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1. 비변사의 강화
  • 4) 정치적 기능과 위상

4) 정치적 기능과 위상

 비변사의 정치적 기능은 비변사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비변사의 각종 정책의 결정은 비변사 회의인 籌座와 빈청회의인 賓座에서 이루어졌다. 주좌는 비변사에서 수시로 열리며, 빈좌는 대궐에서 정해지는 例會開座의 형태인데, 빈청회의를 廢座하려 할 때는 頉稟으로 가능하며 비변사의 활약이 소강상태일 때에 이 탈품사례가 많았다.

 이러한 주좌나 빈좌에서 비변사의 대소사를 처리하였는데, 이 과정은 書狀이나 상소문 그리고 주요 사안 등을 開座時 대신들이 돌려 보고, 논의 결정한 후 관인을 찍어 入啓하는 절차를 거치었다. 임금의 답을 재심하여 상주할 때에는 먼저 유사당상이 相臣에게 보고하고 의안을 작성해 여러 대신에게 논의케 하여 의견이 일치된 연후에 입계하였으며 공사 출납은 절차상 모두 승정원을 경유하였다.

 비변사의 공사는 일상적인 공사와 긴급한 공사로 구분되며 긴급한 공사를 처리할 때에는 유사당상이 파격적으로 대신들의 회의에 나아가 權道로 처리한 경우가 많았다. 공사처리 때에 각종 回啓 안건의 통제를 통해 施政을 조정하였으며 이해관계의 조정도 함께 행해졌다. 변사·교린·내정 등의 사안 과 각종 別單·事目·節目 등의 제정시에는 매우 신중하였으며 특별한 경우 회의 기간만해도 수개월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대개 비변사 구성원의 주도대로 회의가 이루어지고 정책이 결정되는 것이 상례이었다.

 비변사에서의 의계 사안은≪고종실록≫에 제시된 幸行을 비롯하여 使行·典禮·科擧·賦稅·刑獄·邊事·松田 등에 이르기까지 총 56개 항에서 보듯이 국정 전반에 걸쳐 있었고, 자체의 업무 또한≪謄錄類抄≫나 ≪萬機要覽≫등에 보이는 바와 같이 무수히 많았다.≪등록유초≫에는 관직·驛路·畜牧·교화·예악·부역·교린·군정 등 20여 개 항목으로 나타나있고≪만기요람≫에도 擬望·軍操·還餉·使行銀·空名帖 등 20여 항이 넘게 제시되어 있어 정치적 성격이 배제된 순수한 사무도 매우 많았다. 이 가운데 역로·축목·烽燧·漕轉·魚鹽·松政 등은 비변사의 업무로 전관되다시피 하였으며, 관직 의천권은 邊將·監兵水使에서부터 特命 使臣 등 京官에 이르기까지 이조·병조의 銓選權을 무력화시킬 정도로 막강하였다.

 비변사의 업무 가운데 국방 문제는 비변사의 고유 임무와 관련하여 기본적으로 수도권 방위에 대한 문제 및 남북변방의 海防·制置 등 여러 사안과 漂海人·被擄人 등을 통한 대외정세 파악 그리고 萊館開市와 中江開市 등의 대외교역 사안을 조정하였다. 이와 같은 경우는 그것이 비변사의 재정권 장악이라는 측면을 넘어 당시의 사회경제적 여건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는 일면도 있었다.

 일반 군사정책에 있어서는 制置·政格·變通·移屬 및 宿衛·禁旅·五衛·軍營·束伍·赴防·海鎭·舟師 등 제도적인 사안과, 良役·戶役·軍布·牙兵·步卒·簽丁·餘丁 등 軍額 사안, 操練·點閱·試藝·軍賞 등의 감독 사안 그리고 屯田·軍糧·軍器·호궤 등 군수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군사정책 거의 전부가 포함되어 있었다.0390)潘允洪, 앞의 글(1993) 참조.

