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3. 붕당정치의 운영형태
  • 1) 붕당정치의 전개와 붕당론
  • (2) 붕당정치의 전개와 붕당론

(2) 붕당정치의 전개와 붕당론

 인조반정 이후 정치세력은 왕을 비롯한 특정 개인이나 정치 집단에 권력이 집중되어 정국이 운영되는 것을 반대하고, 상대 세력과의 공존을 토대로 하면서 공론정치를 추구하였다. 숙종초까지의 정국은 반정을 주도한 서인과 남인·소북계의 일부가 공존하는 형세였다. 서인이 다수 세력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남인과 소북 일부가 이에 포섭된 형국으로 붕당적 입장이 중심이 되어 정치운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인조대 공신세력의 존재, 산림의 정계 진출, 왕실 외척의 존재, 남인의 성장 등에 따른 정치집단의 변화도 정치운영에 중요한 변수로 기능하였다. 따라서 붕당적 입장이 일차적이기는 했지만 비붕당적 요소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0186)이 시기의 정국에 대해서는 최근의 다음 논문들이 참고된다.
吳洙彰,<仁祖代 政治勢力의 動向>(≪朝鮮時代 政治史의 再照明≫, 汎潮社, 1985).
吳恒寧,<朝鮮 孝宗代 政局의 變動과 그 性格>(≪泰東古典硏究≫9, 1993).
禹仁秀,<朝鮮 顯宗代 政局의 動向과 山林의 役割>(≪朝鮮史硏究≫1, 1992).

 이 시기의 붕당론은 각 붕당과 정치적 성향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0187)鄭萬祚는 이 시기의 붕당론을 調停論·君子小人論·調劑論으로 구분하여 정리하였다(앞의 글, 1992). 기본적으로 정치적 입장과 붕당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붕당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인정하기도 하고, 또 이에 따른 정치운영 방식도 다르게 나타나고 있었다.

 인조를 비롯한 국왕들은 신하들의 붕당 결성 자체를 부정하고 그 타파를 주장했다. 인조는 정인군자는 반드시 당을 짓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주자의 引君爲黨說을 비판하고,0188)≪仁祖實錄≫권 20, 인조 7년 5월 경인. “붕당의 폐해가 홍수나 가뭄보다 심하다”0189)≪仁祖實錄≫권 37, 인조 16년 11월 기사.고 하였으며, 삼사의 언론 활동에 대해서도 당론으로 몰아 비판하는 일이 많았다.0190)≪仁祖實錄≫권 9, 인조 3년 5월 갑인;권 14, 인조 4년 8월 계해·갑자;권 37, 인조 16년 7월 계해. 효종은 대간이 대신을 논핵하지 않는 것이 黨論 때문이라 하거나,0191)≪孝宗實錄≫권 5, 효종 원년 윤11월 무자. 대간이 色目의 분별에 따라 제수된다고 비판하여 붕당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으며,0192)≪孝宗實錄≫권 18, 효종 8년 8월 계미. 현종도 언로가 붕당의 언로가 되었다고 붕당의 폐해를 지적하였다.0193)≪顯宗實錄≫권 9, 현종 6년 정월 갑인. 군주들이 붕당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것은 정권이 신하들에게 돌아가는 것을 반대하고, 왕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서인계 반정공신이나 척신세력들도 국왕의 입장에 동조하여 기본적으로 붕당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국왕이나 일부 공신세력과는 달리, 산림이나 일반 관료들은 일반적으로 붕당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그 폐단을 어떻게 시정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宋時烈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 산림계 인물들은 자신을 군자당으로, 상대 집단을 소인당으로 규정하고, 주자의 군자소인론을 토대로 시비의 분별과 ‘進君子 退小人’을 강조하여 자파 중심의 정국 운영을 꾀하였다. 반면에 일반 관료들이나 남인은 한 붕당 안에 군자도 있고 소인도 있다고 보고, 당색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의 등용을 주장하여 상대 세력과의 공존을 통한 정국운영을 주장하였다.

