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3. 인구의 감소
  • 2) 소빙기 자연재해와 인구 동향

2) 소빙기 자연재해와 인구 동향

 조선시대 인구에 관한 연구에서 앞으로 최소한 증감시기 곧 인구의 흐름에 대한 인식만은 일치시켜야 한다. 이것은 각 시기의 상황에 관한 구체적인 검토로서 가능한 문제이다. 추정 방법은 과학적일수록 좋지만, 상황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면 아무리 과학적인 분석방법이라도 무효한 것이 되기 쉽다. 조선왕조 시대의 거의 반에 해당하는 시기에 존속한 소빙기현상에 대한 인식은 이 시대 인구 동향 파악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아직 소빙기현상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도 연구자들 가운데는 기근·전염병 등으로 인한 인구의 감소를 중요시하였다. 이는 관련 문헌 검토에서 이에 관한 기록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소빙기현상의 존속 기간과 그 재해의 규모가 가시화되었으므로 이를 고려하여 인구의 증감을 다시 살핀다면 보다 더 체계적인 연구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기존 연구들이 보인 견해 차이와 쟁점들도 소빙기현상에 대한 이해를 통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정리한 기존의 연구성과 가운데 소빙기현상과 관련해 재음미가 필요한 것은 16세기 중반 이후의 인구 성장 둔화설과 17세기 중반부터의 인구상승설이다. 전자는 토니 미첼이 제기한 것이고, 후자는 이영구·이호철을 제외한 연구자들이 모두 취한 것이다.

 16세기 중반 둔화설은 그 시작점을 명종대부터로 보았다.0673)미첼교수는 어느 왕대라고 직접 언급하지 않았으나, 그가 제시한<조선시대의 인구추정표>에 의하면 1550년대부터 성장이 정체한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둔화의 원인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든 것이 없다. 16세기가 조선시대에서 가장 어려웠던 암흑시대라는 학계 일각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거의 한 세기가 지난 17세기 중반에서야 비로소 같은 수준의 인구가 회복된 것으로 볼 때, 감소의 시작 시기를 통설대로 선조 25년(1592)의 임진왜란부터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견해는 15세기말에 시작된 소빙기현상의 재해가 그치지 않아 중종 6년(1511)부터 진휼청을 상설하다시피 하고 중종말부터는 정부의 진휼대책조차 무력한 상태에 빠진 사실로서도 뒷받침 될 수 있다. 앞에서 살폈듯이 중종 6년에 처음 설치한 진휼청은 중종 20년에 독립기구에서 호조 산하로 들어갔지만, 중종 36년에 다시 독립기구로 환원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호조·선혜청 등을 통할하면서 비상체제의 중심으로 기능하였다. 이 사실은 사회경제적 상황이 중종 36년의 시점부터 극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는 판단을 가능하게 한다.<그림 2>(이 글의 뒤에 제시)는 성종 12년(1481)부터 명종 8년(1553)까지 서울의 쌀값(면포의 필수)에 관한 기록들을 정리한 것이다. 이를 보면 성종 12년부터 조금씩 상승하기 시작한 쌀값이 1500년대에 상승의 폭이 3배로 높아진 후, 1510년대에 다시 큰 동요를 보이기 시작하여 1540년대부터는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진 것을 보여준다. 거듭된 기근과 전염병의 만연이 가져온 상황이었다. 15세기 인구 상승의 요인이 16세기 전반에는 거듭하는 자연재해 속에서 어느 정도 순작용을 유지했다하더라도 16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상승효과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던 것이다. 토니 미첼의 16세기 중반 둔화설은 정곡을 얻은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음, 17세기 중반 인구상승설의 경우, 그 근거는≪호구총수≫및 실록의 호구조사 결과이다. 인조 17년(1639)부터 재개된 호구조사 결과가, 현종 7년(1666)부터 200만 명 대에서 400∼500만 명 대로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이에 근거해 이 시기를 인구 회복 및 상승기로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소빙기설에 의하면 현종대는 자연재해의 피해가 가장 심했던 시기이다. 현종대의 호구조사에 대해 권태환·신용하는 ‘급격한 질적 향상’이라고 평가했고, 이영구·이호철도 호구에 대한 국가의 파악방식이 이 시기에 변한 것으로 보고 이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을 취했다. 토니 미첼은 숙종 4년(1678) 자료부터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현종대의 자료에 대해 의미있는 해석을 끌어내기는 어려운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현종대는 앞에서 살폈듯이 소빙기현상의 자연재해가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냈던 시기 중의 하나였다. 현종 즉위년과 2년의 유례없는 흉년과 기근으로 진휼청을 다시 설치하였다. 그리고 현종 3년에는 영남·호남 지역에 심한 기근이 들었다. 그리고 현종 11∼12년에는 후대에 庚辛大饑饉이라는 별칭을 남길 정도로 사상 유례가 없는 대기근과 전염병이 돌아 100만 명 이상의 인명 피해를 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런 착오는 현종대의 호구조사의 실황과 성격을 다시 살피게 한다.

