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1. 비변사의 강화
  • 3) 시기별 성격과 기능강화

3) 시기별 성격과 기능강화

 비변사의 직무와 역할은 전시기 동안 평면적으로 동일하게 전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대별·사안별 내용이 구체적으로 파악 해명되고 이의 바탕위에 시기별 성격이 규정되어야만 그 기능을 보다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하여 다음과 같이 비변사의 기능을 시기별로 구분할 수 있다. 즉 제1기 邊事籌劃期, 제2기 軍國機務總領期, 제3기 外交財政掌握期, 제4기 內政專橫期 등 4시기의 구분이다. 이 시기 구분은 비변사의 역할과 성격을 중심으로 한 것이지만 시대적 배경 그리고 정치적 상황의 변동 등이 같이 고려된 것이다. 우선 비변사의 시기별 기능을 비변사의 조직이나 발전과 연계하여 요약·도표화하면 다음<표 2>와 같다.0388)潘允洪, 앞의 글(1990) 참조.

구분 시기(352년간) 조직상 발전상 배 경
제 1기(16C)
변사주획기
중종 5(1510)∼선조24(1591) 81년간 성립기 초창기 남북변경빈발시대
(경오·을묘왜변)
제 2기(17C)
군국기무총령기
선조25(1592)∼숙종24(1698) 106년간 정형기 활성기 전시·준전시복구시대
(왜·호란북벌산업조성)
제 3기(18C)
외교재정장악기
숙종25(1699)∼정조24(1800) 101년간 확장기 흥성기 대외화평교역시대
(사회변동·상품경제발전)
제 4기(19C)
내정전횡기
순조 1(1801)∼고종2(1865) 64년간 파행기 퇴영기 정치사회파행정체시대
(세도정치·민란발발)

<표 2>비변사의 시기구분

 제 1기로 구분한 변사주획기는 설립 초기인 중종 5년(1510)부터 선조 24년(1591)까지 16세기 81년간으로서, 그 명칭이 통시대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지만 당초 변사주획이라는 설립 방향과 변란 빈발의 시대적 배경에 따른 이 방면의 중심적 역할이 고려된 것이다. 조직 변천상에서는 이 기간을 형성·초창기로 구분하였는데 이것은 설립과 치폐가 반복된 과도기적 상황을 감안하고 비변사에서의 ‘例會議啓’가 규정(명종 9)되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초에 도제조-제조-낭청의 직제가 기틀이 잡혔으며 10여 명 내외의 당상은 지변사재상 및 훈구대신 등으로 선임되었으나, 명종때부터는 이·호·예·병조의 4조판서가 예겸되기 시작하고 3명의 유사당상이 운용되면서 본격적인 의정활동이 전개되었다. 이 확대된 구성원에 의하여 변사주획 뿐만 아니라 경중 군무를 의계하고 차츰 정무의 일부까지를 의정하게 됨으로써 비변사가 이 시기부터 의정부와 비견할 정도의 위치에 이르게 되었다.

 제2기로 구분한 군국기무총령기는 선조 25년부터 숙종 24년(1698)까지 17세기 106년간으로서, 임란·호란과 북벌 등 전시-준전시적 상황 그리고 전후 복구, 산업 조성 등의 시대적 배경과 법전 등에 규정된 군국기무총령 등이 함께 고려된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조직이 정형화되고 기능 또한 활성화되어서 그 조직 발전상으로는 정형·활성기로 구분할 수 있다.

 즉 이 시기초인 임란때에 부제조가 신설되어 비변사의 조직이 도제조-제조-부제조-낭청의 직제로 정형화되었으며 새로 설립된 訓局의 大將이 예겸제조로 추가되고 인조 2년(1624)에 유사당상 1명이 증원된 데 이어 대제학(인조 24년)·형조판서(숙종 1년)·개성유수(숙종 17년)의 예겸이 계속되어져 정형화된 조직과 확대된 구성원에 의해 전란대처 등 군국기무를 총령하고 나아가 국정전반을 의정하는 최고아문으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의정부의 허구화가 수반되었음은 물론이다. 특히 이 기간의 인조반정을 계기로 하여 비변사의 조직은 정치적 성격을 분명히 나타내 보이고 있었다.

 제3기 외교재정장악기는 숙종 25년부터 정조 24년(1800)까지 18세기 101년간으로서, 효종-현종 년간의 북벌 및 그 논의가 종식되고 대외 화평시대를 맞이하였을 뿐만 아니라 숙종 24년의≪受敎輯錄≫편찬은 이전시대를 정리한 하나의 구획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이때를 제3기의 시점으로 본 것이다. 이 무렵을 전후하여 비변사는 대외 교역을 포함한 외교 판리의 사례가 현저히 드러나고 각종 구관당상의 활발한 분차 운영으로 무역·재정·지방행정관계 등의 사안이 처리되고 장악되어 갔다.

