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1. 비변사의 강화
  • 1) 설립 배경과 혁파 과정

1) 설립 배경과 혁파 과정

 조선 후기 軍務 및 政務 등에서 독단적인 기능을 행사했던 비변사는 16세기초인 중종 초기에 남북의 국경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국방 관계 기관으로 설립되었으나 차츰 정치적 기능이 작용되면서 군국 기무 및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 기관으로 위치하게 되었다. 당초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 監領하는, 국경지대의 일을 맡아 처리하는 재상(知邊事宰相) 중심으로 설립되었으나 운영상에서 조직이 확대되고 강화되어 가자 그 초기부터 통치체제 문란의 비판이 야기되어 혁파의 논란을 거치면서 상설되었다. 특히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군사적 기능뿐만 아니라 정치적 기능이 더욱 확대되어 국정 최고 기관으로 역할하기에 이르러 이후 의정부를 압도하면서 19세 중엽 고종초까지 존속하였다.0375)지금까지 비변사에 대한 연구는 대표적으로 다음을 들 수 있다.
重吉萬次,<備邊司の設置に就きて>(≪靑丘學叢≫ 23, 1936), 23∼81쪽.
申奭鎬,<備邊司와 그 謄錄에 대하여>(≪韓國史料解說集≫, 國史編纂委員會, 1964), 83∼100쪽.
鄭夏明,<備邊司의 胎動과 軍政의 變遷>(≪韓國軍制史≫ 近世朝鮮前期篇, 육군본부, 1968), 331∼357쪽.
李載浩,<朝鮮備邊司考-特히 그 機能의 變遷에 對하여->(≪歷史學報≫ 51·52 합집, 1971), 32∼41쪽.
洪奕基,<備邊司의 組織과 役割에 대하여>(≪軍史≫6, 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 1983).
홍순민,<정치집단의 구성>(≪조선정치사(상)≫(한국역사연구회 19세기정치사연구반, 1990, 청년사).
한국역사연구회 19세기정치사연구반,≪조선정치사(하)≫(1990, 청년사).
최이돈,<문반 정치구조>(위의 책).
오종록,<비변사의 조직과 직임>(위의 책).
―――,<비변사의 정치적 기능>(위의 책).
潘允洪,≪朝鮮時代 備邊司硏究≫(國民大 博士學位論文, 1990).
―――,<朝鮮後期 備邊司의 政治的 機能에 관한 硏究 -備邊司의 置廢를 중심으로->(≪傳統文化硏究≫ 1, 조선대 전통문화연구소, 1990), 67∼93쪽.
―――,<朝鮮後期 政治權力構造 硏究 -備邊司의 組織을 중심으로->(≪國史館論叢≫ 22, 國史編纂委員會, 1991), 37∼71쪽.
―――,<備邊司의 職務에 대하여>(≪朴永錫敎授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上, 논총간행위원회, 1992), 853∼875쪽.
―――,<備邊司의 會議運營>(≪擇窩許善道先生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一潮閣, 1992), 456∼475쪽.
―――,<壬亂이후 備邊司의 邊事措置와 軍事政策의 議定>(≪歷史學報≫ 139, 1993), 67∼93쪽.
―――,<備邊司의 財政政策 議定硏究>(≪韓國史硏究≫ 85, 1994), 47∼75쪽.
李在喆,<光海君代 備邊司의 組織과 機能>(≪大丘史學≫41, 1991).
―――,<仁祖代 備邊司의 運營과 性格>(≪朝鮮史硏究≫2, 복현조선사연구회, 1993).
―――,<備邊司 變通論 檢討>(≪朝鮮史硏究≫3, 복현조선사연구회, 1994).
―――,<孝宗代 備邊司의 運營과 性格>(≪國史館論叢≫57, 國史編纂委員會, 1994).
―――,<肅宗代 備邊司의 性格>(≪大丘史學≫53, 1997).
鄭弘俊,<16·17세기 權力構造의 改編과 大臣>(≪韓國史硏究≫84, 1994).
韓忠熙,<朝鮮 中宗 5年∼宣祖 24年(成立期)의 備邊司에 대하여>(≪西巖趙恒來敎授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 아세아문화사, 1992).

