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5. 중앙 군영제도의 발달
  • 4) 붕당정치와 군권
  • (1) 붕당정치 과도기와 군권

(1) 붕당정치 과도기와 군권

 붕당정치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전후의 사화기를 극복하면서 향黨的 기반을 가진 사림세력이 중앙 정치 일선에 등장하기 시작하여 새로운 집단 정치체제로서의 기틀이 마련되면서 이른바 붕당정치의 과도기적 정치정세를 조성하였다.

 16세기를 전후한 정치변화는 상대적으로 군사적인 면에서는 초기적인 체제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초기에 확립되었던 오위제도가 그 기능이 허구화되고 지방 군사체제인 진관체제도 16세기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던 왜구 및 북방족의 침입에 적극적으로 대비하기 위하여 制勝方略的인 체제로 바뀌는 동시에 중앙에는 변방 방어를 위하여 備邊司를 설치하는 등의 조처가 취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군사체제 운용의 핵이 되는 군역은 이른바 放軍收布에 의한 포납화가 촉진되어 사실상 국방체제가 전면적으로 붕괴되는 시기이기도 하다.0538)陸軍士官學校 韓國軍事硏究室 편, 앞의 책 참조.

 그러나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는 집약농업의 보급과 농경지의 확대, 수리시설의 보급 등으로 생산력이 증대되고, 이 같은 농업의 발달로 상공업도 아울러 발달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농업경제 발달의 성과를 토대로 하여 재지적 지주층인 사림들이 정치일선에 등장하여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여 붕당정치의 단초를 열었다. 이들은 鄕黨 중심의 성향을 강하게 띠었으며, 성리학을 통한 지식인화로 정치 경제면에서 새로운 시대를 지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방의 기본 요소인 군역에 있어서는 포납화가 강요되어 국방의 空洞化가 촉진되는 모순을 야기하였다. 이러한 국방의 공동화 현상의 와중에서 16세기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조정에서는 난국 타개책으로 비변사를 중심으로 都體察使·都元帥체제의 비상체제를 구축하여 왜란에 대처하는 동시에 당시 동·서로 나누어졌던 정파를 초월하여 왜란 극복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왜란 초기에는 도체찰사나 도원수가 가지고 있던 군사지휘권은 사실상 무력하여 관군의 패배를 초래했고 다만 鄕黨 중심의 사림에 의한 의병활동과 李舜臣 등의 수군 연합함대의 활약으로 전선이 유지되었다.

 왜란 이듬해에 明軍이 직접 왜란에 동원되면서 우선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는 동시에 반격에 나섰다. 이로 말미암아 군사지휘권 즉 군권은 사실상 명장이 주도했으며 관·의병 활동도 더욱 적극화하여 조·명군에 의한 반격이 시도되었다.0539)車文燮,<朝鮮中期 倭亂期의 軍令·軍事指揮權 硏究>(≪韓國史學≫5,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3). 이러한 가운데 明將 척계광의 기효신서법에 의한 삼수병 양성을 위한 훈련도감이 설치되고, 지방은 거국적인 군사동원령에 의한 속오군이 조직되어 정파를 초월한 반격으로 왜란을 극복하였다. 이때 설치된 훈련도감과 속오군체제가 왜란 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어 후기 군사체제의 단초를 열었다0540)訓鍊都監과 束伍軍에 대하여는 車文燮,≪朝鮮時代軍制硏究≫(檀國大 出版部, 1973) 참조.. 7년간의 거국적 대응으로 왜란을 극복했던 조선왕조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비상체제를 풀지 않았다. 즉 국방에 있어서 비변사를 중심으로 하는 도체찰사·도원수의 비상체제를 그대로 유지해 간 것이다. 이는 倭에 대한 대비보다는 왜란동안 조·명의 통제권에서 벗어난 만주족의 後金이 경계세력으로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거국적인 대응으로 난국을 극복했던 것과는 달리 국내 정치정세는 각 정파간의 갈등으로 나타났다. 왜란의 책임을 진 東人의 한 파인 南人세력이 정치 일선에서 후퇴하고 선조 말기에는 北人정권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광해군의 왕위승계를 지지했던 大北派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이들 대북정권은 처음부터 광해군의 왕위 승계를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왜란 중 軍功이 많았던 鄭仁弘·李爾瞻 등이 핵심세력으로 등장하여 붕당정치의 과도기가 나타났다.

 대북파에 의하여 옹립된 광해군정권은 일차적으로 정권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왕자·척신들에 대한 경계·숙청을 단행하여 정치 핵심에서 벗어났던 정파들의 비난을 자초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치운용을 위한 군권은 사실상 광해군이 직접 장악하고 명과 후금에 대한 등거리 외교를 표방하였다. 즉 그는 일찍이 세자로 있으면서 왜란 중 撫軍司0541)撫軍司는 임진왜란때 왕세자였던 광해군의 行營으로 처음에는 分備邊司라 했다가, 선조 26년 12월 무군사로 개칭되었다. 광해군은 이를 중심으로 군·민에 관한 策應을 주도했으며 난중에 일종의 分朝 구실을 하였다.를 이끌고 직접 왜란 극복에 나섰으며, 왜란 이후 명의 요청으로 후금 공략에 姜弘立의 1만 명의 군대를 파견하면서 向背를 보아 항복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강홍립군의 항복은 광해군이 이끌던 대북정권은 물론 정치핵심에서 벗어났던 정파들에 의해서도 수용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집중적으로 일어난 세계적 자연재해에 의한 기근·질병은 전후 경제기반 확립에 지장을 가져와 軍籍의 정상화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0542)羅鍾一,<17세기 危機論과 韓國史>(≪歷史學報≫ 94·5 합집, 1982).

 따라서 붕당정치의 과도기라고 할 수 있는 광해군기는 실제 비상체제를 유지하면서 국방에 진력했으나 국내적으로 정파간의 이해관계에서 오는 갈등과 자연재해의 집중적 발생 및 국방의 원동력이 되는 군적의 불확실한 파악 등으로 부국강병체제를 갖출 수 없었다. 더욱이 외교문제에 있어서의 왕권과 신권 사이의 갈등은 마침내 정치 핵심에서 벗어났던 서인세력에 의한 인조반정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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