 외교 정책 즉 사대교린의 문제에 있어서도 국방문제와 관련하여 倭·胡와의 분쟁에 대처하고 對淸回咨 및 對倭書契 등을 처리하였다. 또 使行銀, 鳥銃 換貿 사안, 漂漢人을 통한 청일 양국의 정세파악, 대청·대왜 무역관계 등이 많았는데 의계항목으로 볼 때 燕行·互市·萊館·支勅·書啓·漂海人·邊事·金銀·潛商 등의 사안 처리가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재정정책0391)潘允洪, 앞의 글(1994) 참조.은 비변사의 제3기로 접어든 18세기경에 많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시기는 비변사의 재정 장악기라 할 만한 시기로서 賦役·財用·田農 등에서 各曹 소관의 내용이 거의 비변사에 이관된 듯한 양상을 보였다. 貢物·結役·紙地·大同 등 호조 소관의 부역사항이 비변사의 중심 사안이었고, 병조 소관의 步兵價布 및 刷馬價木·軍布代捧 등의 조치라던가 放軍收布의 폐단시정 등 군정 문제를 대부분 담당하였다.

 財用사안은 金銀·錢幣·耗穀·魚鹽·紙地·商賈·殖利·賑救·屯庄 등 6조의 재용 관계 대부분이 비변사에 의해 처리 통제되고 있었는데 18세기 상품경제의 발달과 관련하여 錢幣行錢과 인삼무역에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농업문제에 있어서는 양전사업을 비롯하여 둔전·목장·제언·踏驗·勸農 등의 사안이 중심 항목이었다. 특히 양전의 어려움을 비변사에서 통제한 모습이 나타나고, 方田法이라 새로운 打量法을 시행하였으며, 둔전·목장·제언 등의 대책은 비변사의 관심이 집중된 분야였다.

 이상과 같은 비변사의 제반업무를 통해서 그 정치적 기능을 살필 수 있지만, 비변사의 권력집중 양상은 각종 정책의 의논 및 그에 대한 처리 방침의 결정과 주요 관직에 대한 인사권의 장악, 그리고 구성원의 정치세력화 등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설립 초기부터 의정부와 병조 등에서 담당한 업무가 비변사와 중복 또는 이관됨이 많아 設官分職의 본 뜻을 잃고 정부 관료기구의 위계 질서를 문란하게 한다는 비판과 함께 비변사 폐지 주장이 비등하였던 것은 이의 증거라고 할 것이다. 비변사의 제3기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비판마저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이것은 비변사가 이미 국가의 최고 관부로 운영되었고 집권층의 주류가 대부분 비변사의 구성원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시대가 지날수록 의정부의 의정권과 전조의 銓選權이 무력화되는 현상은 비변사의 직권 강화와 비례하게 되어 비변사는 국가의 최고 관부로서 기능하게 되고 정치구조의 핵심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치세력의 집중처요 권력구조의 핵심 위치에 있었던 비변사는 신진세력의 진출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왕권과의 상보를 넘어서 왕권을 제약하는 상태로 진전되었는데, 이와 같은 측면은 비변사의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더욱 가속되었다.

 그러나 그 전시기인 비변사의 활성·흥성기에는 효율적인 국방대책과 시정통제 그리고 비변사 관료의 전문성 및 현실성있는 정책 의계 등이 전통관료제하의 한계성 속에서도 상당히 긍적적으로 작용한 부분이 있다고 볼 수 있어서, 이러한 측면은 임진·병자 양란을 겪고도 조선 왕조가 붕괴되지 않은 요인의 하나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국왕의 입장에서는, 정치 운용면에서 의정부·육조·삼사 등의 제도에 의해 유지되던 정치 질서에 비변사라는 정책·행정상의 통제 장치를 추가 운영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도모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정치 세력의 측면에서는 비변사당상에 오르는 길이 권력의 중심에 접근하는 방법이었으므로, 이 양자간의 상관관계가 비변사를 장기간 존속케 한 기본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비변사의 제4기에 접어들면서 이 양자간의 상보가 무너져 비변사 세력에 의한 왕권의 제약이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곧 비변사의 파행과 병행된 것이지만 세도정치는 척신의 권세와 이러한 비변사의 권력 구조를 배경으로 가능하였다고 할 수 있고, 삼정문란과 민란 발발은 이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의 도래는 비변사의 권한이 아무리 막강하다 하더라도 왕조국가 체제하에서 일정한 한계성을 넘어설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비변사의 혁파를 자초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변사의 정치적 위상은 정권 독단의 기관, 정책의 의결과 시정의 조정 기관으로 요약할 수 있듯이 정치적으로 부정적인 측면과 행정적으로 긍정적인 면모를 다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측면은 비변사의 양면성을 보여준 것으로 긍정적 측면은 設官分職의 괴리가 비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변사를 오래도록 존치시키는 하나의 요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0392)潘允洪, 앞의 책, 제 4장 참조.

