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2. 상평창·진휼청의 설치 운영과 구휼문제
  • 3) 임진왜란 이후 진휼청 제도의 변천

3) 임진왜란 이후 진휼청 제도의 변천

 16세기 초반부터 장기적인 자연재해에 시달리던 조선왕조는 16세기말, 17세기초에 설상가상으로 임진왜란·정유재란·정묘호란·병자호란 등 수차의 대규모적인 외침을 당해 더 큰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전란을 치른 뒤에도 자연재해는 그치지 않았다.

 선조 25년(1592) 4월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이후 선조 26년 6월 현재까지 왜군의 분탕을 겪거나 그들에 의해 점거된 지역들은 181개 고을이었다. 이 숫자는 전체 고을 328개의 55.2%에 달하는 것이었다. 농사는 물론 왜군이 들어가지 않은 147개 읍(44.8%)에서만 가능하였다고 볼 수 있으나 실제로는 호남지역과 대동강 이북 지역에서만 가능하였다.0630)최영희,≪壬辰倭亂 중의 사회동태≫(한국연구총서 28, 한국연구원, 1975), 84쪽. 농사가 가능한 지역이 이렇게 한정된 데다 재해가 계속되었으므로 진휼의 업무도 그칠 수 없었다. 특히 임진왜란 직후의 계사(1593)·갑오(1594) 두 해의 재해는 이후 사람들 사이에 오래 동안 기억될 정도로 참혹했다. 전시 중의 모든 대책을 맡은 비변사 또는 그 산하에 별도 설립된 진휼청이 주로 진휼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임진왜란 중에 진휼청이 기능하고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이 확인된다. 즉 선조 26년 윤11월 29일에 진휼청 낭청의 승진 문제에 관한 논의가 있었으며,0631)≪宣祖實錄≫ 권 45, 선조 26년 윤11월 기유. 이듬해 2월에 사간원이 근래 나라 일이 번다하여 局을 세운 것이 너무 많다고 지적하면서 接待都監·訓鍊都監 등과 함께 진휼청의 이름도 들었다.0632)≪宣祖實錄≫ 권 48, 선조 27년 2월 을묘. 같은 시기 진휼청이 설치한 賑恤場 다섯 곳에 만여 명의 기민들이 모여들었다는 보고도 있다.0633)≪宣祖實錄≫ 권 48, 선조 27년 2월 병자.
≪增補文獻備考≫ 권 169, 市糴考 7, 賑恤 1, 선조 26년.
그러나 이 해 12월에 진휼청은 진제장에 모여드는 백성과 사족들의 수가 많은 반면, 비변사가 가지고 있는 쌀과 콩은 바닥이 났으므로 구황물자가 생산되는 고을에 관원을 보내지 않으면 기민들이 모두 죽게 될 지경이라고 보고할 정도로 진휼의 재원은 크게 부족한 상태였다.0634)≪宣祖實錄≫ 권 53, 선조 27년 7월 무자.

 앞에서 살폈듯이 중앙정부가 활용하던 진휼의 재원은 임진왜란 전에 이미 바닥이 났다. 이에 전란까지 겹쳐 상황은 더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비변사와 진휼청이 해야 할 일은 기근 미발생 지역의 곡식을 기근 발생 지역으로 옮겨 활용토록 하는 것뿐이었다. 왜란이 일어난 그 해 11월에 이미 비변사는 영·호남 지역의 구황대책으로 경상우도의 좁쌀을 좌도로 옮겨 기민들을 구제케하고 우도는 전라도의 곡식을 옮겨 쓰도록 하였다.0635)≪宣祖實錄≫ 권 32, 선조 25년 11월 신유·임술. 선조 26년 정월 갑신에 세운, 탕패가 심한 경기·경상·함경도 등지의 耕種과 수송대책도 평안도 미곡(쌀 830석, 콩 780석, 서직 750석, 피속 740석)을 함경도로, 전라도 미곡(쌀 6,000석, 콩 6,000석, 조 6,000석, 보리 4,000석)을 경상도로, 충청도 미곡(쌀 300석, 콩 300석, 조 200석, 보리 200석)을 강원도로 보내는 것이었다. 광해군 7년 12월 14일, 하삼도에 기근이 발생했을 때도 비변사는 진휼사 임명을 건의한 뒤 대처 방안을 농사가 어느 정도 된 황해도에서 4∼5,000석, 평안도에서 14,000석을 京江으로 실어와 하삼도의 구황곡과 종자곡으로 활용할 것을 건의하였다.0636)≪光海君日記≫ 권 98, 광해군 7년 12월 병진. 임진왜란 후 진휼청은 이전과는 달리 전국 각 고을의 보유 곡식을 최대로 활용하기 위해 이동시키는 것을 주업무로 삼았다.

