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5. 진전의 개간과 양전사업
  • 2) 양전사업
  • (1) 양전의 목적과 시행과정

(1) 양전의 목적과 시행과정

 토지는 중세 사회에서 국가가 재정에 필요한 부세를 거두는 가장 중심적인 대상이었으므로 이를 체계적으로 수취하기 위해 토지에 대해 적절한 파악 기준을 마련하였다. 그것이 量田制였다. 양전은 각 지방의 토지 결수를 조사하여 이를 통하여 농민에게 세를 배정하여 징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세에 대한 수취를 합리적으로 운영하려면 양전을 통해서 토지 결수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여기서 각각의 토지에 대하여 위치, 종류와 陳起 여부, 면적, 소유주 등을 조사하였다.

 조선 사회에서도≪경국대전≫에 의하면 양전은 結負法으로 양전을 하며 전품을 6등으로 구분하고 20년마다 한번씩 改量을 하여 양안을 작성하여 이를 戶曹·本道·本邑에 보관하도록 하였다.0770)≪經國大典≫戶典 量田. 조선초에는 양전이 30년 1회의 수준이었으나≪經國大典≫의 편찬 시기에 20년 1회로 강화되었다고 한다(吳仁澤,≪17·18세기 量田事業 硏究≫, 釜山大 博士學位論文, 1996, 13쪽).

 다만 자의 길이를 달리하여 1등전은 周尺에 준하여 4척 7촌 7푼 5리, 2등전은 5척 1촌 7푼 9리, 3등은 5척 7촌 3리, 4등은 6척 4촌 3푼 4리, 5등은 7척 5촌 5푼, 6등은 9척 5촌 5푼으로 하였다. 그 결과 1등전 1결은 38畝에 준하고, 2등전은 44무, 3등전은 54무, 4등전은 69무, 5등전은 95무, 6등전은 152무에 준하였다. 따라서 등급에 따라서 같은 결부 단위라도 서로 면적이 달랐다.

 그리고 토지의 종류는 해마다 경작하는 正田과 혹 경작하기도 하고 혹 묵히기도 하는 續田으로 나누었다. 정전은 부분 진황, 전면 진황간에 일체의 진황이 인정되지 않고 매년 과세의 원칙이 적용되었으며, 속전은 토지를 받아 경작하고 있는 자의 신고에 따라 수령이 직접 심사하여 진황이 인정되면 면세받을 수 있었다.

 토지의 면적은 개간이 되어 늘어나거나 陳田이 생겨 줄어드는 등 변화가 있기 마련이므로 계속 개량을 해야 한다. 특히 농민의 입장에서는 진전 수세의 폐단을 막고자 陳起를 다시 조사하기를 바라고, 정부에서는 加耕田 등 은루된 토지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결수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았다. 그것은 개량에 필요한 비용이 많이 들고 변화에 따른 혼란이 일어나기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번 정해진 토지 결수를 변동시키기는 어려웠다.

 조선 전기 15세기 동안 양전이 대체로 30년에 1회 정도로 시행되었으나 16세기에 들면 양전이 시행되지 않았다. 그것은 국초에 개간이 급격히 진행되다가 16세기로 가면서 점차 가경지가 급격하게 감소되었기 때문이다.0771)吳仁澤, 위의 책, 14쪽.

 그러나 임란을 거친 뒤 전국적인 양전사업이 필요하였다. 전쟁으로 인하여 많은 땅이 황폐해져서 이전의 結數를 책정하기 어려웠고 한편으로는 계속 개간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변화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전쟁 중에 토지대장이 많이 상실되었던 점도 중요한 이유였다. 게다가 조선초 공법에서 만들어졌던 연분 9등의 제도는 임란 전부터 무너지고 마지막 등급인 下之下로 고정되었는데 토지까지 황폐화되면서 국가의 전세 수입은 매우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임란이 끝난 뒤 양전사업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국가재정 문제로 인하여 선조 33년(1600)에 계획된 양전 방식은 임시방편적인 성격을 띠었다. 곧 중앙에서 양전사가 파견되는 것이 아니라 매년 시기결과 진황지를 각 읍이 각기 타량하여 감사를 통하여 중앙에 보고하도록 하고 災傷敬差官이 호조에서 추첨한 각 도 1개 읍을 타량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진황지 타량이 양전을 한 뒤에 경작이 되지 않더라도 白徵을 당할 우려 때문에 여기에 대해 저항이 일어나자 다시 시기결만을 타량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선조 34년부터 시행된 양전은 전국 각 읍의 수령이 시기결만을 파악하고 그 결과를 경차관이 1개 읍을 뽑아서 覆審하는 방식으로 시행되었다. 또한 여기서도 뽑힌 읍과 그렇지 않은 읍 사이의 불공평 때문에 양전을 마친 뒤 양전어사를 파견하여 복심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양전은 지지부진했고 선조 36년에 다시 추진하여 다음해 봄에 끝마쳐 처음으로 전국적인 규모로 양전이 이루어졌다. 이를 癸卯量田이라고 하였다.