 우선 정권 독단의 기관이라고 규정한 것은 비변사에 정치 권력이 집중되고 정책 의계권이 독점되며 나아가 제도적으로 의정부의 허구화 현상을 초래케 한 것과 또한 관직 의천권을 전횡하여 銓曹(이조·병조)의 무력화 양상을 가져오게 한 권력의 집중 현상 때문이었다.

 비변사는 설립 초기부터 의정부와 相抗하고 병조를 물러서게 할 정도로 권한이 비대해졌다. 설립 초기의 국방 협의체의 목적을 넘어서 곧 바로 국방 군무를 의정하는 정책기관으로 발전하였고, 의정대신은 국방를 잘 알지 못한다 하여 비변사 당상에게 위임하는 경우가 나타났으며 병조의 소관도 비변사에 이관된 듯한 양상이었다. 이렇게 되자 비변사 폐지론이 자주 제기되어 초창기에 결국 2차에 걸쳐 폐지와 복설이 반복되었는데 이것은 비변사가 순수한 국방 관부로서의 차원을 넘어 권력이 집중된 현상 때문이었다.

 명종 9년(1554) 비변사 회의가 정례화한(例會議啓) 이후부터는 군사 문제뿐만 아니라 경중 군무까지를 관장하는 의정기관의 성격을 보였으며 이는 비변사의 상설기관화의 기반이 되었다. 그후 선조때 임란이 발발하자 ‘政出多門은 大害’0393)≪宣祖實錄≫ 권 26, 선조 25년 5월 무진.라고 하여 비변사로 권한이 더욱 집중되어 전시 비상 국정을 통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시기 비변사의 전란 대처 능력에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여져 사헌부에 의해 일부 그 기능이 비판된 적이 있었지만 군국기무뿐만 아니라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사실상의 국정 최고기관으로 행세하였다. 대간이 관원이 부적합하다 하여 바꾸려 하자 이를 비변사가 무시한다거나, 승정원도 措辭 등을 스스로 비변사에 의뢰하고 있었던 정황에서 그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하고 있다.

 광해조에 들어와서도 전후 복구책과 對후금 정책 때문에 비변사의 기능은 더욱 활성화되고 있었다. 이 시기부터 이제 비변사를 비판하는 경우가 없어지고 비변사의 기능 강화는 물론 왕권과의 관계도 깊어졌으며 특히 광해군 년간의 매우 민감한 외교문제인 명나라의 원병 요청을 의식한 大義論과 후금의 세력을 의식한 大勢論의 갈등 속에서도 군국 주도권은 비변사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비변사의 기능이 극대화된 것은 인조반정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비변사의 당상이 서인 반정공신 및 그 계열의 문신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그 정치적 성향을 헤아리기에 충분하다. 이와 같은 상황은 비변사의 말기까지 대체적으로 큰 변동이 없었으며 세도정권 시기에는 막강해진 비변사의 기능 때문에 오히려 왕권이 이에 의탁하여 유지된 형국이었다.