 인조 17년부터 재개된 호구조사의 실상과 성격에 대해서는 최근 아주 구체적인 연구성과가 나와 크게 참고된다.0674)鄭演植,≪조선후기 ‘役摠’의 운영과 良役 變通≫(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3). 이에 따르면, 현종대와 숙종대 초반의 호구수의 급증은 良役制 유지를 위해 호구 색출을 어느 시기보다 강력하게 추진한 결과에 불과한 것이며, 이런 색출이 때마침 닥친 대기근과 전염병의 발생으로 제도 운영에 큰 문제를 던져 양역변통 논의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연구에 근거해 17세기의 양역제와 호구조사의 관계를 정리하여 현종대 호구증가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 전기의 實役 위주의 군역제도는 성종 8년(1477)에 467,716명(正軍 134,973명, 保人 332,745명)의 군역 의무자를 파악하였다.0675)李泰鎭 외,≪韓國軍制史≫近世朝鮮前期(陸軍士官學校 韓國軍事硏究室, 1968), 208∼209쪽. 그런데 실역 위주의 군역제도는 16세기에 자연재해가 계속되는 가운데 布納化로 변질되어 군역 의무자를 파악한 軍籍은 과세 장부로 바뀌어갔다. 이런 변질 속에서도 중종 4년(1509) 12월의 군적은 정군 177,322명, 雜軍 123,958명을 파악하였다.0676)정군 177,322명은 정상적인 상태라면 436,212명의 보인을 가지게 된다. 성종 8년의 정군과 보인의 비율이 2.46명이므로 이를 중종 4년의 정군수에 곱하면 위의 숫자가 산출된다. 정군과 보인을 합친 613,534명이 곧 당시의 총 군역 의무자(군적에 오른자)가 된다. 그러나 이때의 군적 조사 결과가 왜 정군과 잡군의 수만을 제시하고 보인의 수를 빠뜨렸는지는 알 수 없다. 중종 18년 12월에도 다시 정군 186,691명, 잡군 125,074명을 파악하였다.0677)정군 186,691명을 중종 4년의 경우와 같은 방법으로 계산하면 보인 459,262명, 양자를 합친 총액은 645,954명이 된다. 중종대에는 2차의 군적 개수와 함께 호구도 두 차례 조사할 수 있었다. 중종 14년에 호 754,146, 구 3,745,481, 중종 26년에 구 3,965,253명을 조사하였다. 그러나 이후로는 어느 쪽도 성과를 올릴 수 없었다.0678)실록에 의하면, 명종 7년(1552) 7월, 선조 원년(1568)·6년 8월 등 3차례에 걸쳐 군적 조사가 시도되었으나 민의 반발로 중단되었고, 단지 선조 8년 3월에 신군적을 반행하였다고 하나 숫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소빙기 자연재해로 민의 피폐가 갈수록 심해지고, 군역 의무자들이 유리·도산하는 경우가 많아 이를 충정하기 위한 개수의 필요성은 높아도 실행이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임란 후에도 상황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었다. 군적 개수를 위한 사업은 광해군때까지 한 번도 착수되지 못하였다.0679)이하 鄭演植, 앞의 책의 요지를 정리한 것이다. 광해군 2년(1610)에 軍丁 확보를 목적으로 號牌法 시행이 시도되었지만 일반민의 반발로 중지되고 말았다. 인조반정(1622)으로 서인이 집권한 뒤 군사력 증강의 필요성은 이전보다 더 높아졌다. 반정 주도세력이 친명정책을 표방하여 후금의 내침 가능성이 높아져 군사력 증강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서인정권은 舊軍籍과 관계없이 군사가 될 만한 자들을 모아 서울에 군영을 신설하여 국방과 정권유지에 필요한 군사력으로 삼았다. 이렇게 군사력 증강의 필요성이 높아짐으로써 군역 대상자 파악을 위해 인조 3년에 호패법 시행이 다시 시도되었다. 호패의 위조, 미착용에 대한 엄한 벌칙(참형)을 내세워 1년만에 男丁의 수를 103만 명에서 226만 명으로 증가시키고(이때는 私賤의 노비도 포함했던 것 같다), 이를 근거로 이듬해에 군적 개수작업에 착수하였다. 임란 이전부터 내려오는 군적의 군액이 40만 명이며0680)이것은 선조 8년(1575) 3월에 頒行했다는 신군적의 파악 수자가 아닌가 한다., 이 가운데 戶·保를 합쳐 251,679명이 虛位란 것도 처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반민의 피폐가 심했기 때문에 개수작업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고, 정묘호란으로 조정이 강화도로 피난하는 길에 민심 이반을 두려워하여 호패 관련 문적들을 모두 한강변에서 불사르고 말았다.

