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6. 영농기술의 발달과 농촌경제의 변화
  • 1) 영농기술의 발달

1) 영농기술의 발달

 16세기 이후의 영농기술 발달은 우선 水田農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5세기의 수전농법은 水耕直播法을 중심으로 乾耕直播法·移秧法을 병행하는 단계에 있었다. 수경직파법은 논에 물을 채운 상태(무논)에서 起耕과 熟治를 하고 미리 浸種하여 발아시킨 종자를 파종하는 것이었다. 건경직파법은 糞種한 종자를 乾畓(마른논)에 파종하는 것으로 晩稻에 대해서만 적용할 수 있었고, 가뭄으로 말미암아 水耕이 불가능한 조건에서 시행하는 방법이었다.0797)≪農事直說≫種稻.
≪世宗實錄≫권 104, 세종 26년 4월 갑진.
그런데 건경법은 숙치와 제초에 많은 노동력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농민들이 쉽사리 이용하기 힘들었다.

 이앙법은≪農事直說≫에 기술적인 체계가 정리되어 있었지만 이앙할 시기에 가뭄이 들면 농사를 전부 망칠 수 있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당시의 관료들은≪經濟六典≫에 실린 이앙법에 대한 禁令을 근거로 이앙법의 실행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사실상 15세기 초반에 이앙법은 경상도와 강원도의 일부 지역에서만 실행에 옮겨지고 있었다. 15세기말 무렵에는 경상도와 강원도의 영동지역 등 일부 지역에서 이앙법을 채택하여 벼농사를 짓고 있었다.0798)≪成宗實錄≫권 6, 성종 원년 6월 임술. 16세기 중반을 경과하면서 전라도와 충청도의 일부 선진적인 지역에서도 이앙법을 이용하게 되었다. 이앙법의 보급은 선진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각각의 지역적인 농업 여건에 따라 보급시기를 달리하면서 이루어졌다. 16세기 중후반 전라도 玉果의 지역농법을 기록한 柳彭老의<農家說>에는 水稻 재배의 방법으로 이앙법을 유일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만나 충청도 林川에서 피난생활을 한 吳希文은 기본적으로 直播法을 채용하면서도 移植의 원리를 일부 원용하고 있었다. 지역적인 확산과정을 거치면서 이앙법은 17세기 중후반을 고비로 삼남지역 전역에 광범위하게 보급되었고, 이후 개성지역에서도 일부 채택하였다.0799)金容燮,<朝鮮後期의 水稻作技術-移秧法의 普及>(≪增補版朝鮮後期農業史硏究≫(Ⅱ), 一潮閣, 1990).

 이앙법이 보급된 원인으로 소규모 洑(川防) 시설의 증가와 같은 수리시설의 점진적인 호전, 이앙법이 지닌 이점에 대한 선호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이앙을 할 경우 직파에서 4∼5차례 필요한 제초 작업을 2∼3차례로 그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앙법은 수확량이 증가하고, 稻麥二毛作을 수행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17세기 전반 전란으로 인한 인구감소로 노동력 부족 현상이 나타났고, 따라서 이앙법이 제초 노동력을 절감시킨다는 이점이 보급의 구체적 계기였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0800)李榮薰,<조선사회의 경제>(정창수 편,≪한국사회론≫, 1995), 222쪽.

 이앙법 보급의 배경은 이앙법 자체의 기술적인 체계가 발달한 점에서 찾을 수 있다.0801)廉定燮,<15∼16세기 水田農法의 전개>(≪韓國史論≫31, 서울大, 1994). 우선 이앙법에서의 秧苗 관리와 秧基 施肥에 대한 새로운 기술적 발전이 16세기 중후반 무렵에 등장하였다. 秧糞에 사용되는 재료가≪농사직설≫의 柳枝 한 종류에서≪農家月令≫·≪農家集成≫등에서는 십여 가지로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이앙 시기를 놓친 앙묘를 회복시키는 방법인 蘇老秧法, 그리고 이앙의 원리를 이용하여 水田에서의 제초를 용이하게 할 수 있게 하는 還種秧法 등이 마련되었다. 이앙법의 세부적인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앙법의 안정성을 더욱 높일 수 있었다.