 한편 비변사에 의한 인사권의 장악은 그 기능의 강화뿐만 아니라 정치 세력의 집중에 크게 기여하였다. 비변사의 인사 관여는 이미 설립 초기부터였다. 중종 17년(1522) 楸子島 왜변시 지방 군관의 파견에 관여하고 이어 그 선임을 병조와의 동의로 조치한 것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비변사의 관직 의천권은 외방의 감사·병사·수사 등 邊閫·변방의 수령과 수도 방비의 留守·將臣 등 일부 문무 경관직 그리고 특별 사명에 이르기까지 점차로 확대되어 종국에는 銓曹의 전선권을 무위로 만들었다. 비변사의 전선권은 설립 초기부터 邊將 의천으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지만 원래 변장을 포함한 무관을 제수할 때에는 관계 銓曹인 병조의 동의를 얻어 이조에서 擬望하였으며 陞品除授時에는 전조가 함부로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은 비변사가 설립 운영된 후 대부분 무너지게 되었다. 비변사에서 변방의 일을 아는 사람을 변장에 제수한다는 이유로 의천권을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을묘왜란이 일어난 명종 10년(1555) 5월에 도순찰사 및 방어사의 차출에 비변사의 의계가 있었고 이 시기 사간원에서 “비변사의 규획 조치는 참으로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0394)≪明宗實錄≫ 권 18, 명종 10년 5월 기유.고 할 정도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비변사에서 도원수·도체찰사·순찰사 등의 고위 지휘관을 천거 조치하였고,0395)≪謄錄類抄≫ 권 1, 官職, 선조 37년 2월 18일(奎 15080). 왜란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계사년에는 각급 관원의 의천권을 넘어서「備邊司 擧事十條」0396)≪宣祖實錄≫ 권 55, 선조 27년 9월 계사.라고 하는 인재 선발법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당시 서얼·공사천·승속 등의 신분을 초월하고 또한 문벌이나 地緣 및 사농공상을 불문하고 실무에 중점을 두어 천거하여 이 가운데서 장수나 수령급 등 일반 관료까지 선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광해군대의 기록에는 관원을 차출할 때 이조나 병조에서 “비변사로 하여금 의천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0397)≪備邊司謄錄≫ 1책, 광해군 9년 6월 8일.하여 전선권을 비변사에 이관한 듯한 양상이었으며, 이후에는 “근래의 例대로 비변사에 명하여 의천하도록 하는 것”이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조·병조의 전선권이 무력화되었음은 당연한 추세이었다.

 한편 비변사가 군국 기무를 총괄한다고 제도화된 것은 바로 정부 관청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여기에 더하여 일반 정책을 의정하고 시정을 조정하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大典의 관제 계통상에 편제되지 않은 별설의 권설아문으로서 그 성격이 특별한 것이었다.

 비변사의 정책 의정 기능은 戰時나 평상시를 막론하고 행사되었다. 유사시는 外方狀啓를 처리하고 긴급하거나 중요한 국방 문제를 의정하였으며, 평상시에는 京外의 상소를 처리하고 이와 관련된 논의를 통해 국정 전반의 정책 방향을 수립하였다. 전자는 국방 외교 등 군국기무에 관한 정책 의정이 많았고, 후자는 내정의 일환으로 각종 사안에 대한 節目이나 事目 그리고 別單 등의 마련을 통하여 시정 조치와 정책 방향의 제시가 함께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주좌나 빈좌에서 비변사 당상의 주도하에 절차상 의정대신의 稟定을 거친 것이지만 핵심 구성원인 유사당상의 역할이 매우 컸다. 비변사의 의정 과정은 同議措置-同議啓-單獨議啓-單獨草記 등의 형식이 있는데 후기로 갈수록 비변사의 단독초기가 많아졌으며 이는 비변사의 독단적이며 권위적인 의정 형태와 직결된 것이다. 특히 정책을 수립할 때 ‘上敎備邊司’나 ‘言于備邊司’ ‘問于備邊司’ 등과 같은 傳敎형식과 긴급한 사안에 대하여는 국왕이 비변사에 ‘急速議處’를 명한 것은 비변사의 독단적 기능을 더욱 강화시킨 결과이었다.

