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4. 붕당정치의 동요와 환국의 빈발
  • 3) 환국의 정치사적 의의

3) 환국의 정치사적 의의

 환국은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하는 붕당이 서로 교체됨으로써 정국이 급격하게 전환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한 환국은 현종 몰년에서 영조 초년까지 50여 년간 아홉 차례 발생하였다. 숙종 즉위년(1674)의 갑인환국, 숙종 6년의 경신환국, 숙종 15년의 기사환국, 숙종 20년의 갑술환국, 숙종 36년의 경인환국, 숙종 42년의 병신환국, 경종 원년∼2년(1721∼22)의 신임환국, 영조 원년의 을사환국, 영조 3년의 정미환국 등이 그것이다.

 환국은 기본적으로 복수의 붕당이 공존하면서 서로 대립하고 견제하는 가운데 균형을 이루고 있는 붕당정치의 역학구도를 바탕으로 하여 발생하였다. 숙종 전반기의 갑인환국·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은 서인과 남인 사이에,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중앙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난 뒤의 경인환국·병신환국·신임환국·을사환국·정미환국은 서인에서 분립한 노론과 소론 사이에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하는 붕당의 지위가 서로 교체된 것이었다.

 어느 붕당이 정국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면 그 붕당 구성원은 중앙 정계에서 밀려났다. 다시 말하자면 주요 관직을 상실하고 사형이나 유배 또는 문외출송 등 처벌을 받음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박탈당하였다. 그렇게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는 인원의 규모는 환국에 따라 서로 달랐다. 환국의 강도가 강한 경우에는 붕당 구성원 거의 모두가 관직을 잃고 주요 구성원 다수가 처벌을 받기도 하였고, 약한 경우에는 핵심 구성원만 가벼운 처벌을 받는 데 그치고 다른 사람들은 관직을 유지하기도 하였다.

 환국은 붕당정치적 역학구도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기는 하였지만, 그 구체적 계기는 붕당과 붕당 사이의 관계에서 제공된 것은 아니다. 붕당정치라 하더라도 왕정체제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국왕 및 속성상 근본적으로 국왕과 연결되어 있는 종친이나 훈척 등 정치집단의 존재와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붕당 사이의 대립이 날카로와져 팽팽한 긴장을 조성하였을 때 그 균형을 깨고 정국의 주도권을 어느 한편으로 이동시키는 역할을 담당한 것은 국왕이었다. 붕당정치기에는 국왕은 붕당 사이의 대립에 깊숙히 관여하지 않았으나, 현종 말년이 되면서 국왕이 국가의 공적인 사안은 물론 붕당과 붕당, 때로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갈등에도 관여하여 직접 시비를 판결하였다. 그러므로 붕당 사이의 역학 구도는 국왕의 의지와 처분에 따라 급격하게 뒤바뀌었다. 그러나 환국이 반복되는 정황에서 국왕이 크고 작은 정치적 사안에 깊숙히 관여하여 역할이 증대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곧 국왕의 권한이 강화되고 비중이 증대되었음을 뜻하지는 않았다. 환국의 쟁점에 따라서는 오히려 국왕의 그러한 역할이 왕위와 왕권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갑인환국의 구체적인 쟁점은 왕실의 복제문제였다. 복제문제는 왕실의 사소한 전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대부를 비롯하여 사회 전반에 어떤 예를 적용하여 사회 질서를 이끌어 나가느냐 하는 이념문제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복제논쟁은 사상적·학술적인 시비라는 측면과 함께 현실 정치에서 국왕의 초월성·절대성을 어느 정도 인정할 것인가 하는 측면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갑인환국은 비교적 장기간에 걸쳐 완만히 진행되었으며 패퇴하는 서인에 대한 처벌의 규모와 강도도 그리 크지 않았다.