 송시열은 효종초 金自點 일파를 배척하면서 서로 갈등과 대립을 보이는 두 정치집단간의 공존 자체를 거부하는 경향을 보여주었고, 이이와 成渾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던 남인을 소인당으로 규정하여 시비를 엄정히 밝힐 것과 군자·소인의 변별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논리는 공신계에 대한 산림세력의 비판과 공격을 정당화하고, 남인을 소인으로 단정하여 배척하는 서인 산림계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정치이론으로서 뒷날 노론세력의 정치 활동에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0194)송시열의 붕당론에 대해서는 鄭萬祚, 앞의 글, 132∼137쪽 참조.

 인조초 서인에 눌려 정국의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던 남인은 “用人에 彼此를 묻지 말고 능력에 따라 賢才를 등용하면 붕당의 폐단이 수습될 것”이라고 하였다.0195)≪仁祖實錄≫권 9, 인조 3년 5월 갑자, 執義李埈·掌令姜大進·金榮祖等啓. 이것은 기본적으로 붕당의 존재를 인정한 위에서 당색에 구애되지 않는 인재의 등용을 통한 조정의 진정을 꾀한 것으로서, 이후 남인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붕당론이었다.

 일반 관료들은 복수의 붕당이 존재하는 현실을 인정하여 붕당의 폐단을 시정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들은 구양수와 주자의 붕당설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우리 나라의 붕당에는 각 붕당마다 淸濁·優劣이 섞여 있으므로 군자소인론의 일률적인 적용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붕당 단위의 용인을 반대하여, 당색을 가리지 않고 오직 재능있는 사람을 등용하면(惟才是用) 점진적으로 붕당의 폐단이 시정될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붕당이 소멸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인조 3년(1625) 이조참의 李明漢은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不肖한 사람을 물리치면 붕당은 저절로 소멸될 것”이라 하였고,0196)≪仁祖實錄≫권 10, 인조 3년 10월 을사. 인조 7년 대사간 趙翼도 “지금의 당이란 한쪽이 모두 군자이고 다른 한쪽이 모두 소인인 것은 아니며 각각 善人도 있고 불만을 가진 사람도 있으므로 어느 한쪽만을 쓰고 한쪽을 모두 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주장하였다.0197)趙 翼,≪浦渚集≫권 9, 論兵曹判書李貴箚批未安箚, 인조 7년, 기사(≪韓國文集叢刊≫85책, 165∼166쪽). 효종 4년(1653) 李敬輿도 “만약 임금이 賢邪를 가려 수용한다면 청탁이 스스로 나누어질 것”이라 하였다.0198)≪孝宗實錄≫권 11, 효종 4년 7월 을축, 領中樞府使李敬輿上箚.

 이들의 주장은 인조∼현종대 대다수 관료의 지지를 받아 당시 조정의 붕당론을 대표하였으며, 따라서 이 기간에 서인 정권이 남인 및 일부 소북계 인물까지 조정에 등용하여 완전하지는 않으나마 붕당간의 공존체제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 논리였다.0199)鄭萬祚, 앞의 글, 141쪽. 아울러 이러한 붕당론에 입각하여 17세기에는 서인과 남인이 공존하면서 붕당 사이의 정치적 역학관계가 안정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이에 소수 붕당의 존재도 허용되고 그들에 의한 공개적인 비판과 견제가 가능하여 정책의 수립과 결정 과정에 조화가 보여지는 정치운영도 가능하게 되었다.0200)崔完基, 앞의 글, 86쪽.

 요컨대 17세기 인조∼현종 연간의 정치집단은 서인·남인의 붕당이 존재하는 현실을 인정한 위에서 각자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강화하기 위해, 구양수·주자의 붕당론이나 이이의 붕당론을 수용하고 이를 당시의 현실에 맞게 재조정하여, 상대 세력과의 공존 위에서 정국의 안정을 이루려는 논리적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숙종 이후의 잦은 換局과 노론·소론간의 대립 과정에서는 일당 전제적인 경향을 뒷받침하는 붕당론이 성행하였고, 근본적으로 붕당의 존재를 부정하는 皇極蕩平說이 제기되어 영·정조대 탕평책의 실시로 이어졌다.0201)숙종 이후의 붕당론과 탕평론에 대해서는 鄭萬祚, 앞의 글, 141∼14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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