 군적 개수사업은 인조 12년(1634)에 다시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원칙만 정하고, 이듬해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실행되지 못했다. 인조 16년부터 歲抄란 것을 통해 空戶充定사업이 착수되었지만, 반정 후에 증설한 군영 군사를 뽑는 것(별세초)을 우선하여 구군적의 궐액 채우기(大歲抄)는 인조 26년까지도 인조 3년 것에서 겨우 56명을 더 채운 것에 그쳤다.

 효종은 주지하듯이 북벌정책을 표방하였기 때문에 군역 대상자 확보정책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때도 자연재해의 피해는 계속 누증되는 상태였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새 대상자 색출이 가능하면 신군영에 우선적으로 배속되고 구군적의 궐액 채우기는 사실상 진전이 없었다. 남한산성의 守禦廳 배속 병력을 단속하고, 서울 御營廳의 군사를 7,000명에서 21,000명, 禁軍을 600여 명에서 1,000명으로 각각 확장한 것이 주요 성과였다. 마지막으로 훈련도감 군사를 5,000여 명에서 10,000명으로 늘이는 사업을 추진 중에 국왕이 승하하였다. 당시의 군영제도도 전기의 군역제도처럼 1명의 정군에게 2∼3명의 保人을 배당하였으므로, 위 23,000명의 증액에는 46,000∼69,000명의 보인 충정을 수반하였으므로 자연재해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마지막 훈련도감 군사 증액 조치에 대해서는 반대의견이 많았다.

 현종 즉위초에 시작된 군액 감축 논의는 훈련도감의 증원분 5,000명(10哨) 감축에 초점을 두었다. 이 논의는 시간을 오래 끌었지만 결국 현종 10년(1669)에 감축하지 않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대상 인원이 이미 서울에 와있으므로 감축하여 되돌려보내기 보다는 그대로 두고 결원이 생기더라도 보충하지 않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뿐만 아니라 그 인원은 훈련도감에 그대로 두지 않고 訓鍊別隊란 신군영 창설로 이어져, 앞으로 결원 보충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도 사실상 무위로 돌아갔다. 인조반정 이래 중앙 군영 창설은 반정 주체인 서인들이 거의 주도하였다. 훈련도감·어영청·수어청 등의 군권이 모두 그들에게 돌려졌다. 그 서인을 견제해 오던 남인이 현종 조정에서는 모처럼 정치적 우세를 잡았다. 국왕과 서인의 거두 宋時烈의 반목이 심했기 때문에 남인의 요직 진출이 현저하게 우세해졌다. 남인들은 서인을 견제할 새로운 군영이 필요했으며, 국왕도 이 점을 용인해 현종 11년에 元軍 13,700명, 保人 41,100명, 총 54,800명의 규모로 훈련별대가 창설되었던 것이다. 현종대는 현실적으로 군액을 절대적으로 감축해야 할 상황이었으나, 정치적으로는 정파간에 군권 경쟁이 가열되어 군영 증설이 계속됨으로써 군역(양역) 대상자 색출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었다. 이 시기에 전례없는 자연재해가 거듭하는 가운데서도 호구조사가 강화되어 이전보다 많은 호구 수치를 남긴 것은 바로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재해의 피해가 크면 군액 조사는 늦추어야 하는데 군영이 증설되는 정치적 상황에서는 오히려 재해로 도산한 자를 채워야 하는 필요성까지 합쳐져 군의 확보를 위한 호구조사의 강도가 더욱 높아지는 모순이 빚어졌던 것이다.