 그 결과 전라도 198,672결, 경상도 173,902결, 충청도 240,744결, 경기도 141,959결, 강원도 33,884결, 황해도 106,832결, 함경도 54,377결 등을 얻었다.0772)≪磻溪隨錄≫, 田制攷說 下. 계묘양전의 종료 7년 후인 광해군 3년의 삼남결총은 542,000여결이라고 한다(吳仁澤,<朝鮮後期 癸卯·甲戌量田의 推移와 性格>,≪釜大史學≫ 19, 1995, 345쪽).

 평안도는 알 수 없지만 삼남지방은 이전보다 큰 차이가 있고 그밖에 강원도·함경도·황해도는 거의 비슷하였다. 이는 왜란 후 토지가 척박한 탓도 있지만 전품 등급이 낮아진 것이 큰 이유로 보인다.0773)吳仁澤, 위의 글, 343쪽. 이는 임란 직후 30만 결을 칭하던 때와 비교하면 상당히 늘어났고 국가 재정의 측면에서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임란 이전과 비교한다면 여전히 은루결이 많이 있었고 특히 이 시기 활발한 개간과 관련하여 가경전이 증가하였으므로 양전의 필요성은 늘어났다. 나아가 공납제 개혁에 있어서 주요 현안으로 등장한 대동법 실시를 위해서도 양전은 절실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계묘양전 이후 20년만인 인조 원년(1623)부터 양전논의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개간이 진행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양전이 미루어지다가 인조 12년에 다시 삼남지방에 양전을 하였다. 이를 甲戌量田이라고 하였다. 본래는 삼남지방에 양전을 한 뒤 곧바로 강원도와 경기를 시행하고자 하였으나 실제로는 추가적으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때의 목표는 토지를 철저하게 파악하여 임란 이전의 결총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量田事目에도 ‘滿平時結負’라고 명기할 정도였다.0774)吳仁澤, 앞의 책, 57쪽. 실제로 계묘양전에서 파악하지 못했던 진황지가 등록되고 전반적으로 전품도 상승되면서 결총도 획기적으로 늘어나서 거의 임란 이전의 결총 수준에 도달하였다.

 갑술양전은 각도에 2명씩 파견된 6명의 양전사가 담당하였다. 여기서 수령보다 양전사 쪽을 선택한 것은 그쪽이 재지 지주층을 통제하는 데 있어서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갑술양전은 광범위한 개간지, 곧 은루결의 파악에 목표가 있었고 은루결은 주로 지주층의 소유지에 편재하였던 것이다. 양전사가 주관한 갑술양전은 수령이 주관한 계묘양전에 비해 한층 강화된 양전이었다. 이때 결부법을 개정하여 국초 이래의 隨等異尺法을 폐지하고 전분 6등에 모두 같은 자를 통용하게 하였다. 양전 과정에서 異尺制보다 同尺制가 통제하기에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동척제는 그 뒤 양전에서 계승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국가의 부세 대부분을 담당하는 삼남지방에 대한 새로운 양전이 일단 마무리가 된 셈이었다. 이때 조사된 삼남지방의 총 농지면적은 895,489결인데 실제 경작지는 540,860결이고 나머지 354,629결은 진전이었다.

