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6. 지방 군제의 개편
  • 3) 관방의 강화

3) 관방의 강화

 0562)관방에 대하여는 현재로서 車勇杰,<朝鮮後期 關防施設의 整備過程>(≪韓國史論≫7, 國史編纂委員會, 1980) 및 ―――,<朝鮮後期 關防施設의 變化過程>(≪韓國史論≫9, 國史編纂委員會, 1981)가 있을 뿐인데 구체적 시설 사항을 다 살필 수 없으므로 결론적인 개념 정도만을 소개하려 한다.關防이란 ‘設險固圍’를 목적으로 도로가 모여들거나 험한 고갯마루 등의 긴요한 곳에 城을 쌓고 군사를 배치하여 외적의 침범에 대비하는 것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우리 나라는 지형상 산과 언덕이 많아 역대로 이에 대한 조처가 계속되었다. 관방 시설로서 城柵과 溝池 등의 각종 시설이 축조·수리되어 온 것이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그 大要는 城으로, 초기이래 都城·邑城·關城·山城 등이 수축되었다.

 세조때부터 16세기말 임진왜란 이전까지 경상도 25개소, 전라도 14개소 등의 沿海 鎭堡가 설치·축성되어 왔으며, 내륙에는 곳곳의 읍성과 산성이 수축되어 해안 다음으로 읍성과 산성으로의 단계적 방어를 위한 시설이 된 셈이었다. 특히 산성은 국경지대가 돌파된 뒤, 淸野入堡한다는 기본적이고 전통적인 방어 개념에 따른 시설로서 軍倉 등의 설치와 함께 하는 것이다. 여하튼 임진왜란 이전 선조때에는 倭侵에의 대비로 논란이 있는 가운데 宜寧邑城의 축조를 비롯하여 남부 지방의 읍성 수축이 진행되었고, 전쟁 과정에서는 경기·下三道 등의 산성 수축에 힘을 썼으며 이때 鳥嶺에의 設關도 이루어졌다.

 다시 말하면 대체로 군창을 가진 산성이 내지를, 연변 읍성이 그 외방을, 연변 진보가 다시 그 외곽을 차단토록 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규모 외침에 대비한 연변 방어체제의 무의미함과 내지 관방의 퇴락이 드러나고, 산성에 청야입보하는 방법의 효과가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오래된 산성들이 수·개축되고 왜란 이후에는 대규모의 산성으로 개편되었으며 연해 진보들은 위치 변동없이 있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특히 내륙의 주요 嶺路를 튼튼히 지키자는 논의로 竹嶺·鳥嶺·伊火嶺·秋風嶺·六十嶺·八良峙 등 교통의 요지이면서 지세가 험악한 곳에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방안이 검토되고 일부 시설되기도 하였다.

<李謙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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