 현종대의 호구정책은 인조·효종대와는 질적으로 전혀 달랐다고 한다.0681)鄭演植, 앞의 책. 현종대의 호구조사는 事目의 규정을 이전보다 훨씬 더 강화하였다. 첫 식년인 원년의 경우, 호적에 탈루된 자들을 全家徙邊律로 다스린다고 하였다.≪經國大典≫·≪大典續錄≫·≪大典後續錄≫에서는 보지 못하던 규정이다. 다음 식년(현종 4년, 1663)에서도 호적 누락자는 고역인 水軍에 충정하고, 私賤이 그랬을 경우는 전가사변률을 적용한다고 했다. 현종 7년에는 나이를 1년 허위로 기재하면 당사자와 家長을 杖 100, 1丁을 누락시킨 자는 杖 100에 徒 3년, 3丁을 누락시킨 자는 全家徙邊에 처한다고 하여 호적 사무 관리자들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漏戶는 사대부나 공사천을 막론하고 徙邊에, 호적 담당자는 管領·統首·監考 이하 里正에 이르기까지 杖 100부터 전가사변, 充軍의 형벌을 가한다고 훨씬 더 구체적인 규제사항을 두었다. 군역을 피하거나 끼니를 얻기 위해 서울에 위장 입적해 있는 良戶도 철저히 색출해 내도록 하였다. 현종대에 호구조사 결과가 급증한 것은 바로 이런 강력한 규제 강화를 통해 얻어진 것이었다. 현종 11년(1670)은 훈련별대가 창설되고, 이전에 비해 매우 많은 호구수를 올린 해였지만, 한편 그해 가을부터 다시 전례없는 강추위와 대기근(경신대기근)이 엄습하고 전염병이 맹위를 떨치기 시작하였다.