 임란 이후에도 진휼청의 별도 설치 운영을 반대하는 의견이 있었다. 임시 전담 관청을 설치하더라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괄의 난을 진압한 직후인 인조 2년(1624) 3월에 흉년으로 진휼청 설치가 필요했으나 호조는 分曹 郎廳을 임명하여 한성부 낭청 1원과 함께 호조의 저축곡으로 진휼을 주관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던 것이다.0637)≪仁祖實錄≫ 권 5, 인조 2년 3월 기묘. 호조의 건의에 대한 史臣의 논평에 의하면 호조의 건의는 광해군 11년(1619)에 진휼청 제조 朴弘耈가 각도의 미곡을 실어다 모두 자기 집에 들여 한 말의 쌀도 백성에게 돌아가지 않게 한 사례에 근거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인조 초반 진휼청 불설치는 광해군대 실정에 대한 비판의식이 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호조의 제안은 일단 채택되었던 듯 인조 4년 현재로 비변사는 진휼청이 아니라 救荒廳을 두고 이를 관장한 것으로 되어 있다.0638)≪增補文獻備考≫ 권 169, 市糴考 7, 賑恤 1, 인조 4년. 그러나 인조 4년의 상황은 이런 체제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재이의 타격이 심각하였다. 이 해의 구황청을 선혜청에 이속하여 상평청과 합쳐 진휼청이라고 이름을 다시 고쳐 8도의 耗穀 및 發賣(각종 官倉의 곡식을 싼값으로 내다 파는 것), 죽 끓여 주는 일 등을 모두 구관하도록 하였다.0639)위와 같음. 선혜청이 진휼청에 합쳐진 것은 선혜청이 관장하던 미곡을 진휼곡으로 동원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진휼곡은 “동쪽 것을 옮겨 서쪽을 보충하고, 위의 것을 줄여 아래를 더하는” 방식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이 업무를 각 도의 都事들이 주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중앙의 별도의 전담 기구를 설치하여 그 종사관들을 각 도에 파견하여 도끼리, 고을끼리의 협조를 구하고 또 이에 대한 통제가 필요했던 것이다.0640)≪仁祖實錄≫ 권 19, 인조 6년 9월 신유.

 인조대 진휼청은 기록상 이후 인조 6년 8월·16년·17년 2월·20년·21년·23년·26년에 존치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0641)≪仁祖實錄≫ 권 36, 인조 16년 정월 계사;권 38, 인조 17년 2월 경인;권 43, 인조 20년 5월 신사;권 44, 인조 21년 3월 경신;권 46, 인조 23년 8월 정미;권 48, 인조 25년 3월 정미;권 49, 인조 26년 정월 갑자. 진휼청을 선혜청에다 설치한다는 기록은 인조 17년에도 다시 보인다. 25년에는 진휼의 임무가 끝난 뒤, 본청에 곡식이 얼마 남게 되자(쌀 800여 석, 조 700여 석) 이를 상평창 규례에 따라 값을 올려 포와 바꾸어 놓자는 건의가 있었다.0642)≪仁祖實錄≫ 권 48, 인조 25년 3월 정미. 이즈음 진휼청은 남한산성과 강화도의 저치곡을 진휼곡으로 운용하는 권한을 확보하여 이 정도의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0643)≪仁祖實錄≫ 권 49, 인조 26년 윤3월 정묘. 江都의 진휼청 租穀 600여 석을 강도와 安山의 8고을 농민들에게 종자곡으로 나누어 주었다. 진휼청이 여유곡으로 이렇게 상평법을 활용하게 되면서 이름도 상평청으로 바꾸고 선혜청 당상과 낭청이 이를 겸하여 관장토록 하였다.0644)≪仁祖實錄≫ 권 49, 인조 26년 5월 기축.