 경신환국은 병권까지 독점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려고 시도하는 남인 가운데 탁남에 대해서 훈척 집단이 반발하여 일어났다.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깊이 연결되어 있는 병권문제가 쟁점이 되었고, 구체적인 계기 역시 정탐에 의한 고변이었기에 남인 전체가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기는 하였지만 처벌을 받은 인원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또 서인 내부에서 현실 정치와 훈척에 대한 인식에 따라 노론과 소론이 분립하였다.

 기사환국은 후계자를 조기에 확정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숙종과 남인계열의 후궁 소생을 조기에 후계자로 확정하는 데 반대하는 서인 사이의 대립에서 국왕 숙종의 의지에 따라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갑술환국 역시 기사환국으로 다시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남인이 독단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숙종이 전격적으로 비망기를 내림으로써 발생하였다. 기사환국과 갑술환국은 자신의 후계자 확정 및 왕실 내부의 문제에 대한 국왕 숙종의 방어적 의지가 강하게 작용한 환국이었다.

 갑술환국 이후 비교적 장기간은 노론과 소론 가운데 실무 관료적 성향이 강한 인물들이 숙종의 의지에 부합하여 정국을 이끌어갔는데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경인환국의 쟁점은 당시 정국을 주도했던 소론의 중심 인물 최석정의≪예기유편≫에 대한 시비였다. 개인의 저작에 대한 학술적이면서 이념적인 시비에 국왕이 개입한 것이었다. 이러한 구도는 병신환국에서 재연되었다. 윤증과 유계의 후손 사이에≪가례원류≫의 저작권을 놓고 벌어진 다툼이, 윤증이 죽은 뒤에 소론의 영수로 인정받던 윤증과 노론의 영수로 추앙받던 송시열의 시비 논쟁으로 비화하였다. 이는 송시열과 윤증 사이의 개인적인 시비 차원을 넘어서 노론과 소론의 이념과 명분 싸움으로 번진 것인데 이 문제에 대해 숙종이 처분을 내린 것이다.

 노론과 소론의 이념적 시비 다툼은 현실적 正邪를 다투는 것을 지나 숙종 말년에는 왕위 승계를 둘러싸고 양보할 수 없는 忠逆 다툼으로 발전하였다. 신임환국은 그러한 충역 다툼이 극단적으로 비화하여 나타난 것이다. 왕세자 시절 경종을 보호하였음을 내세웠던 소론은 노론이 연잉군-영조를 왕으로 세우려는 의도를 드러내자 대규모의 숙청을 감행하였다. 이로써 노론과 소론은 공존할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즉위한 영조는 자신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반발하는 준소를 제거하고 신임환국에서 피해를 입은 노론의 정당성을 회복하였으니 이것이 을사환국이다. 그러나 소론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노론의 주장은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여 정국을 주도하려는 영조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에 노론을 물리치고 소론을 불러들이니 이것이 정미환국이다. 정미환국 직후 남인과 소론 일부에서 일으킨 무신란을 진압하면서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를 調劑保合하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붕당 사이의 대립과 주도권 교체인 환국을 넘어서 국왕이 정국을 주도하는 탕평정치로 이행한 것이다.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가는 숙종 연간에는 지주전호제를 축으로 하는 농업경제로부터 상품화폐경제로의 획기적인 전환, 良賤制에서 班常制로 넘어가는 신분제의 변동, 새롭게 대두하는 세력과 기존 세력의 갈등으로 표출되는 鄕戰의 발발을 비롯한 향촌사회의 변동, 추상적인 理氣論에서 사회 관계와 규범에 관한 禮論을 지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로 관심이 확산되어 가는 사상계의 추이 등 전반적인 변화가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환국은 단순히 붕당정치의 말폐라기보다는 당시 진행되고 있던 폭넓은 변화가 정치에 반영되어 붕당정치적 안정이 깨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며, 18세기 탕평정치기에 발현된 여러 변화의 시발로 보아야 할 것이다.

<洪順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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