 乾秧法이라는 이앙법을 보조하는 기술이 마련되어 가뭄이 들었을 때에도 앙묘를 안정적으로 옮겨심을 수 있게 되었다.≪농가월령≫에 보이는 건앙법은 앙기에 물이 없는 상황에서도 乾秧을 기를 수 있게 하는 방법이었다.0802)金容燮,<≪農家月令≫의 農業論>(≪朝鮮後期農學史硏究≫, 一潮閣, 1988), 139쪽.
宮嶋博史,<李朝後期における朝鮮農法の發展>(≪朝鮮史硏究會論文集≫18, 1981).
건앙은 나중에 적당한 비를 만났을 때 이앙하게 되면 보통의 水秧(건앙에 대비한 명칭)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자랄 수 있었다. 건앙법은≪山林經濟≫에<直說補>에서 인용하는 형식으로 이앙법 증보기사로 수록되었다.

 ≪농사직설≫에 너무 일찍 설정되었던 注秧 시기가≪농가월령≫에서는 한 절기(약 15일)내지 세 절기를 늦추어지면서 계절적인 강우에 맞추어 이앙을 할 수 있도록 조정하였다. 또한 水田의 위치, 土質 등에 따라 이앙법이 채택되기도 하였다.≪농사직설≫에서 구분한 최하의 수전인 ‘高燥望天之地(天水畓)’에서는 봄에 물이 부족하여 수경직파를 할 수 없기 때문에 注秧(앙기에 파종하는 것)을 하였다가 큰비를 기다려 이앙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세종대에 鄭菑가 경상도 固城에서 이앙을 해야 되는 이유로 粘土質의 土性을 지적한 것처럼 토질에 따라서 이앙법을 시행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0803)李泰鎭,<조선 초기의 수리정책과 수리시설>(≪李基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下), 一潮閣, 1994), 1,066쪽. 17세기 중반 이후 이앙법이 수전농법에서 일반적인 경종법으로 자리매김되면서 苗板(秧基)과 本田 두 종류의 지력을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수전에서의 생산성이 향상되었고 나아가 稻麥二毛作도 가능하게 되었다.

 旱田 농업의 기술적인 발달은 田畝制度·耕種法·旱田 作付體系·麥作技術 등의 측면에서 나타났다. 먼저 전무제도에서 조선 전기에는 한전을 이랑과 고랑을 넓게 하는 廣畝로 구획하고 畎(고랑)과 壟(畝, 이랑)의 구분이 확연하지 않은 상태(대체적으로 低畝)에서 畝에 종자를 파종하였다. 이때의 畝(壟)는 파종처로 이용하기 위하여 기경·숙치하고 시비하는 곳인 반면에 畝間은 ‘息土而代墾’하면서 휴경시키고 시비처나 파종처로 이용하지 않는 공간이었다.0804)金容燮,<朝鮮後期의 麥作技術>(앞의 책, 1990), 145∼146쪽. 한전에서의 田畝가 이렇게 작성되었기 때문에 중국과 달리 한전의 碎土用 농기구로 所訖羅(써레)를 이용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田地에 대한 전면 시비와 집약적인 경영의 필요성 등으로 전무제도가 변화하였다. 전무제도가 全面耕을 하고 小畝를 빽빽하게 작성하는 형태로 변화하면서 한전의 쇄토용 농기구로 써레의 사용이 사라지게 되었다. 高畝·深畝로 整地된 상황에서 써레를 이용하는 것은 애써 만들어 놓은 전무를 손상시키는 것이었다.0805)金容燮,<朝鮮時期의 木斫과 所訖羅를 통해서 본 農法變動>(앞의 책, 1990), 233∼235쪽.