 상평청은 단명하였다. 설치 1년만에 본래 기민을 구제해 살리는 뜻과는 달리 재물을 모으고 이익을 구하는 터전이 되고 있다는 비난이 생기면서0645)≪孝宗實錄≫ 권 2, 효종 즉위년 12월 무자. 상평창이 諸司의 常供價를 먼저 서울 사람들에게 주고 외방에서 두배로 징수하여 백성들에게 오히려 고통을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상평청의 이름은 상당한 기간 보이지 않게 된다. 효종대에는 진휼청의 이름도 보이지 않다가 9년 8월에 처음으로 설치 조치가 있었다. 효종대에도 각지에서 기근은 계속 발생하였다. 효종 즉위년(1649)에 북도에 기근이 들어 嶺東米 2,000석을 옮겨 진휼하고, 2년에는 松都에 기근이 들어 강도미 1,000석을 옮겨 진휼했다. 같은 해에 西路에 큰 전염병이 돌아 사망자가 많아 약물과 함께 관향미 92,000여 석을 보냈다. 4년에는 강도에 기근이 들어 봄에 거두는 세미(春賦米) 1,000석을 주어 진휼하였고, 6년에 면포 5천 필을 함경도 육진 및 삼수 갑산에 분송하여 쌀을 바꾸어 기민을 진휼하게 했으며, 9년에는 호서·호남 연해읍들에 기근이 들어 田租를 감하고 전남곡 10만 석을 옮겨 진휼했다.0646)≪增補文獻備考≫ 권 169, 市糴考 7, 賑恤 1. 진휼청이 다시 개설된 것은 바로 이때였다.0647)≪孝宗實錄≫ 권 20, 효종 9년 8월 무진. 이렇게 근 10년만에 다시 설치된 진휼청은 이듬해(효종 10년, 1659)의 대기근에 “곡식을 옮기고 부세를 견감하는 등 모든 진휼책을 다 동원했다”고 한다.0648)≪增補文獻備考≫ 권 169, 市糴考 7, 賑恤 1. 기근이 든 호남·호서를 구휼하기 위해 統營穀 1만 석을 옮기고, 제주 기근을 진휼하기 위해서는 그 田租의 반을 감하는 한편 나주 금성산성미 1천 석, 통영곡 2천 석을 옮겼다.0649)위와 같음. 효종대에 이처럼 진휼이 그치지 않았는데도 9년 이전까지 진휼청을 설치하지 않은 것은 北伐을 위한 제반 준비조치와의 상충을 우려한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벌을 위한 군비확장에 대한 제동과 진휼청 복설 조치가 시기를 같이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현종대는 소빙기 자연재해가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냈던 시기였다. 현종 즉위년(1661)과 2년에 유례없는 흉년과 기근이 연속적으로 닥쳤다.0650)당시 신축년(현종 2, 1661) 흉년은 前해인 경자년보다 더 심했다고 평가되었다.
≪顯宗實錄≫ 권 5, 현종 3년 정월 정유.
당시는 기온강하 뿐만 아니라 홍수가 심했기 때문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 인명 피해가 컸다. 현종 2년 윤7월 진휼청이 다시 설치되었다.0651)≪顯宗實錄≫ 권 4, 현종 2년 윤7월 계미. 앞에서 살폈듯이 이전까지는 흉황이 심해도 田稅 감면은 되도록 피했다. 그것은 국가 운영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경비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종대의 재난은 이에 대한 배려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즉위년에 정부는 서울에 모여든 기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關西(평안도)의 管餉 耗穀을 동원하는 한편, 海西(황해도) 公穀도 함께 동원하기 위해 이를 京倉으로 수송케 하고 본도의 五斗稅米를 견감하여 가을에 거두어 대신 채우도록 하였다.0652)≪增補文獻備考≫ 권 169, 市糴考 7, 賑恤 1. 원년에는≪구황촬요≫를 제작해 전국에 배포하면서 함경도 단천의 貢銀, 강원도 영동·영서의 大同米, 다른 여러 도의 전세 및 노비신공포 등을 감하였다. 먹을 것을 찾아 서울에 몰려든 기민들을 위해 상평청에서 관리하던 米鹽을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또 강원도의 기민들을 위해서는 영남 연해읍의 미곡 2천 석을 양양 등 5읍에 배로 실어가게 했다. 2년에는 왕실 용도의 尙衣院과 내수사의 貢紬의 일부, 면포 1천 필 등을 비변사에 내리면서 경기의 春收米를 結당 2두씩 감했다. 심지어 大僕寺의 말 기르기 비용의 미곡 천여 석도 賑資로 돌렸다. 외방에서는 삼남의 기근을 구제하기 위해 함경도미 1만 석, 강원도미 1천 석, 조 3천 석을 영남에 보내도록 하고, 강도미와 남한산성미도 동원하였다.0653)위와 같음.