 이와 함께 비변사의 조직도 계속 확장되어서 이 시기는 비변사의 조직 발전상에 있어서 확장·흥성기라 할 만한 때였다. 즉 숙종 25년(1699) 어영대장의 예겸을 위시하여 수어사와 총융사(영조 23년)·금위대장 등 군영대장과 水原 유수(정조 17년)·廣州 유수까지 예겸함으로써 중앙의 5군영 대장과 4도 유수가 모두 비변사 구성원으로 확대 편입되어 비변사의 정국 주도 현상이 뚜렷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이 보다 더욱 특징적인 것은 이 시기에 八道 句管堂上·魚鹽 句管堂上·宣惠 堂上·貢市 堂上·舟橋司 句管堂上 등 각종 구관당상이 분차되어 교역·재정 등을 장악하는 專管 구성원의 확대가 현저해졌다는 점이다.

 앞의 제2기가 전시·준전시의 대처 및 전후 복구 등 국방 강화가 시대적 배경이었다고 한다면, 이 제3기는 淸日 양국과의 평화시대라는 대외적 여건과 대내적으로 사회 변동·상품 경제 발달 등 앞 시기와 다른 시대적 환경을 맞이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비변사의 조직도 이에 부응하여 경제 관계 구성원의 증치가 이루워졌고, 이것은 비변사의 재정권 확대라는 측면에서 주목되는0389)潘允洪, 앞의 글(1994) 참조. 동시에 조선 후기 사회·경제발전의 모습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제4기 내정전횡기는 순조 원년(1801)부터 비변사가 혁파된 고종 2년(1865)까지 19세기의 64년간이다. 순조초부터 세도정권의 등장으로 정치적 파행과 함께 사회적 퇴영이 일어나고 아울러 인사·재정 등 내정의 핵심 사안이 비변사에 의해 장악되고 이와 연결된 삼정 문란, 민생 탄압은 이 시기를 특징지운다. 비변사의 조직상으로도 파행기라 할 수 있으니, 이미 확장된 조직의 구성원에 있어서 군직 중심의 계차가 더욱 심하였고 유사·구관 등의 요직 당상이 외척이나 벌열세력에 의해 독점되는 현상이 뚜렷하였다.

 전반적으로 비변사의 조직은 정치 세력의 중심 조직으로 바뀌었고, 이 마지막 시기는 비변사의 핵심 구성원에 의해 인사·재정·지방 행정 등 주요 내정이 專擅되고 왕권과의 相補性도 결여되어 결국 비변사의 혁파를 자초한 파행성의 노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19세기초·중엽 정치 사회의 퇴영 현상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비변사의 4기구분에서 각 시기상의 기능을 보면, 제1기에서부터 변사주획을 비롯한 京中 군무 및 일반 정무 의정으로 확대되었고, 제2기는 군국기무총령과 나아가 국정을 총괄하였으며, 제3기는 국정 총괄위에 外交 辦理·재정 장악·지방 구관 등을 구체적으로 주관하였으며, 제4기는 종래보다도 관직 의천권이 더욱 천단되고 재정·내정 등의 핵심 정무가 비변사에 의해 전횡되었던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또한 시기가 지날수록 총괄하는 사무가 확대되고 기능이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는 데, 대체적으로 제1∼2기에는 변사-군국기무의 역할이 주류이며, 제3∼4기에는 외교·경제·정치 행정적 기능이 위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변화는 비변사 자체의 기능 변화에 더하여 대외 관계의 변동 및 사회경제적 상황, 정치 세력의 추이 등에 따른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즉, 비변사의 제1∼2기로 구분한 전반기는 남북 邊釁이 잦았을 뿐만 아니라 선조∼인조 년간의 왜란·호란을 치루워 냈던 전시체제와, 효종∼현종 년간의 2차에 걸친 寧古塔 派兵(羅禪征伐) 그리고 북벌론 등으로 준전시적 정국이 등장하였는데, 이 시기의 잦은 전쟁과 군사적 상황의 연속은 그 주체가 여하건 간에 비변사의 성장과 활성화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의 주요 정책의 의계와 그리고 군국기무의 총령은 제3∼4기 대외화평시대에 내정 장악으로 이어져 국정을 총괄하고 나아가 독단에까지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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