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1. 비변사의 강화
  • 2) 조직 정비와 직무 확대

2) 조직 정비와 직무 확대

 비변사는 일반 아문의 경우와 같이 그 조직과 구성원은 위계와 임무에 따라 都提調-提調(副提調)-郎廳과 하급 胥吏로 구분되었다. 부제조 이상이 당상관으로 임명되므로 이를 총칭하여 備邊司堂上이라고 하며, 이 비변사당상은 다시 의정관격인 재상급의 소수 고위 제조와 정무관격인 판서급의 다수 일반 제조로 구별된다. 비변사등록의 坐目에 고위 제조와 당상을 구분하여 명기한 것처럼 소수의 고위 제조는 비변사 諸宰이며, 다수의 일반 제조는 통상 비변사당상으로 호칭된다.

 비변사당상은 그 선임 절차에 따라 專任堂上(啓差堂上)과 兼任堂上(例兼堂上)으로 구분되며, 비변사회의에서의 직무 분장에 따라 有司堂上과 句管堂上으로 나뉘어진다. 유사당상은 비변사의 상임 구성원이며, 구관당상은 시기적으로 늦게 나타난 것이지만 군정·재정·지방 행정 등을 관장하는 專管 구성원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이 비변사의 핵심 직무를 행사하였다.0383)潘允洪, 앞의 글(1991) 참조.

 이러한 비변사 제조-당상은 겸직으로 운용되었기 때문에 겸임이 기본이지만 그 선임과정에서 兼差·啓差·例兼·分差 등의 선임 절차가 나뉘어 있었다. 겸차는 비변사의 고유 기능에 관련된 知邊官員(知邊事宰相)의 겸임이며, 계차는 비변사에 의해 차출된 경우이고, 예겸은 직위에 따른 당연직 겸직자이며, 분차는 비변사 관원과 비변사 업무를 나누어 맡는 補任의 경우이다. 여기에서 계차의 대상은 비변사의 변사주획에 유관한 적임자의 선발이 목적이었으나 그 제한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비변사의 정치 세력화 과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후기로 갈수록 훈척이나 집권층의 軍職 보임자가 이 계차의 경우에 해당되었다.

 계차로 선임된 제조-당상급은 일정한 정원이 없었으나, 실무 행정관 격인 낭청은 12명의 정원제로 조직되었다. 낭청은 文郞廳 4명과 武郞廳 8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종6품으로 임명되는데, 문낭청은 武備司郞官의 예겸 및 侍從의 계차로서 선임되고 무낭청은 혹 參外官이 예겸하기도 하며 仕滿(15朔)되면 승진이 보장되는 특혜가 있었다.

 서리는 43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이속 서리의 경우 각 도 營吏 각 2명이 選上되었으나 후기에는 京吏로 바뀌었다. 이 43명은 書吏 16명, 書寫 1명, 庫直 2명, 吏令 16명, 大廳直 1명, 文書直 1명, 守直軍 3명, 撥軍 3명 등으로 그 소임이 나뉘어 있었다.

 비변사 조직의 정비 및 확대에 관해서는≪속대전≫이나≪大典通編≫ 등의 법전이나≪萬機要覽≫·≪備邊司謄錄≫을 참고할 수 있는데, 1555년 당시의 비변사 조직을≪만기요람≫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먼저 비변사를 대표하는 도제조는 최고위 관료로서 현직 의정과 전직 의정이 모두 겸임하였다. 도제조와 함께 비변사 회의와 차대 등에 참석할 자격을 갖는 제조는 지변사재상을 겸직으로 임명하였으며, 정원이 없었고, 이·호·예·병조 판서와 강화유수는 예겸하였다. 유사당상 3명은 제조 가운데에서 知軍務者로 계차하였다. 낭청 12명은 3명이 문신이요, 8명은 무신이었고, 1명은 병조 武備司 낭청이 겸하였다. 초기의 이와 같은 조직은 이후 계속 확대되어 갔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부제조 1명이 증원되는 동시에 훈련대장이 예겸되었으며, 인조 2년(1624)에는 유사당상 1명이 추가되어 유사당상이 4명으로 운영되었다. 인조 24년에는 대제학이, 숙종 원년(1675)에는 형조판서가, 숙종 17년과 25년에는 개성유수와 어영대장이, 숙종 39년에는 8도구관당상 각 1명이 계속하여 증원되었다. 또한 영조 23년(1747)에 수어사와 총융사가, 정조 17년(1793)에 수원유수가, 숙종 19년에 광주유수가 제조에 예겸됨으로써 정조 시기까지 문무 요직이 거의 비변사 구성원으로 확대된 형편이었다.

 이를 도표화하면 다음<표 1>과 같다.