 조선시대의 정치 운영은 초기 議政府 署事制와 그 후 六曹 直啓制 그리고 臺諫 言論, 銓郞 監主 등의 제도적인 장치와 제도 외에 붕당정치 형태가 큰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비변사가 설치되고 그 기능이 강화되면서부터는 이전의 정치 형태와는 궤를 달리한 서사제와 직계제의 절충형식이라 할 수 있는 비변사 회의체(籌座·賓座) 중심의 정치가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즉 조선 후기의 정치는 외적으로는 사림정치·붕당정치로 전개되고, 내적으로는 비변사 중심으로 운영된 정치 형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소수의 비변사 提調堂上이 인사권을 장악하고 兵事·군정뿐만 아니라 외교·재정·지방행정 등 국가의 중요한 공사를 처리하는 정치 운영의 주도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비변사 중심의 정치는 정치 권력이 비변사에 집중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고 이러한 현상은 결국 조선시대의 정치를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로 고착시킨 결과를 초래하였다.

 비변사는 16세기초 남북 변방에서 발생하는 국방관계 일을 처리하기 위한 기구의 필요성과 중종반정 이후 왕권의 안정과 연관된 정치적인 이유로 중종 5년(1510)경에 설립되었으나 얼마간 유야무야한 채로 있다가 다시 중종 12년에 임시 기관의 형태로 조직되었다. 그 후 중종 26년에 3의정이 비변사의 都提調職을 겸하도록 하였고, 명종 9년(1554)에 상설 관아가 됨으로써 의정부와 함께 관부의 최고 등급인 1품의 독립 관아로 정착 발전하게 되었다.

 비변사는 備局 또는 籌司라는 별칭과 당초 그 설치 동기는 남북 변경의 倭胡를 효과적으로 대비하려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었다(備禦籌劃機關). 그러나 정치적인 동기나 통치 방법상의 문제도 설립 배경으로 간과할 수 없다. 그 동안 비변사의 설치 배경을 정부 내부기구의 해이 때문이라거나 군사제도 운영의 모순 즉 군정과 군령체계의 동요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었다.0376)鄭夏明, 앞의 글 참조. 그러나 이보다 앞서 이미 세종조에 왜구 및 야인에 대한 대책에 있어 邊事諳鍊者(知邊事者)를 국방관계 회의에 참여시킨 선례에서 그 모태를 찾을 수 있는데, 이것은 물론 여말선초 都評議使司 제도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선례와 함께 세조때의 의정부 서사제의 폐지는 상대적으로 변방에서 발생하는 국방관계의 일을 의논하는 협의체를 강화시킬 요인으로 작용되어 유사시 변사주획인원을 知邊事者 이외의 宗室이나 諸將까지 확대시킨 것이 관행이었다. 이때의 지변사자는 성종때에 知邊事宰相으로 발전하였고 이것은 후일 비변사 당상으로 바로 연결되었다.

 또한 군정·군령체계의 모순에 따른 변통 과정에서 유사시 효과적인 변사주획체의 필요성이 비변사를 태동케 한 배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방의 用兵에 관한 군령 하달은 본래 병조와 의정부의 합의를 거쳐 국왕이 節度使에 하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군령의 협의과정에는 변방의 사정에 밝은 대신(知邊事宰相)이 참여하여야만 효과적으로 작성 하달할 수 있고, 군령의 최종결재자인 국왕의 마음도 안도시킬 수 있어, 軍營의 移設이라던가 邊將의 인선 나아가 광범한 지방 군정의 문제까지도 다루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사주획과 지변사 재상의 역할이 비변사 설치의 한 이유였다.

 한편 비변사 설치의 또 다른 배경으로는 중종반정 이후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된 정치 운영상의 문제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비변사의 설치 동기가 ‘大臣未慣兵事’0377)≪明宗實錄≫ 권 16, 명종 9년 2월 기묘. 때문이라는 기록과 같이 변사주획에 지변사자를 참여시키려는 것은 분명하지만, 여기에는 당시 정치 운영상의 문제가 개재되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이는 반정 후 10여 년이 지나 왕권이 신장되는 정치적 상황에서 비변사가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세종때 폐지된 의정부 서사제가 중종 11년(1516)에 부활되자 그 이듬해에 비변사의 조직 명칭이 나타난 것과 14년 기묘사화 후에 다시 비변사가 再設 강화된 점, 그리고 17년∼23년 사이에 주로 三司 관원들에 의해 비변사의 폐지가 강력히 주장된 점 등에서 왕권 강화와 관련된 비변사의 정치적 의미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비변사의 독주에 따른 비판과 폐지 주장이 제기될 때마다 중종은 시종 이를 묵살하고 계속 비변사를 존속시키려는 입장이었고, 기묘사화의 주동자로 일컫는 반정공신 南袞·沈貞 등도 왕에 동조하며 끝까지 폐지를 반대하고 나선 점 등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비변사의 설치 운영이 왕권의 강화 내지 집권층의 권력 증대와 관련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비변사를 통해 신진 사림세력을 견제하려는 뜻도 있었다고 하겠다.0378)潘允洪, 앞의 책, 제1장 제1절 참조.