 그 뒤 효종 4년(1653)에는 경기도가 근본의 땅인데도 전결의 절반이 줄어들었다고 하여 양전을 하였다. 이때도 새로운 結負法을 이용하면서 遵守冊을 만들었다. 현종조에서도 양전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현종 4년(1663)에는 경기도에 양전사를 보내어 양전을 하였고 6년에는 함경도에 양전을 하였다. 현종 10년에는 충청도 公州·靑州·忠州·尼山·天安·洪州·溫陽·木川·提川·扶餘·保寧·林川·庇仁·靑陽·淸安·延豊·恩津·結城·全義·平澤·定山 등 21읍과, 황해도 黃州·海州·安岳·平山 등 4읍에 양전을 하였다. 충청도는 갑술양전의 지역인데도 다시 충청도의 절반 가까이 양전한 것이 주목된다. 이는 갑술양전에서 결수가 많이 늘었으나 충청도는 가장 적었기 때문에 다시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0775)吳仁澤, 앞의 글, 354쪽.

 숙종대에 들어서서 대대적으로 양전이 일어났다. 숙종 10년(1684) 강원도에 양전을 하고자 하였으나 중간에 그치고 말았다. 그후 숙종 27년(1701)에는 황해도 康翎·瓮津·殷栗 등 3읍을 양전하였고, 35년에는 강원도 通川·襄陽·蔚珍·旌善·杆城·高城·寧越·平昌·歙谷·平海·江陵·三陟·原州·洪川·春川·橫城 등 16읍을 양전하였다. 처음에는 각 도별로 시작하여 점차 전국에 걸쳐 양전을 시행한다는 것이었는데 부분적인 양전으로 그쳤다가 숙종 45·46년에 다시 삼남의 모든 지역에 대하여 개량하였다. 이를 庚子量田이라고 하였다. 이때의 목적도 늘어나는 은루결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숙종 말기 응세결수는 원장부의 절반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양전 반대론에도 불구하고 양전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0776)당시 양전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있었고 황해도 3읍에서는 方田法이 시행되기도 하였다(崔潤晤,<肅宗代 方田法 施行의 歷史的 性格>,≪國史館論叢≫38, 國史編纂委員會, 1992).

 그 결과 8도의 전결은 모두 139만 5,333결이었다.0777)≪增補文獻備考≫<田賦考>.≪經世遺表≫에는≪國朝彙言≫을 인용하여 1,391,733결이라고 하였다. 각도별 액수는 다음과 같다.

경기도 전 61,862결;답 39,394결 충청도 전 16,528결;답 94,680결 전라도 전 194,167결;답 182,992결 경상도 전 19,354결;답 146,424결 황해도 전 102,475결;답 26,359결 평안도 전 71,958결;답 18,846결 함경도 전 56,212결;답 5,031결 강원도 전답 합 44,051결

 이 가운데 삼남지방만 계산한다면 97만 1천 결로서 갑술양전보다 7만 6천 결이 늘어났다. 그러나 田品이 올라가서 늘어난 결수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새로운 토지에 대한 개간보다는 여전히 전후 복구사업 차원의 진전개간이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숙종조까지의 양전은 현종조와 숙종조에 일부 지역을 단위로 행해진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 도 단위 이상에서 실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뒤 영조조 이후에는 양전의 양상이 달라졌다. 道別 양전에서 邑別 양전으로 바뀌었다. 이는 첫째 양전을 주관하는 단위를 도별에서 군현별로 축소하여 정부의 양전통제를 강화하고, 둘째는 부세제 운영의 모순이 심각한 군현부터 수개 군현씩 수령이 주관하여 매년 점진적으로 시행하고, 셋째 중앙정부가 일방적으로 양전을 주도하지 않고 각 군현의 희망에 따라 추진하고자 하였다.0778)吳仁澤, 앞의 책, 95쪽. 경자양전의 폐단과 각종 진황지의 백징과 같은 폐단을 해소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제 전정의 문란이 심한 곳에서만 수시로 미봉적인 양전이 실시되었을 뿐이다.