  資 格 品階
人員
選任 施 行
明宗10 宣祖25 仁祖2 仁祖24 肅宗1 肅宗17 肅宗25 肅宗39 英祖23
都提調 時原任
議 政
正一
1
例兼 都提調                




調

宰臣中
知邊事
從二
無定
兼差
啓差
提 調                



判 書 正二
4∼5
例兼 吏戶禮兵       刑判        
留 守 從二
1∼4
例兼 江華留守         開城留守 水原(正祖 17)
慶州(正祖 19)
大 將 從二
2∼5
例兼   訓鍊大將         禦營大將   守禦使
摠戎使
禁衛大將
(英祖 30)
大提學 從二
1
例兼       大提學        
副提調 通政中
知軍者
正三
1
啓差   副提調              
有 司
堂 上
提調中
知軍者
從二
3∼4
啓差 有司 3員                
句 管
堂 上
備局中
堂 上
從二
(8)
分差               八道句管  
郎 廳 侍 從
參外官
從六
12
啓差
兼職
郎廳                
胥 吏 營 吏
京 吏

43
選上
差出
書吏 16, 書寫 1, 庫直 2, 使令 16, 大廳直 1, 文書直 1, 守直軍 3, 撥軍 3

<표 1>비변사 조직표

≪續大典≫·≪萬機要覽≫·≪大典會通≫基準.
** 품계 항목에서의 ‘從二’는 ‘從二品’ 이상임.
인원 항목의 숫자는 최초와 최후 숫자가 함께 표시된 것임.
이 표의 ‘施行’은 中宗∼明宗實錄 내용과 상이한 부분이 있음.

 위의 조직표에 따르면 비변사의 도제조-제조-낭청의 조직은 명종 10년(1555) 이후에 편성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법전에 나와있는 내용일 뿐 사실은 설립 초기인 중종 12년(1517)에 이미 나타나 있다.

 따라서 비변사의 조직은 설립 초기에 기틀이 잡히어 운용되었으며 이후는 조직과 구성원의 증원이 계속된 것이다. 즉 명종 10년 이전까지는 도제조 1명, 계차제조 2∼3명, 예겸제조 5명, 낭청 12명 등 도합 20명 내외로 구성되었으나, 임진왜란·인조반정 그리고 숙종∼정조와 순조대의 세도정치 등 내외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당상의 숫자가 40명을 상회한 때가 있었다. 이어 세도정치 말기의 경우 軍職을 중심으로 무려 50∼60명에 달하는 폭증 양상을 보여, 이 시기 서리까지 포함한 비변사 구성원의 총인원은 100여 명을 넘는 방대하고 방만한 조직이 되었다.

 이러한 조직의 확대 운영은 외형으로만 보아도 다른 아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이는 곧 비변사의 기능 강화와 구성원의 정치 세력화와 바로 직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같은 현상은 계차제조의 정원이 정해져 있지 않았고 예겸제조가 수시로 증원된 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으며, 이 숫자의 증가는 비변사의 정치적 기능의 강화와 그대로 비례하고 있었다.

 비변사의 조직은 초기에는 본래의 변사주획에 부응할 만한 국경지대의 일을 잘 아는 관원을 중심으로 편성되었으나, 명종 9년의 상설화 과정에서 국경문제 뿐만 아니라 京中 군무까지 담당하도록 하였으며, 예겸제조가 증원되면서 판서급인 일반 정무 관원이 점차 가담하게 되었다. 또 임진왜란에 대비하면서부터는 국경지대의 일을 잘 아는 관원들로 제한되었던 특색이 상실되고, 군사 업무와 함께 여러 행정부서의 직무도 통할하게 되는 국가 최고 관부로서 자리잡아 갔다.

 인조초에는 반정 공신들이 조직의 주체를 형성하여 변사주획이라는 본래의 성격은 명분으로 잔존된 채 정치적 성격의 조직으로 변질되어 갔다.0384)李載浩, 앞의 글 참조. 숙종대 이후는 사회경제적 여건의 변동과 함께 8도 句管堂上이 두어져 도별로 보고되는 사안의 처리를 담당하도록 규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조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 기본 구성원인 예겸제조가 14명(5조 판서, 5군영 대장, 4도 유수, 대제학)을 헤아리게 되어, 국가 통치의 핵심을 이루는 재정과 군사를 중심으로 국가 행정을 전반적으로 장악하는 조직으로 크게 바뀌었다.

 이와 같은 비변사의 조직 체계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비변사의 조직은 기본적으로 일반 임시기구의 경우에 준한 것이지만 일반 아문이 그 설립 목적에 연관된 소수의 예겸제조로 운용된 것에 반하여 비변사는 당초부터 여러 가지 비판이 제기된 가운데도 다수의 제조로 운영하기 시작하였고 구성원의 수시 증원을 가능하게 하는 選任장치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비변사가 임시기구로 출발하여 상설기관으로 제도화된 이후에도 임시적인 조직 형태를 가지고 있었으며 구성원의 본직은 자주 바뀌어도 비변사 구성원으로서는 장기 재임이 상례였으며 구성원의 선임이 정변이나 후기 세도정치기에는 勳武戚臣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이다.0385)潘允洪, 앞의 글(1991) 참조.