 현종대 호구조사 결과에 대한 위와 같은 파악에 의하면, 이 시기를 호구 급증의 전환기로 보기에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다. 인구 감소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던 소빙기 자연재해의 피해가 이 시기에 더 가중되고 있었다면 이 시기에 인구가 증가했다고 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사회적인 조건은 앞 시기와 마찬가지거나 더 나빠졌는데 탈루한 가호의 색출이 강력하게 추진되어 숫자가 늘어났을 뿐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실제 호구수는 앞 시기 인조·효종대와 비슷했는데 지금까지는 국가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호적에서 빠졌던 가호들이 이때 다수 색출되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특히 군역 부과 대장인 軍籍이 호적에 근거해 작성되었으므로 호구조사는 군역정책의 향방에 따라 좌우될 수 있는 문제였다. 호구조사의 실상과 성격이 이렇다면, 그 수를 일률적으로 실제 인구수의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현종대의 숫자는 그 이전이나 이후에 비해 과도하게 잡힌 것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현종대에 군역의무자의 수(役摠)가 이렇게 정점에 이르렀지만 경신대기근으로 양역제가 본격적으로 흔들리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한다.0682)위와 같음. 미증유의 참화가 전국을 휩쓸고 지나간 뒤부터 지금까지 파악한 군액이 과도함으로 감축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져 16세 이상 남정을 모두 군역(양역) 의무자로 파악하여 군적에 올리는 양역제 자체를 변경해야 한다는 변통론이 대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현종대 호적 조사 강화 후 인구가 감소된 시기는 1669∼1672년, 1693∼1696년, 1732∼1735년, 1738∼1741년, 1747∼1750년 등 다섯 차례인데, 이 모두가 대기근과 전염병이 맹위를 떨친 시기로, 이 시점들에서는 한결같이 양역변통론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고 한다. 소빙기 자연재해가 군역정책의 오랜 원칙을 흔들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경신대기근 이후로는 양역 의무자수(役摠;약 100만 명)가 고정되는 가운데 소규모의 간헐적인 증감은 있었지만 더 이상 늘지 않고 고정 내지 감축되는 추세였다고 한다. 숙종 21년(1695)에 다시 이른바 乙丙(乙亥·丙子)대기근을 겪은 이후로는 역총을 감축 또는 고정, 규정 외의 과다한 역총의 색출을 목표로 한 정책이 균역법 시행 직전까지 계속 추진되었다고 한다. 숙종대 이후 영조 24년(1784)에 균역법 시행의 토대가 된≪良役實摠≫이 마련되기까지의 호구수는 이런 정책의 흐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현종대 호구 급증의 배경이 위와 같다면, 장기적인 소빙기 재난 속에 인구가 회복되기 시작하는 시점은 어디일까. 한마디로 이것은 앞으로 다방면의 천착을 통해 포착해내야 할 과제이다. 한성부의 인구가 효종 8년(1657)의 80,572명에서 현종 7년에 194,030명으로 급증한 것도 현종대를 인구회복의 전환기로 보는 중요한 근거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한성부 인구 급증은 기근과 전염병 만연이 극심해지면서 국가의 진휼사업이 서울에서 가장 낫게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로 유입하는 인구가 늘고 또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 색출이 철저했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에 기민 구제의 한 대책으로 모든 부역이 雇役制로 전환하여 서울에서 품팔이 할 일자리가 어느 곳 보다 많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도 유민의 서울 유입을 촉진시켰다.0683)李泰鎭,<조선시대 서울의 都市 발달 단계>(≪서울학연구≫창간호, 1994), 35∼36쪽. 이런 상황을 살피면 현종대의 서울 인구 증가는 어디까지나 국지적인 현상으로 전국의 인구가 동시에 상승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인구의 회복기는 아무래도 현종대 후 숙종대 중후반의 어느 시점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국가는 장기적인 자연재해와 전쟁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부세제도에도 변혁을 기하였다. 효종 2년에 호서지방에서부터 시작된 대동법은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부세의 부담을 덜어주는 제도의 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채택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는 새로운 제도는 반대론도 있었지만 너무 심한 재해가 양전사업의 착수를 어렵게 하여 시행되지 못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어떻든 대동법은 숙종 3년에 경상도, 숙종 34년에 황해도 등지에까지 시행되면서 궤도를 잡았다. 숙종대는 제도 개혁의 의지가 높아졌던 시기이긴 하지만 숙종 21년(1695)부터의 을병대기근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그 타격이 수년간 계속된 뒤 숙종 30년 전후부터 다시 안정세를 회복하였다. 이 무렵에 군제변통이 마침내 중앙 군영의 전면적인 개편과 함께 35,000명의 역총을 감축시킨 것도 한 지표로 삼을 수 있다. 역총은 영조 24년(1748)의≪양역실총≫에서 30,000∼40,000여 명을 줄였다. 요컨대 인구의 진정한 회복세는 1700년 전후로 잡아야 할 듯 하다. 대기근과 전염병은 이후에도 계속되지만 그 발생 간격이 점차 넓어져 사회가 받는 충격이 점차 둔화되어 그 동안에 시행된 대동법·雇役制 등의 새로운 시책들이 효력을 발생할 기회를 얻었다.

