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4. 공론정치의 형성과 정치 참여층의 확대
  • 2) 공론 형성층의 확대

2) 공론 형성층의 확대

 언관과 낭관들이 공론 수용 기능을 원활히 수행하면서 그 이면에서는 점차 공론 형성층이 형성·확대되고 있었다. 공론의 형성과 수용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으므로 수용기구의 정비는 공론 형성층의 형성에 밀접히 연결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공론의 형성과 수용이 원활하지 않았으므로 특정 인물이나 부서가 공론을 담당하였다. 당시에 공론을 담당하는 부서를 ‘公論所在’라 지칭하였는데 이는 공론의 수용 기관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공론 형성 기관이라는 의미까지를 포괄하였다. 즉 왕·대신·언관이 공론을 담당하였다는 의미는 대신이 공론을 수용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이들이 구체적인 공론 형성층임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이들 사이에서 합의된 의견은 곧 공론이었다.

 이러한 양상은 공론의 바탕이 되는 공론 형성층이 구체화되지 않은 데서 기인하였다. 이념적으로는 모든 민은 공론의 형성층이었고 민심이 공론이었지만, 이들의 의사 표출과 정치의 수렴은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종종 求言이 내려져서 의사를 수렴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형식적인 것에 그쳐 극소수의 상소를 하는 부류는 관료들에 국한되는 것이 보통이었고, 조정에서는 구언에 의한 상소까지도 문제를 삼는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론이 갖는 의미는 지극히 제한되어, 재상들의 정책 결정이나 언론기관의 탄핵에 명분을 부여하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언권이 강화되고 낭관권이 형성되어 공론 수용 기능을 활발히 하게 되면서 구체적으로 공론 형성층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들의 의견이 정치에 반영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관원들과 사류의 양면에서 진행되었다.

 먼저 관원이 공론 형성층이 되는 모습을 살펴보자. 관원 중 당상관들은 收議를 통해서 인사나 정책에 의사를 표출할 수 있었고 여기서 합의된 것은 공론으로 인정되었으므로 주목되는 것은 당하관의 경우였다. 당하관은 언관을 제외하고는 의사 표출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였다. 당하관은 종종 왕 앞에서 輪對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지만, 그 기회는 왕의 자의에 의해서 좌우되었으므로 이를 통해 국가 현안에 대한 의사가 수렴될 수는 없었다. 재상들이 각 부서를 대변하면서 수의에 임할 때 재상들은 실무자인 당하관의 의사를 반영할 수도 있었으나 그 여부는 재상의 의사에 달린 것이었다. 따라서 당하관들은 행정 실무를 담당하고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즉 당하관은 공론 형성층이 아니었다.

 그러나 삼사의 언권이 강화되고 낭관권이 형성되어 공론 수용 기능을 강화하자 관원들의 의사 표출도 활성화되어 갔고, 이들의 의견이 대간의 언사나 정책 결정에 압력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중종 3년 11월 경연 중 朴元宗은 “문신이 사사로이 서로 모여서 조정의 득실을 의논한다. 대간들이 이러한 의견을 받아들여 府中에서 논의하여 언론하고 있다”라고 당시 관원들의 논의 구조를 언급하고 있다.0449)≪中宗實錄≫ 권 7, 중종 3년 11월 경신. 이에 의하면 공식적인 논의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당하관급 관료들이 사사로이 모여서 정치 문제를 논의하고 있고, 그 논의는 대간에 의해서 수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중종 초기의 자료는 단편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당하관들이 비공식적 모임의 활성화를 통해서 공론 형성층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현상은 이 시기에 돌발적으로 나타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성종말부터 형성되었으나 활성화되지 않던 것이 중종반정 이후 사림이 자신감을 가지면서 구체적으로 표출된 것으로 생각된다.

 좀 더 구체적인 양태를 살피기 위해 당하관을 參上官과 參下官으로 나누어 살펴보자. 참상관의 경우 의정부와 육조의 낭관들이 핵심 구성원이었다. 이들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낭관권을 형성하면서 각 부서의 일에 대하여 공론을 수용하는 기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한편으로는 역할의 동질성을 기반으로 하여 상호 결속하였고, 이 결속 위에서 공론 형성층의 역할도 하고 있었다. 낭관들은 이러한 결속을 作會를 통해서 다지고 있었다. 六曹郎官作會와 舍人作會 등의 작회는 본래 낭관 상호의 친목 모임이었다. 그러나 낭관은 이를 통해서 다져진 결속 위에서 정치 문제에 대하여 공론을 형성하고, 이를 ‘六曹郎官啓’·‘政府舍人六曹郎官等上疏’ 등을 통해서 표출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낭관들이 자기 부서 밖의 일에 대해서는 공론 형성층의 기능을 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참하관의 경우에는 홍문관·예문관·승문원·성균관·교서관 등의 참하관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중 홍문관이 언론 기능을 하면서 나머지 부서와 구별되고, 남은 4부서는 四館으로 호칭되면서 보조를 같이 하고 있었다. 4관은 과거급제 후 바로 배치되는 장소로 그 관원들은 성균관에서 공부를 같이 한 교유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같이 유생을 관리하는 입장이어서 상호 깊은 유대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관료군의 모집단인 유생과 관료들간의 연결 고리로서 자신들의 위치를 인식하면서 모임을 가졌고, 친목으로 시작하였으나 중종대 이후 정치 구조가 변하면서 가장 핵심 부서인 예문관을 중심으로 공론 형성층이 되어 정치적인 발언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당하관들이 공론 형성층으로 등장하는 이면에서 점차 재야사림들도 공론 형성층으로 등장했다. 士는 중앙의 성균관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유생과 지방의 유생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는데, 먼저 성균관의 유생들의 경우를 살펴보자. 교육기관인 성균관을 중심으로 결집된 중앙의 유생들은 이전부터 국가 정책에 의견을 개진하였으나 斥佛문제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러나 성종 말기부터 성균관의 구성원이 지방의 사림들로 채워지고, 齋會 방식에 따른 衆論에 의해 운영되어지면서 성균관도 공론을 형성한다는 의식이 강화되었다. 유생들은 삼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훈구와의 대립에 서로 지원하는 관계를 형성하면서, 성균관의 정치적 위상에 대한 의식의 변화를 수반하여 그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그 단적인 모습이 성균관 유생들이 자신들을 공론을 담당하는 ‘公論所在’로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는 훈구와 사림이 대립되는 상황에서 일반 유생들의 고양되어 가는 정치의식의 변화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중종반정 이후에는 일반화되어 표출되면서, 성균관 유생들이 공론 형성층으로 등장하였다.

