하였다. 이 처사를 부당하게 생각한 남인들, 즉 권시·조경·趙壽益·洪宇遠 등이 여러 해에 걸쳐 지속적으로 그를 변호·구원하고 기년설의 오류를 논변하다가 처벌되었다. 이 문제는 또한 조관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성균관 및 지방 유생들에게까지 격론을 유발시켜 전국적인 소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즉 현종 2년 성균관 학생들의 집단상소,0158)≪顯宗實錄≫권 4, 현종 2년 5월 병진. 현종 7년의 영남 유생 柳世哲 등 1,400여 명의 연명 상소0159)≪顯宗實錄≫권 12, 현종 7년 3월 계묘. 및 이에 대한 관학 유생과 호서·호남 유생들의 반박 상소 등이 그것이었다.0160)≪顯宗實錄≫권 12, 현종 7년 3월 을사·4월 기사 및 5월 병신. 이들에 대한 서인정권의 처분은 단호하여, 삼년설을 옹호하거나 윤선도·조경 등을 두둔하는 관원들과 유생들은 가차없이 조정에서 추방하여 폐고시키거나 정거 처분하여 출사의 기회를 박탈하였다. 이 때문에 허목·윤휴·윤선도·조경·홍우원·조수익·趙壽基·洪汝河·吳挺昌 등의 명망있는 남인들과 권시·金壽弘 등 삼년설에 동조한 서인 일부가 현종대 15년간 폐고되어 벼슬에 나오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남인들의 타격은 컸으나 그들이 권력의 중심에서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許積과 柳赫然 등 예송에 가담하지 않았던 남인 일파는 여전히 요직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역시 이들은 미미한 세력에 지나지 않았고 人事薦望權을 포함한 대부분의 권력은 서인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상의 전개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제1차 예송의 성격을 정리해 보면, 이 예송은 당초 남인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도발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효종의 비정상적 왕위계승이 안고 있었던 종통문제의 필연적인 발로였다고 할 수 있다. 예송은 북인출신으로서 남인보다 서인과 친했던 윤휴에 의해 문제화되었지만, 실상 인조와 효종간의 종통문제는 반드시 제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기도 하였다. 또 이 복제예송은 17세기에 이르러 급속하게 발달한 조선 예학의 서로 다른 두 경향의 학문적 견해 차이에서 야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당시까지 강하게 남아 있었던 王朝禮 중심의 분별주의적 예학과, 16세기 이후 크게 유행하게 된≪가례≫중심의 보편주의적 예학의 왕실종통에 대한 인식차이가 문제를 일으킨 주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송은 당초 경전 해석을 중심으로 한 학문적 논쟁으로 전개되었으나, 윤선도의 상소에 의해 종통문제를 건드리게 됨으로써 미묘한 정치적 금기를 촉발하여 극단적인 당파대결로 치닫게 되었다. 특히 그의 송시열·송준길에 대한 인신공격도 양파의 감정을 크게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문에 당파간의 불신이 깊어지게 되었고 일부 남인들에 대한 폐고 조치는 그들의 원한을 증대시키고 붕당적 결속을 가져오게 하였다. 정태화가 주도했던 당시의 조정은 양측의 장자·중자설을 모두 버리고≪經國大典≫과≪大明律≫을 근거로 한 이른바 국제기년복을 채택하였는데, 이는 효종의 장자·중자 지위를 구분하지 않은 점에서 편리하고도 절충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이 때 장자·중자의 위상을 명백히 밝혀 놓지 못했던 것이 바로 제2차 예송을 일으키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또한 조정에서 채택한 국제기년복은 송시열 등이 주장한 고례기년복과 같은 기년복이었으므로 제1차 예송은 서인측의 승리로 간주되었는데, 이것이 제2차 예송에서 서인들이 자가당착에 빠져 패배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제1차 예송은 문제의 불씨를 그대로 남겨 둠으로써 또 한 차례의 예송을 예비하고 있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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