 영조 26년에 시행된 균역법은 장기적인 재해에 시달리던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 중 최종적인 것이었다. 균역법 자체도 다른 양역정책과 마찬가지로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대두한 것이라는 새로운 견해가 제시되었다.0684)鄭演植, 앞의 책. 이 최종적인 조치가 시행된 직후에 약 250년간 계속된 소빙기현상도 막을 서서히 내리기 시작하였다. 임란 후 처음 역총을 감한 숙종 30년에서 균역법이 시행된 영조 26년 사이는 어느 모로 보나 인구 회복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시기로 잡혀져야 할 것 같다. 군역 의무자의 감축은 곧 민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으로 인구회복의 한 요인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에 관한 지속적인 감축 논의가 인구회복 여건의 조성을 의미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임진왜란을 계기로 급격히 하강한 人口線은 17세기 중반이 아니라 18세기초부터 상향 곡선을 긋기 시작한 것으로 대세가 그려진다. 그러나 이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소빙기현상으로 인한 각종 재난의 실태와 제반 시책의 효력 발휘에 관한 자세한 조사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족보를 통해 파악되는 가족원수의 증감 추세도 인구 동향을 읽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安東 權氏 成化譜를 분석한 한 연구는 15세기의 평균 자녀수를 3.41∼3.73명으로 보여준 데 반해,0685)李泰鎭,<14∼16세기 한국의 인구증가와 新儒學의 영향>(≪震檀學報≫75, 1993). 조선 후기 全州 徐氏 世譜를 분석한 연구는 2.5명이란 결과를 제시하였다.0686)韓榮國, 앞의 글, 547쪽. 단 이 연구는 1547년 출생에서 1871년 출생의 族員 190명을 다루면서 평균 자녀수의 시기별 파악은 하지 않았다. 소빙기는 이 연구가 다룬 1547∼1871년 기간 중 1760년까지가 해당된다. 나머지 기간에서도 1800년대 전반기는 재난이 많았던 시기이므로 평균 자녀수가 낮게 나온 결과는 사실일 가능성이 많다. 전자가 인구증가기의 평균자녀수라면 후자는 소빙기의 재난으로 인구감소가 현저하던 시기를 포함하는 시기의 조건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의 인구 동향 분석에서는 현전하는 수많은 족보자료도 활용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 분석이다. 조선시대 인구 연구는 현재 어떤 결론적인 추정치를 제시하기 보다 새로운 출발점에서 좀더 종합적이면서 구체적인 공동작업이 요망된다.