 현종 3년 정월 기근이 심하게 든 영남·호남지역의 田稅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엇갈린 의견이 오갔다. 전세를 관례대로 서울로 운송하면 현지 賑資에 쓸 곡식이 없으므로 이를 본 도에 그대로 두고 진휼곡으로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의견이 나오고, 이에 대해 전세는 국가 경비가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인데 이를 면제하면 나라가 지탱할 수 없다는 반론이 나왔다. 비슷한 논란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양남 전체의 전세 처리문제는 정부로서는 매우 심각한 사안이었다.0654)왕은 처음에 호남 우도는 완전 면제는 할 수 없으므로 곡식이 익은 전결에서 세금을 거두어 그것을 진구용으로 쓰도록 하고, 좌도는 절반만 거두기도 하고 전량을 거두기도 하되 잘 헤아려 하라고 하였다(≪顯宗實錄≫ 권 5, 현종 3년 정월 경인). 최종적으로, 재해를 입은 19개 고을은 전액 감면해 주고 나머지는 모두 경창에 운송해 들이도록 하되, 후자는 부분 면제로 호서의 예에 따라 10두 당 3두를 감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0655)≪顯宗實錄≫ 권 5, 현종 3년 정월 정유.

 현종 11년에 다시 대기근이 닥쳤을 때도 같은 문제가 재론되었다. 현종 11년 12월 28일(신해) 구휼책 논의를 위해 진휼청 당상들(예조판서 조복양, 좌참찬 민정중, 좌의정 허적, 호조판서 권대운, 병조판서 김좌명)이 모두 어전회의에 참여했다. 조복양·민정중 등은 삼남의 전세를 감면하고 관서 쌀을 동원해 진휼비로 옮겨 쓰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허적·권대운·김좌명 등이 반대하면서, 금년의 전세 수미 자체가 예전의 1/10 밖에 되지 않은데 이것마저 감면하면 국가 비용은 전무한 실정이 됨으로 절대로 감면할 수 없다고 했다. 양론에 대해 왕은 전세 전면 면제는 불가하되 올릴 수 있는 것은 올리고, 올릴 수 없는 것은 올리지 말게 하여 본 도에 두고 내년 봄에 가져다 쓰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진휼청으로 하여금 부족한 것은 전세 대신 다른 곡식을 옮겨 쓰도록 조치하게 하였다.0656)≪顯宗實錄≫ 권 18, 현종 11년 12월 신해.

 전세를 진휼곡으로 동원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 이렇게 거듭 문제되자 진휼청은 일종의 취로사업을 진휼책으로 도입하였다. 진휼청 산하에 堤堰司를 두어 오랜 재이로 황폐해진 수리시설을 복구 또는 개발하는 한편, 그 공사에 기민을 동원하여 먹을 것을 제공하는 방식을 썼다.0657)≪顯宗實錄≫ 권 5, 현종 3년 정월 경인. 현종 3년(1662) 정월 제언사가 복설되고「진휼청제언사목」이 마련되었다.0658)이 때 복설이라고 한 것은 중종대의 例를 다시 취한다는 뜻이었다. 호조판서와 진휼청 당상이 함께 그 일을 맡고 낭청은 호조의 낭관으로 임명하였다.0659)≪顯宗實錄≫ 권 5, 현종 3년 정월 정유.
≪顯宗改修實錄≫ 권 6, 현종 3년 정월 경인.
≪備邊司謄錄≫ 22책, 현종 3년 정월 18일 및 26일.
李泰鎭,<朝鮮時代 水牛·水車 보급 시도의 農業史的 의의>(≪千寬宇先生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정음문화사, 1985).
―――,≪韓國社會史硏究≫(知識産業社, 1986), 334∼335쪽.

 진휼청은 대재해가 계속되는 가운데에 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날로 높아갔다. 그래서 郎廳까지도 ‘나라 일에 성의가 있는 자’로 엄선할 정도였다.0660)≪顯宗實錄≫ 권 7, 현종 4년 8월 신축. 이 때는 閔維重과 南九萬이 낭청으로 차임되었다. 진휼청은 慶德宮(경희궁) 앞 비변사에 본청을 두고0661)≪備邊司謄錄≫ 40책, 숙종 12년 6월 4일. 용산강(마포강) 군자창·풍저창 등 주변에 江倉을 두었다.0662)≪顯宗實錄≫ 권 19, 현종 12년 5월 갑술. 기민들은 주로 강창 주위에 많이 모여들었다.

 현종 11년과 12년의 기근은 현종초의 그것보다 더 참혹하였다. 당시의 기록은 12년 2월에만 진휼청이 돌본 기민이 2만 명, 사망자 60명이었다고 한다.0663)≪顯宗實錄≫ 권 19, 현종 12년 2월 신해. 기근은 전염병뿐만 아니라 심한 추위까지 동반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진휼청에서 주검을 매장하는 데 면포를 주어 몸을 가리고 단단히 묶게 하면, 산 사람들이 곧 그 주검을 파내어 염한 것을 벗겨갈 정도였다고 한다.0664)≪顯宗實錄≫ 권 19, 현종 12년 3월 병자. 현종 11년 8월에 시작된 대기근은 12년 5월에 끝나는 듯 했으나 그해 밀보리 농사가 또 대흉작이어서 기근은 강도를 더해 계속되었다.

