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2. 언관권·낭관권의 형성과 권력구조의 변화
  • 2) 권력구조의 변화와 사화 및 붕당
  • (2) 붕당의 형성

(2) 붕당의 형성

 사림은 여러 차례의 사화를 당하고 권신들의 압력을 받았으나 이를 물리쳤고, 명종말에 이르면 정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언권과 낭관권을 기반으로 권력구조를 재편하였다. 이러한 권력구조의 변화는 당연히 새로운 정치 운영 방식을 요구했고, 그것은 朋黨政治의 형성으로 나타났다.

 붕당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여건의 하나는 붕당에 대한 인식의 변화였다. 붕당에 대한 바른 인식은 중종대까지도 형성되지 못하여, 관료들간의 정치 결사는 죄악시되었다. 그러므로 사화의 죄목도 붕당을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조대에 이르면 붕당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왕과 관료간에 형성되었다. 붕당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심화된 데에는 붕당을 긍정적으로 보는 朱子朋黨觀의 수용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변화 까닭에 정치 결사인 붕당을 죄악시하지 않았고, 서로의 집단적 결사를 인정할 수 있는 바탕이 형성되어, 상호 대결이 士禍와 같은 극단적인 형태로 흐르지 않을 수 있었다.

 붕당에 대한 새로운 인식 위에서 명종말 권신의 퇴진 이후, 낭관권이 재정립되었고 삼사도 고유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면서 선조 2년(1569)부터는 이미 붕당이라는 지칭이 나타났다. 이는 李滉을 종주로 하는 奇大升 등 신진들과 李浚慶·金鎧 등 선배들간의 알력이었다. 당시대의 사람들은 이 갈등을 老少黨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이는 구조적인 면에서 볼 때 붕당이 아니었고 언관·낭관들이 자기 위치를 찾기 위해서 재상들과 갈등을 일으킨 것에 불과하였다. 신진들은 己卯士林을 이상으로 하여 낭관권을 기반으로 개혁을 추진하였고, 재상들은 개혁에 소극적이어서 여러 면에서 이 양자가 충돌을 일으키면서 대립하자 이 양상을 당시의 사람들이 노소당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대립은 붕당의 구조를 가진 것은 아니었고 재상과 낭관의 대립에 불과하였다.

 선조 8년 이후 붕당은 서서히 그 모습을 나타냈다. 그것은 선조 초기에 이준경 등 재상들과 대립하던 낭관 집단이 서서히 재상 집단으로 이전해 가고 있었고, 새로운 낭관 집단이 金孝元을 중심으로 조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림의 권력 기반은 낭관권이었고, 낭관권은 自薦制라는 강력한 결집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어서 낭관과 낭관을 지낸 선배 사이에는 두터운 유대를 가졌고, 이 결속을 통하여 재상권과 대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낭관의 선배 집단은 낭관과는 상호 견제 관계에 있는 재상의 집단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낭관과 선배 집단간의 구조적 대립이 불가피하였다. 이러한 구조적 성격은 중종대 낭관권이 형성되면서 곧 나타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사화의 발생과 권신의 등장으로 낭관의 순조로운 승진이 저해되어 그 표출이 지체되었다. 선조 초기의 사림이 정치를 주도하여 이들의 승진이 순조롭게 되면서 구조적인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양자가 서서히 갈등을 표출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기폭제가 된 것은 金孝元과 沈義謙의 개인적인 대립이었다.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은 인사 마찰에 불과하여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갈등이 구조적인 갈등을 표출시키는 발단이 되어 개인 대립은 집단적인 대립의 양상으로 전개되어 갔다. 양 집단의 구조적인 대립이 구체화되자, 조정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게 되었고 李珥의 중재에 따라 김효원·심의겸 등을 外職으로 내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개인 차원에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외직의 임명에 대해서 김효원당에서는 자기 쪽에 불리하게 조처했다고 생각했고, 심의겸당 쪽에서는 이 기회를 이용해서 김효원당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획책하면서 상태는 오히려 악화되어 갔다. 그러나 김효원당은 낭관을 유지하면서 이이·李山甫 등 중립적 위치를 고수하던 이들을 서인으로 몰아 내자 붕당은 본격화 되었다.

 이후 재상권에 기반을 둔 서인들의 기본 태도는 낭관권을 근본적으로 붕궤시키려는 것이었다. 공격의 초점은 낭관권의 결집핵인 자천제와 언관권의 이념적 토대인 公論을 부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천제는 낭관권의 기반이었고, 낭관권은 동인 결속의 기반이었으므로 자천제에 대한 공격은 치열하였다. 서인의 집요한 노력으로 선조 16년에는 일시적으로나마 자천제가 혁파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자천제는 곧 복립되고 혁파의 노력은 헛되고 말았다. 사실 자천제는 규정된 법에 의해서 실시된 것이 아니었고 관행으로 형성되어, 사화와 권신들의 압력 속에서도 유지되어 온 것이어서 쉽게 혁파가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한편 서인은 언론의 이념인 공론에 대해서도 공격하였다. 서인은 공론을 ‘浮議’라고까지 비난하면서 당시 삼사 언론의 편파성을 맹공격하였다. 공론의 편파성에 대한 비난은 역시 혁파되었던 자천제가 다시 복립되는 상황에서 큰 의미를 가질 수 없었고, 사림이 지향해온 公論政治로 향한 대세를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李珥에 의해서 주도된 동인에 대한 공격은 선조 17년 이이의 죽음으로 일단락되면서 동인과 서인의 관계는 새로운 단계로 넘어갔다. 이이의 죽음으로 세력이 위축된 서인은 새 방향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낭관권과 공론을 인정하면서 서인도 동인과 동질함을 주장하는 방향이었다. 이러한 서인의 입장 변화는 서인을 대표하는 李貴의 상소에 잘 나타났다. 이귀는 서인도 ‘士類’이며 ‘公論之人’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또한 당시의 삼사 언론이 불공정하여 많은 선비가 삼사의 언론에 동조하지 않으므로 서인으로 치부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시기에 이르면 서인의 구성원이 확대되어 이이와 成渾의 제자들을 중심하여 삼사의 언론의 편향성을 의식하는 사류가 다수 서인에 합세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렇게 인원 구성이 변화되면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던 서인이 스스로를 사류이며 공론지인으로 자처하면서 공론과 연결을 모색한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였다. 재상권을 권력 기반으로 하여 동인의 권력 기반과 그 이념인 공론을 부정하던 서인이 공론과의 연결을 주장하였고, 나아가 자신들이 공론을 형성하는 사류라고 주장한 태도는 당시 서인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였다. 결국 이로 인해서 공론을 바탕으로 하는 붕당정치가 정립될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되어 사림이 추구해왔던 공론정치의 이상이 새로운 정치의 운영 방식인 붕당정치를 통해서 정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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