<李泰鎭>

年 度 王 朝 戶 數 口 數 備 考
1393 太祖 2   301,300 兩界 누락
1404 太宗 4 153,404 322,786 漢城府 京畿道 누락
1406 〃 6 180,246 370,365 漢城府 누락
1423 世宗 5 196,975    
1426 〃 8 16,921 103,328 八道 조사 缺
1440 〃 22 201,853 692,475 漢城 開城 누락
1445 〃 27 217,000   漢城戶口 누락
1519 中宗 14 754,146 3,745,481  
1531 〃 26   3,965,253  
1543 〃 38 836,669 4,162,021  
1639 仁祖 17 441,827 1,521,165  
1642 〃 20 481,660 1,649,012  
1645 〃 23 505,911 1,738,888 度支志:441,321;1,531,365
1648 〃 26 533,720 1,793,701  
1651 孝宗 2 580,539 1,860,484  
1654 〃 5 628,603 2,047,261  
1657 〃 8 668,737 2,201,098 度支志:658,771;2,290,083
1660 顯宗 1 758,417 2,479,658  
1663 〃 4 809,365 2,851,192  
1666 〃 7 1,108,351 4,107,156  
1669 〃 10 1,313,652 5,018,744 度支志:1,313,453;5,018,644
1670 〃 11 1,342,074 5,164,524  
1672 〃 13 1,205,866 4,720,815  
1675 肅宗 1 1,250,298 4,725,704  
1678 〃 4 1,332,446 5,872,217 度支志:1,342,428;5,246,900
1681 〃 7 1,376,842 6,218,342  
1684 〃 10 1,444,377 6,573,107  
1687 〃 13 1,468,537 6,769,723  
1690 〃 16 1,514,000 6,952,907  
1693 〃 19 1,547,237 7,045,115  
1696 〃 22 1,296,569 5,626.986 平安道, 咸鏡道는 흉년으로 조사가 결
1699 肅宗 25 1,333,330 5,774,739  
1702 〃 28 1,342,486 5,922,510  
1705 〃 31 1,370,313 6,062,953  
1708 〃 34 1,406,610 6,206,554  
1711 〃 37 1,466,245 6,394,028  
1714 〃 40 1,504,483 6,662,175  
1717 〃 43 1,557,709 6,839,771  
1721 景宗 1 1,559,488 6,799,097  
1723 〃 3 1,575,966 6,865,404  
1726 英祖 2 1,614,598 6,955,400  
1729 〃 5 1,663,245 7,131,553  
1732 〃 8 1,713,849 7,273,446  
1733 〃 9 1,714,569 7,273,446  
1735 〃 11 1,618,172 6,979,798  
1738 〃 14 1,672,184 7,096,565  
1739 〃 15 1,662,219 7,040,480  
1741 〃 17 1,685,884 7,192,848  
1744 〃 20 1,749,612 7,209,213  
1747 〃 23 1,759,692 7,340,318  
1750 〃 26 1,783,044 7,328,867  
1753 〃 29 1,772,749 7,288,627  
1756 〃 32 1,771,350 7,318,359  
1759 〃 35 1,690,715 6,968,856  
1762 〃 38 1,691,040 6,981,598  
1765 〃 41 1,675,267 6,974,642  
1766 〃 42 1,675,267 6,974,642  
1768 〃 44 1,679,865 7,006,248  
1771 〃 47 1,689,046 7,016,370  
1774 〃 50 1,703,030 7,098,441  
1777 正祖 1 1,715,371 7,238,523  
1780 〃 4 1,714,550 7,228,076  
1783 〃 7 1,733,757 7,316,924  
1786 〃 10 1,740,592 7,330,965 增補文獻備考:1,737,670;7,356,783
1789 正祖 13 1,752,837 7,403,606  
1792 〃 16 1,689,596 7,438,185  
1799 〃 23 1,741,184 7,412,686  
1801 純祖 1 1,757,973 7,513,792  
1807 〃 7 1,764,801 7,561,403  
1811 〃 11 1,761,887 7,583,046  
1814 〃 14 1,637,108 7,903,167  
1816 〃 16 1,555,998 6,595,368  
1820 〃 20 1,533,515 6,512,349  
1823 〃 23 1,534,238 6,470,570  
1826 〃 26 1,549,653 6,558,784  
1829 〃 29 1,563,216 6,644,482  
1832 〃 32 1,565,060 6,610,878  
1834 〃 34 1,578,823 6,755,280  
1835 憲宗 1 1,572,454 6,615,407  
1837 〃 3 1,575,411 6,613,327 濟州 포함 1月
1837 〃 3 1,551,951 6,708,572    〃 12月
1839 〃 5 1,577,806 6,684,191 1月
1839 〃 5 1,577,824 6,693,006 濟州 제외 12月
1840 〃 6 1,560,774 6,617,997  
1842 〃 8 1,568,176 6,625,953 1月
1842 〃 8 1,570,473 6,701,629 3月
1843 〃 9 1,566,892 6,630,491 1月
1843 〃 9 1,582,313 6,703,684 12月
1844 〃 10 1,582,673 6,719,648  
1845 〃 11 1,572,656 6,656,440  
1846 〃 12 1,581,594 6,743,862  
1847 〃 13 1,587,181 6,751,656  
1850 哲宗 1 1,529,356 6,470,730  
1852 〃 3 1,588,875 6,810,206  
1856 〃 7 1,597,343 6,828,907 濟州 포함
1859 〃 10 1,600,434 6,869,102  
1861 〃 12 1,589,038 6,748,138  

<표 1>≪朝鮮王朝實錄≫과≪戶口總數≫에서 발췌된 조선시대 전국 호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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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朝鮮時代 인구추정 諸說 비교
<그림 1>朝鮮時代 인구추정 諸說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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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1481∼1553년간 쌀1두당 면포값 변동표(서울)
<그림 2>1481∼1553년간 쌀1두당 면포값 변동표(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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