 한전 경종법의 측면에서 조선 전기의 경우 한전에서 재배하는 작물은 대부분 壟(畝)에 파종하는 壟種法이었다. 농종법 이외에 小豆를 點種하는 방식, 여러 작물을 시차를 두고 경작하는 間種法, 한 작물을 수확한 뒤에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 根耕法 등의 방식이 통용되었다.0806)閔成基,<東아시아 古農法上의 耬犁考>(≪朝鮮農業史硏究≫, 一潮閣, 1988), 11∼19쪽. 그런데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畎種法의 보급이 지역적인 편차를 보이면서 점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0807)金容燮,<朝鮮後期의 田作技術>(앞의 책, 1990), 127쪽.≪閑情錄≫·≪농가월령≫·≪산림경제≫등의 농서에서 견종법의 채용을 주장하고 있었지만 17세기 중엽까지 粟의 경우 畎畝를 뚜렷하게 구분하지 않고 재배하는 단계에 있었다. 견종법은 간종법의 확대 보급에 따라 휴식공간으로 남겨져 있던 畝間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방식이었고, 제초의 용이함(노동력 절약), 소출의 증대(생산성 증대) 등에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한전에서의 작부체계는 17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대략 1년 2작식의 체계를 갖추었다.≪농사직설≫에 보이는 조선 전기 한전의 작부체계는 1년 1작식·1년 2작식·2년 3작식 등이 있었지만, 간종법에 의한 1년 2작과 더불어 根耕法에 의한 2년 3작이 전형적인 작부체계였다고 할 수 있다.0808)金泰永,<科田法체제에서의 土地生産力과 量田>(≪朝鮮前期土地制度史硏究≫, 지식산업사, 1983), 210쪽.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 근경법의 일반적인 채택, 간종법의 확대, 麥田에서의 조세법과 한전에 給災를 하지 않는 국가정책 등을 배경으로 1년 2작의 방식이 보편화하였다.0809)閔成基,<≪農家月令≫과 16世紀의 農法>(앞의 책), 202∼204쪽. 한전 작부체계는 지역적인 특색을 보이면서 전개되었고, 이는 老農들이 오랜 경험의 축적으로 마련한 가장 적합한 체계였다고 할 수 있다.0810)閔成基,<朝鮮後期 旱田輪作農法의 展開>(위의 책), 182∼83쪽.

 조선 후기의 麥作技術은 17세기 이후 수전에서의 이앙법의 보급이 본격화됨에 따라 秋麥이 널리 재배되었다. 보리가 조선 후기에 비로소 견종법으로 재배되었는지, 조선 전기부터 그러하였는지 여부는 아직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하지만 보리는 根耕을 통해 다른 잡곡과 더불어 이모작의 한 구성원이었고, 그밖에 兩麥을 아직 수확하기 전에 같은 전토에서 콩이나 조를 경작하는 間種의 방식으로도 재배되고 있었다.0811)金容燮,<朝鮮後期의 田作技術>(앞의 책, 1990). 그리고 17세기 이후 秋麥 재배의 한 방법으로 冬麰播種法이 개발되어 보리의 穀性과 재배 원리에 대한 이해를 넓혀 나갔다. 또한 이앙법의 보급에 따라 수전에서 稻作을 수행한 뒤에 種麥하는 稻麥二毛作이 본격적으로 채택되었다. 벼와 보리의 생육기간이 중첩되는 사정을 이앙법이 해소시켜주었기 때문이었다.