 이와 같은 특징은 대부분 비변사 구성원의 정치 세력화 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겠으나, 그 외에 전문적인 관료층을 배양하려는 필요성이나 업무 수행의 능률성과도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이 점은 비변사의 정치적 기능에 긍정적으로 작용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비변사 당상의 선임 형식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계차와 예겸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계차의 경우는 당초부터 자체 司啓로서 문무 구별없이 선임되고 정원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비변사의 세력 확대에 크게 작용하였다. 예겸의 경우는 5조 판서(工判 제외)·대제학·4都 留守·5군영 大將 등의 겸직으로 일시에 예겸된 것은 아니었으며 군영대장의 경우는 비변사 坐目에 오르지 않은 준구성원의 성격이라 할 수 있지만, 이러한 사항들은 비변사의 정치적 기능 확대가 보장되는 제도적 장치일 뿐만 아니라 자의적인 권한 행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운영 체제였다.

 비변사 구성원의 자격은 변사주획에 부응할 만한 문신 중심의 知邊事宰相級이 기본이었으나, 초기부터 정치적 성격을 띤 일부 척신 등이 선임되었으니 이러한 것이 바로 비변사의 위상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예겸제조가 증원되고 임진왜란 등에 대처하면서부터는 그 구성원이 문무구별없이 편성되었으나 인조초에는 반정 공신들이 대거 계차되어 조직의 주체를 형성하였고, 이후 벌열들이 비변사당상을 맡는 것이 상례로 되었다. 이것은 신진 관원의 비변사 진출이 거의 봉쇄된 것을 뜻하는 것이며, 세도정치기에는 외척세력이 비변사를 석권할 정도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비변사구성원이 어느 때이건 당대 권력의 중추였음을 나타낸 것이다.

 비변사 구성원 가운데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소수의 고위 제조 및 유사당상과 구관당상이었다. 4명의 유사당상은 비변사의 모든 업무를 장악하여 公事를 전담하여 처리하고 관직 議薦에 관여하며 병무를 주관하였다. 유사당상은 그 임무의 중요성 때문에 비변사의 제조중에서 三望으로 계차되었으나 비변사의 정치적 기능이 강화되기 시작한 인조대부터는 口頭 또는 草記에 의해 單望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비변사의 권한이 자의적으로 행사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더욱이 이렇게 선임된 유사당상은 籌座나 賓座에서 大臣이 부재하여 긴급한 公事의 결재를 받지 못할 경우에, 직접 대신에게 나아가 收議하거나 또는 사사로이 처리할 정도로 그 권한은 막중하였다.0386)潘允洪, 앞의 글(1992b) 참조.

 구관당상은 비변사의 군정·재정·교역 등의 사안을 주관하고 지방의 군정·행정 등을 통제하는 경제 분야 및 지방 통제의 전담 구성원이었다. 숙종대의 八道句管堂上制度가 대표적이라고 하겠으나 그 이전의 舟師句管·徙民推刷句管·軍餉句管 등과 堤堰·魚鹽·貢市·舟橋司 등의 구관 및 賑恤廳堂上·宣惠廳堂上 등이 이에 속하며 후기로 갈수록 주로 비변사의 재정 장악에 기여한 구성원이었다.

 비변사의 직무는 제도적으로≪속대전≫에 명기된 바와 같이 中外의 軍國機務를 總領한다고 되어 있으나, 이것은 의정부와의 직무 체계상의 구분이며 초기의 변사주획의 임무에서 차츰 경중 군무 및 군정의 議定과 나아가 일반정무까지 의정하는 국정 전반을 관장하는 직무로 확대되어 나갔다.

 특히 임진왜란을 대처할 때에 군국기무를 총령하고 인조반정 이후 정치적 기능이 강화되면서 부터는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 아문으로 기능하게 되었으며 임자·병자 양란과 호란 등의 전시 및 준전시 체제의 장기화는 이러한 관행을 굳어지게 하여 국가의 대소 정책 결정이 대부분 비변사에 이관된 듯한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비변사의 직무를 일별하여 보면, 기본적인 변사 대책의 임무로서 변사주획·邊政 措置·전란 대처 등이 있었으며, 정치행정상에 있어서는 관직 의천·군정 의정·외교 판리·재정 조정·지방행정 통제 등이 있었고, 정치 기능상에 있어서는 정책의 의정과 시정의 조정 등이 있었다. 이와 함께 비변사는 왕권의 相補 또는 제약 그리고 비변사 구성원의 정치 세력화 내지 권력 집중화 현상에 많은 작용을 하였다.0387)潘允洪, 앞의 글(1992a) 참조. 이러한 현상은 비변사의 권한 강화에서 기인되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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