 영·정조대에 들어서 전국을 대상으로 하여 지속적으로 읍별 양전을 시행하였다. 영조 3년(1727) 경상도 開寧을 개량하였으며, 5년에는 蔚山을, 12년에는 강원도 旌善을, 13년에는 황해도 鳳山·長淵과 경기도 楊根·朔寧·積城·漣川·麻田·砥平 등 8개 읍을 개량하였다. 21년에는 전라도 각종 진전을 조사하였다. 22년에는 황해도 信川에서 개량을, 24년에는 함경도 會寧·茂山을, 25년에는 황해도 金川을, 26년에는 경상도 慶州·延日·長鬐·興海 등 4읍을, 35년에는 충청도 永同·沃川과 황해도 松禾 등 세 읍을 37년에는 강원도 楊口를, 38년에는 경기도 振威·富平을, 43년에는 함경도 會寧을 개량하였다. 정조대에는 원년(1777)에 경상도 咸安을, 15년에 경상도 昌原과 충청도 結成·懷仁을, 17년에는 황해도 安岳을 개량하였다.

 이 가운데 영조 연간은 경자양전의 폐단을 해소하기 위하여 다시 양전이 시행되었는데 주로 경상좌도에 해당하였다. 그리고 영조대 후반부터는 전정의 폐단이 늘어나게 되어 앞에서 거론하였듯이 읍별 양전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그 뒤 읍별 양전마저도 폐단이 심각한 소수의 군현에만 임시 미봉적으로 시행될 정도였다. 따라서 시기총수는 계속 줄어들어서 순조 3년(1803) 무렵에는 60만 결 가까이 줄어들었다. 여기에 대해 정약용은 ‘옛날 結摠과 비교하여 숨겨진 토지는 1負도 적발된 것이 없으니 한갓 백성만 시끄럽게 했을 뿐 국가에는 도움이 없었다’고 비판하였다.0779)丁若鏞,≪經世遺表≫6권, 地官修制 田制考 6.

 이상 17·8세기에 걸쳐 시행된 양전은 다음과 같다.

연 도 지 역 비 고
선조 36·7(1603·4) 경기·황해·함경·강원·평안도 계묘양전
광해군 5(1613) 三南  
인 조 12(1634) 三南 갑술양전
현 종 4(1663) 경기도  
현 종 6(1665) 함경도  
현 종 10(1669) 충청도 公州 등 20읍, 황해도 黃州 등 4읍  
숙 종 10(1684) 강원도-중도폐기  
숙 종 27(1701) 황해도 康翎·甕津·殷栗 등 3읍  
숙 종 34(1708) 강원도  
숙 종 35(1709) 강원도 通川 등 16읍  
숙종 45·6(1719·20) 三南 기해·경자양전
영 조 3(1727) 경상도 開寧  
영 조 5(1729) 경상도 蔚山  
영 조 12(1736) 강원도 旌善  
영 조 13(1737) 경기도 楊根 등 6읍  
영 조 21(1745) 전라도 陳田  
영 조 22(1746) 황해도 信川  
영 조 24(1748) 함경도 會寧·茂山  
영 조 25(1749) 황해도 金川  
영 조 26(1750) 경상도 慶州 등 4읍  
영 조 32(1756) 황해도 黃州·載寧  
영 조 35(1759) 황해도 松禾, 경기도 水原·長湍, 충청도
永同·沃川
 
영 조 37(1761) 강원도 楊口  
영 조 38(1762) 경기도 振威·富平  
영 조 43(1767) 함경도 會寧  
정 조 1(1777) 경상도 咸安  
정 조 15(1791) 경상도 昌原, 충청도 結城·懷仁  
정 조 17(1793) 황해도 安岳  

박준성,<17·8세기 궁방전의 확대와 所有形態의 변화>(≪韓國史論≫11, 서울大, 1984), 193∼194쪽, 주 22) 참조.

 그밖에 진전 명목의 은루결을 찾기 위해 여러 차례 査陳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이는 양전보다는 규모가 작은 것으로 진전만을 찾아내어 개량하는 것이었다. 가령 숙종 26년(1700) 庚辰査陳이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 경상도에서는 1만여 결을 찾아내었다.0780)≪備邊司謄錄≫51책, 숙종 26년 정월 21일. 그 뒤 경상도에서는 경자양전 실시까지 경진사진의 수세결수를 중심으로 수세하였다. 경자양전 이후에는 삼남에서 영조 5년(1729), 15년, 27년, 35년, 영조 52∼정조 2년(1778), 정조 10년 등 5년에서 10년 단위로 査陳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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