 대기근 때 아사자·전염병 사망자에 대한 보고는 충실하지 않다. 장기적인 자연재해가 정확한 보고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도 현종 12년 한 해의 경우에는 비교적 충실한 보고가 기해졌다. 이해 정월 1일부터 12월 30일까지 서울 및 각도·각군으로부터 올라온 보고를 집계하면, 총 기민수는 680,993명, 동사 및 아사자 58,415명, 전염병(여역) 사망자 34,326명이다.0665)이것은 필자가≪顯宗實錄≫에서 집계한 것이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12일 사헌부의 헌납 尹敬敎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한 해에 거의 100만 명에 달했는데도 관리들이 두려워 실제 숫자를 보고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0666)≪顯宗實錄≫ 권 209, 현종 12년 12월 임오. 현종 13년 4월의 한 기록은 12년부터 13년 봄까지 전염병이 도는 가운데 12년 봄과 여름 사이 떠돌다 사망하여 시체가 길에 즐비했는데 진휼청에서 수레로 실어다가 동서 근교와 목멱산 바깥 기슭에 매장한 숫자만도 3,600여 구에 달한다고 했다.0667)≪顯宗實錄≫ 권 20, 현종 13년 4월 병술. 이 기록은 한성부가 나중에 10리 밖으로 옮겨 매장하였다고 밝힌 다음에 시체의 숫자를 제시해 후자만의 것인지 전체 것인지 애매하다. 그리고 13년의 보고는 동·아사자 152명, 전염병 사망자 5,620여 명의 숫자밖에 내놓지 않고 있다. 이것은 양년의 기근이 임진·계사년 전란 때보다 더 참혹하다는 말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다. 이 해에 상평청과 진휼청의 죽 끓이는 곳에 모인 숫자는 많을 때는 4,300여 명, 적을 때도 2천여 명이었으며, 곳곳에 도둑이 들끓었다고 한다.0668)≪顯宗實錄≫ 권 20, 현종 13년 3월 을해.

 진휼청은 숙종·영조대에도 거의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면서 계속 존속하였다. 소빙기 자연재해가 계속되는 한 이 기구는 없어질 수 없었다. 그러나 진휼청은 숙종 12년 6월에 폐지되고 상평청이 그 기능을 대신했다. 그 사이에 재이가 뜸해져 대아문을 계속 둘 필요가 없다는 주장에 따라 변개 조치가 취해졌다.0669)≪備邊司謄錄≫ 40책, 숙종 12년 6월 4일. 진휼청이 주관하던 재물과 미곡은 모두 상평청으로 옮기고 선혜청에서 一員이 상평청에 파견되어 진휼의 업무를 전관하도록 했던 것이다. 요컨대 흉년이 드물어진 틈에 진휼청의 재곡을 상평청의 규례로 증식하되 전국의 대동미를 관장하는 선혜청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숙종 21년(1695) 8월 다시 대흉년과 대기근이 닥침으로써 진휼청은 복설되었다. 賑政이 새로이 바빠져 타청에 그 업무가 속해 있을 수 없으므로 현종 2년(1661)·11년의 예에 따라 복설하는 것으로 조치하되, 당상과 낭청은 현임 상평청 당상과 낭관들이 그대로 맡도록 하였다. 상평청 당상과 낭관들이 진휼청의 임원을 겸한 것은 그 사이 대동법 및 주전의 시행으로 상평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서는 진휼의 자본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휼청이 상평청과 유대관계를 가진 체제는 이후 계속되었다. 영조 후반 곧 1760년대에 소빙기 재해가 거의 종식되는 시점에서 진휼청은 그대로 존속하면서도 그 소관 재곡의 이름은 常賑穀으로 바꾸어 부르도록 하였다. 이것은 상평청이나 진휼청에 移付되는 각 읍 곡물을 하나로 통합해 관리하기 위해 취해진 명칭 변개이지만, 한편으로는 소빙기 자연재해가 바로 이 시점에서 끝나 진휼곡의 용도도 급격히 줄어들어 이식곡으로의 용도 변경이 가능했던 의미를 지니는 변화였다.0670)≪備邊司謄錄≫ 154책, 영조 46년 9월 15일. 정조 7년(1783)≪字恤典則≫을 제정하는 단계에는 진휼의 빈도가 현저하게 줄어들어 그 재곡을 유기아들에 대한 사회보장적 조치에 쓰이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李泰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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