 이렇게 비변사는 첫째 국방상의 문제로 세종∼세조조 이래 지변사자를 변사주획에 참여시킨 선례와 이의 결과로 나타난 성종대의 지변사재상의 활약 그리고 중종초 변방의 잦은 소란으로 이에 대처할 군사 협의체의 필요성이 있었고, 둘째 제도적 모순의 문제로서 군정·군령체계의 변통에 따른 변사주획기구의 필요성 및 당시 防禦廳·築城司 등 변사대책기구의 權設 운영 경험, 셋째 정치 운영의 문제로서 중종반정 이후 왕권 안정과 관련된 정치적 상황 변동과 새로운 통치 방법의 필요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되어 비변사라는 새로운 기구가 나타났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비변사의 설립 시기에 대하여 그 동안 여러 가지 견해가 있어왔다. 비변사의 설립 연대를 중종 5년, 중종 12년, 명종 10년(1555) 그리고 심지어 세종대, 성종대 등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견해가 있었던 것은 비변사의 설립에 관한 관계 기록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중종 5년 설립 주장이 가장 온당한 것이지만, 그 동안의 여러 가지 견해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으며 또한 각자의 견해차와 일부 오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中宗實錄≫에 최초의 비변사 설립 기사가 전후 연결없이 돌출하여 이의 해설을 구구하게 한 점과,≪備邊司謄錄≫에도 설립 시기의 기록이 없어 그 경위를 알 수 없게 한 점, 이에 더하여 이 시기 비변사와 유사한 성격의 防禦廳·築城司 등 몇몇 권설아문의 置廢가 혼재되어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둘째, 제도사적 측면에서 관청의 설치 기준을 어디에다 둘 것이냐 하는 문제 때문이다. 즉 어느 관아의 경우, 처음 설치된 시점과 그 관아의 상설 운영 시점이 다를 수 있는데, 전자를 기준으로 할 때는 설립 연대가 올라가고, 후자를 중시한다면 그 연대가 내려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경우는 비변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 기관에도 적용되는 문제이다.

 셋째, 둘째와 연관되기는 하지만, 어떤 관아가 설치될 경우 그 임무와 관련하여 명실상부한 기능의 행사 여부를 기준으로 설립을 규정하는 관점이 있을 수 있다. 여기에는 논자의 주관이 많이 작용될 수 있어 설립 연대의 比定에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또 설립 당시의 단순한 조직과 그 후 확대 정비 즉 정형화된 조직 가운데 어느 경우를 설립 조직으로 적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넷째, 비변사 설립의 경우, 임란 이후에 저술된 여러 私撰 史書類와 후기에 편찬된 여러 政法書 등에 비변사 설립 연대 기사가 거의 동일하다는 점 때문에 실제 설립 연대를 등한시한 면이 없지 않았다.≪芝峰類說≫을 위시하여≪磻溪隨錄≫·≪燃藜室記述≫등과≪續大典≫·≪萬機要覽≫·≪文獻備考≫등에 모두 ‘備邊司 明宗 十年始設’로 기술되어 있어 그 이전에 설치된 비변사를 별로 주목할 수 없게 하였다.

 이상과 같이 그 동안 비변사의 설립 연대는 각기 다르게 언급해 왔다. 종래의 명종 10년설은 유명한 사서나 법전 등에서 근거했다고 하더라도 중종 년간에 이미 비변사가 운영되어 온 엄연한 사실이 무시된 것이며, 중종 5년설도 이때가 비변사 기사가 최초로 실록에 등장한 시기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지만 “비변사 從事官을 품계가 높은 문신으로 선발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0379)≪中宗實錄≫ 권 11, 중종 5년 4월 계사.라는 기사는 전후 본말이 없는 돌출기사일 뿐만 아니라 종사관의 픔계를 높여 뽑자는 것은 이미 비변사의 존재를 전제한 내용일 수 있기 때문에 그 이전에 비변사가 설립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 이상의 기록을 찾아 볼 수 없고, 당시 임시로 설치되었던 여러 기관들이 置廢되는 상황으로 볼 때 중종 5년(1510)에 설립되었다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하겠다.