 비변사의 정책 수립에 있어 그 방향을 외교와 내정으로 나누어 볼 경우 외교정책 수립에 있어서는 명분과 실리의 두 측면이 논란되었으나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이 집중된 방향이었으며 이러한 바탕위에 국왕의 마음을 바꾸게 하는 강력한 주장이 전개되기도 하였고, 내정의 정책 수립에 있어서는 이해의 상충문제일 경우 쌍방의 의사가 대변된 후 이를 조정한 방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었다. 전자는 인조 년간 대마도주가 가지고 온 잘못된 격식의 書契를 회답할 것인지의 여부를 논의할 때0398)≪備邊司謄錄≫ 13책, 인조 27년 3월 9일 및 4월 13일. 잘 드러나고 있으며 후자의 경우는 영조 년간 송파장의 존폐 문제를 논의할 때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외교문제인 서계의 회답 여부에 관한 정책 결정과정은 예조-비변사-국왕의 순서이며, 송파장의 존폐문제의 결정과정은 平市署(호조)-비변사-국왕의 순서로, 이 두 가지 문제의 정책수립 중심은 모두 비변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계 회답 문제는 인조가 회답 의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변사에서 전면 반대하여 不答으로 결정된 것이었고, 송파장 존폐문제0399)≪備邊司謄錄≫ 127책, 영조 30년 11월 28일.
≪備邊司謄錄≫ 128책, 영조 31년 정월 16일.
는 영조가 중도적 입장에서 비변사의 건의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안의 결정에서 국왕은 모두 반대없이 비변사의 정책 방향을 따랐다는 것은 제한된 예이기는 하나 비변사가 정책 수립에 있어서 그 중심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 것이라 할 것이다.

 한편 비변사가 국가 행정 전반을 총괄하는 기구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것은 시정의 조정 역할 때문이다. 숙종 14년(1688)에 여러 軍門에서 자행하고 있던 充役의 直定폐단을 비변사에서 조정한 일이 있었다.0400)≪備邊司謄錄≫ 42책, 숙종 14년 4월 4일. 군문에서의 군병직정은 군문 스스로는 매우 유리한 것이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지방관의 입장에서는 군역을 조절할 수 없고 나아가 백성에게도 불리한 양면성이 있는 사안인데 이를 비변사에서「禁斷直定事目」을 마련하여 통제 조정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이해의 양면성은 各司의 업무와 각기의 손익에 관련하여 나타난 것이지만 당초 정책 결정과정에서 예측하지 못하였거나 사전 조정이 결여된 소치일 수도 있다. 이러한 점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가 숙종 년간을 전후하여 비변사에서 강구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속대전≫의 吏典 雜令條에 “각사에서 변통하려는 사안을 廟堂(비변사)을 거치지 않고 직계하는 관원은 파직한다”라고 규정된 바와 같이 비변사의 조정권이 법제화되기에 이른 것이었다. 특히 조선시대 경국대전의 정령 집행체계는 각관의 임무가 병렬적 체계로 제도화되어 있기 때문에0401)潘允洪,≪朝鮮時代史論講≫(敎文社, 1986), 34쪽. 이의 통제조정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의 통제력 행사가 바로 비변사의 중요한 몫이었으며 이러한 측면이 구관당상의 전문성과 함께 비변사를 기능 통치적 기관으로 특징지울 수 있게 한 것이다. 특히 이러한 정책 조정이나 시정 통제는 오히려 비변사와 같은 특별한 기구에서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장기운영이 가능하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데 비변사는 조선 후기 정치 권력이 집중된 權府이면서 정책의 의결과 施政을 조정하는 政廳으로서 16세기 이후 정치운영의 擬制的 핵심기관이었으며 그 장기 운영은 이후 권력집중적 관료제 사회의 진통과 중앙집권적 정치구조를 심화시킨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潘允洪>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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