 지방 유생들의 경우에도 같은 변화가 나타났다. 조선 초기부터 지방의 유생들은 求言을 통해서 자신의 의사를 표출할 수 있었으나 이는 매우 제한된 것이었다. 그러나 성균관이 자신의 입장을 새롭게 정리하고 공론의 소재라고 자처할 무렵에는 지방 유생들에게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지방에서는 이미 성종대부터 지방 공론인 鄕論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성종 초엽부터 사림들은 중앙에 진출하면서, 한편으로는 중앙정치 구조의 개혁에 주력하였고 한편으로는 지방의 자치적 운영의 확보에 노력하였다. 사림은 중앙정치에서 공론에 의한 통치를 추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향론에 따르는 지방의 자치적 운영을 이상시하였다. 사림은 그러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유향소의 복립을 제기하고, 또한 향사례·향음례의 실시를 계속 추진하면서 자치적 운영을 모색하였다. 유향소나 향사례·향음례는 지방의 향론에 입각한 향촌 규제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들이었다.0450)崔異敦,<16세기 사림 중심의 지방정치 형성과 민>(≪역사와 현실≫ 16, 1995).

 이러한 이들의 자치 노력은 일단 戊午士禍로 위축되지만 연산군을 축출한 이후에는 더욱 자신감을 가지고 추진되었다. 중종대에는 지방에서 향론의 형성이 일반화되는 분위기였고, 중종 4년(1509)에는 원악향리의 治罪까지 향론에 의해서 하는 것이 어떠하냐고 중앙에 건의할 만큼, 향론에 의한 향촌 운영이 일반화되어 가는 추세였다.0451)≪中宗實錄≫ 권 9, 중종 4년 8월 정해·기축.

 이러한 상황에서 향론의 구성원도 확대되는 추세였다. 그러한 추세는 향론 중심 기구의 확대를 통해 짐작된다. 성종대만해도 향론의 중심 기구는 유향소·司馬所였으나 중종대에는 유향소와 더불어 향교가 제기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유향소·사마소의 구성원은 전직 관료나 생원·진사에 국한되었으나, 향교는 일반 교생을 대상으로 하였으므로 자연히 구성원의 확대를 초래하는 것이었다. 생도가 향론의 구성원으로 등장하는 것은 당시 생도의 상당수가 양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단순히 구성원의 확대에 그치는 것은 아니었고 질적인 면에서도 의미있는 시사를 주는 현상이었다.0452)李範稷,<朝鮮前期의 校生身分>(≪韓國史論≫ 3, 서울大, 1976).

 지방에서의 변화는 중앙에서의 변화와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본래 중앙 사류와 지방 사류간에는 유생들이 자유롭게 중앙과 지방을 왕래하고, 성균관에서 같이 공부한 관행이 있어 밀접하였다. 특히 성종 말기에는 지방 사림들이 적극적으로 성균관에 진출하여 지방 유생들이 성균관의 주구성원으로 등장하면서 성균관의 유생과 지방의 사류는 더욱 밀접하게 되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성균관의 분소적인 역할을 하였던 사마소가 지방에 광범위하게 설치되어 성균관과 보조를 같이한 것에서도 확인되는 현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류의 중앙과 지방의 구분이 무의미해졌고 이들의 의사는 합하여져 士論으로 개진될 수 있었다. 지방에서 사림이 향론을 통해서 중앙의 대표였던 수령의 잘못을 정면으로 제기할 만큼 성장한 상황에서, 중앙의 성균관에 진출한 사류들은 정치적인 의식을 성장시켜 중앙의 문제에 자신들의 의사를 표출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중앙정부에서도 그러한 언사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는 중종 10년 “유생이 조정의 시비를 논의하는 것은 조정에 부정한 일이 있어 처처에 공론이 있는 것이다. 어떻게 공론을 막을 수 있겠으며 公論之人을 벌할 수 있겠는가”라는 중종의 지적에서 잘 나타난다.0453)≪中宗實錄≫ 권 23, 중종 10년 9월 무자. 이와 같은 지적은 유생의 의견을 공론으로 인정하고 유생이 조정의 문제를 의논하는 것을 수용하는 것으로, 유생이 공론 형성층으로 기능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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