 반면에 중종 12년설0380)申奭鎬, 앞의 글 참조.은 이때의 실록 기사에 비변사의 조직이나 관직 명칭이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하여 이를 설립 연대로 삼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이전 중종 5년의 기록을 인정하지 않은 무리가 있다. 또한 비변사가 중종 17년 楸子島 倭變으로 상설화되었다는 것도, 그 후 폐지와 복설(중종 36년)이 반복된 바 있어 분명하게 수긍할 수 없다. 이렇듯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을 수 있으나 제도적으로 정비된 시기보다도 창설을 먼저 염두에 둘 경우, 비변사의 설립 上限은 중종 5년이라고 하겠다.

 중종 5년에 설립된 비변사는 고종 2년(1865) 3월에 혁파될 때까지 조선 중·후기 350여 년간 국정 최고 기관으로 행세하며 관제상의 최고 권력기구인 의정부를 허구화시켰다. 그러나 이와 같이 막강한 기관인 비변사는 왕실과의 相補 관계가 무너지면서 특히 臣權이나 戚臣權力에 의한 왕권의 제약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대원군의 정책으로 하루아침에 혁파되었다.

 비변사는 순조대 이후 19세기 60여 년간은 그 권한이 막강하였다. 이미 관행화된 비변사의 관원들을 자체적으로 선임하는 自薦制와, 비변사 전임당상은 도제조 특히 현직 의정들의 친인척은 임명되어도 자리를 맡지 않고 피하는 규정(相避制)의 해소 등은 비변사의 정치 권력 집중을 더욱 용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척신세력이 요직을 독점함은 물론이고 인사나 정무 議啓權도 장악하고 있어 국왕은 다만 비변사의 결정을 형식적으로 따르는 형편이었다. 정무 관할에 있어서도 이미 각사의 변통 업무는 법적으로 비변사를 거치게 되어 있어0381)≪續大典≫ 吏典 雜令. 비변사의 정치와 행정통제력은 더욱 강력해 지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척신 세도정치 기간에 일어난 민란을 대비한다는 명분아래 더욱 심화되었고, 국왕의 권한 또한 위축되어 오히려 비변사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외척과 연계하여 왕권을 유지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고종이 즉위(1863. 12)하자 이제 권력은 趙大妃와 大院君에 의해 장악되었고,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왕정을 복고하기 위한 조치로 곧 바로 비변사의 혁파가 착수되었다. 300여 년 이상 최고의 정치세력 온상지라고 할 수 있었던 비변사의 혁파 시도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비변사의 혁파는 하루아침에 단행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 첫 단계로 비변사의 임무와 기능을 분리하고 권한을 박탈하여 政務는 의정부로 귀속시키고 軍務는 삼군부로 이관시키어, 비변사를 文簿만 맡게 하는 형식적인 기구로 전락시켰다가 다음 단계로 혁파 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는 먼저 조대비에 의한 혁파 방향의 지시가 있었고, 다음으로 혁파에 따른 비변사「分掌節目」이 마련되었으며, 마지막으로 혁파의 교시가 있었다.

 비변사의 혁파가 제기되자 당시 척신으로 핵심 세력이었던 영의정 金佐根은 부정적이었으나 조대비계였던 좌의정 趙斗淳은 폐지에 동조하였으며, 이 일로 조두순은 영의정으로 승진되고 김좌근은 삭직되었다. 혁파 지시 후 한달만인 고종 원년 2월 11일 비변사의「분장절목」이 入啓되었다. “임금께 아뢰고(啓稟), 각 관아로 공문을 보내고(行關), 공문을 받는 일(捧甘) 등 정부에 속한 일은 의정부가 하고, 본디 비변사에 속한 일만 비변사의 일로 한다”0382)≪高宗實錄≫ 권 1, 고종 원년 6월 15일. 등의 15개조 시행 세칙과 2개항의 소관 분장 내용이 확정되어 이제 국정 전반은 의정부에 귀속되고 비변사는 다만 事大·邊事 등의 비변사 고유임무를 文簿 거행 정도로 형식화되어 남아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분장절목」의 입계와 동시에 조치된 銓郞權의 부활은 비변사를 사실상 폐지한 것이나 다름이 없지만, 제도적으로는 고종 2년 3월 28일 宗簿寺와 宗親府를 합병한 예를 명분으로 비변사와 의정부를 합하여 一府로 함으로써 비변사의 혁파가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하여 비변사는 그 관명이나 관아·印信까지 모두 없어졌지만 비변사의 고유업무라 할 수 있는 사대교린 등의 소임은 의정부의 朝房으로 편입되어 일부 계승되었으나 여기에는 이미 정치적 기능이 상실되었음은 물론이며 이것마저 1894년 갑오개혁 때의 관제개혁으로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