 16세기 중반 이후 영농기술의 발달은 시비기술에서도 분명하였다. 조선 전기≪농사직설≫단계에서 이미 한전과 수전에 따라 시비되는 재료가 뚜렷이 구별되어 있었다. 특히 糞灰(熟糞과 尿灰를 합친 명칭)가 주요한 肥料였고, 그밖에 草木灰·生草·牛馬廏糞 등이 시비 재료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시비하는 시기는 起耕 시기로 한정되어 있었다. 16세기 중후반의 농법을 보여주는≪農家月令≫에서는 肥料를 만들기 위한 造糞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人糞(大小便)의 본격적인 사용을 강조하고 있었다.≪農家月令≫과≪農家集成≫등을 통해서 시비법에서 인분을 糞灰를 만들 때뿐만 아니라 野草나 胡麻殼 등과 섞어서 비료를 만드는 방식 등이 사용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인분을 많이 획득할 수 있는 도회지 주변 농지가 다른 지역에 비해 시비에 유리하다는 관념이 통용되고 있었다. 또한 麥作의 성행을 반영하여 보리밭에 시비하기 위한 造肥 방법이 상당수 개발되고 있었다. 수전에서는 이앙법의 확대 보급과 결부되어≪농사직설≫에서 한전용 비료였던 糞灰를 秧基의 시비원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사용하고 있었다.0812)閔成基,<朝鮮時代의 施肥技術>(앞의 책), 225∼246쪽. 또한 전면적인 糞田法의 발달에 따라 기경할 때의 基肥 이외에 작물이 생장하고 있는 중간에 시비하는 追肥가 도입되었다.0813)金容燮,<朝鮮後期의 麥作技術>(앞의 책, 1990), 190쪽. 게다가 농가에서 자급할 수 없는 소금을 시비 재료로 이용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었다.

 조선 전기의 품종은≪衿陽雜錄≫에서 稻種 27종(山稻 포함), 豆類 20종, 麥類 6종, 보리 4종, 조 15종, 기장(稷) 5종 등을 살펴볼 수 있다. 姜希孟은 芒·耳 등의 품종별의 특색을 면밀한 見聞의 결과로 설명하였다.0814)李鎬澈,<旱田作物과 그 品種>(≪朝鮮前期農業經濟史≫, 한길사, 1986), 82∼110쪽. 그 결과 경기 일부 지역에서도 한전 작물 각각에서 다양한 품종분화가 나타났고, 품종의 특성에 따른 適地가 면밀히 검토되었음을 알 수 있다.0815)金容燮,<≪衿陽雜錄≫과≪四時纂要抄≫의 農業論>(앞의 책, 1988), 86쪽.≪농사직설≫은 종자의 파종 시기를 기준으로 稻種의 경우 早稻·次早稻·晩稻 등으로 구분할 뿐이었다. 그런데≪농가월령≫에서는 도종을 보다 세분화시켜 조도·차도·만도 이외에 早秧種·次秧種으로 분류하고 있었고, 乾付種할 수 있는 密達租·有毛倭租·紅稻라는 품종을 소개하고 있었다. 뒷 시기이기는 하지만 19세기에≪林園經濟志≫에서 다수의 품종을 소개하고, 품종 개량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은 18세기에 들어서서 갑자기 나타난 변화가 아니라 이미 16세기 17세기를 거치면서 진행되고 있던 품종의 분화, 지역적인 품종의 특화가 반영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조선 전기의 농기구 체계에서도 河緯地의 遺券·≪農事直說≫·≪訓蒙字會≫器皿·≪訓民正音≫用字例 등을 통해서 볼 때 起耕·碎土·覆種·鋤治·收穫·搗精用 농기구 등이 용도에 따라 분화되어 있었다.0816)李鎬澈,<農具 및 水利施設>(앞의 책), 355쪽. 16세기 중반 이후 농기구의 종류가 증가하는 동시에 세분화되었다. 건앙법과 결합된 농기구로 시립번지·토막번지 등의 농기구가 등장하였고, 中耕 제초의 기본적인 도구인 호미도 지역적인 특성이 호미의 기능과 외형상의 형태에 분명하게 반영되었다. 조선 후기 수도작의 확대, 이앙법의 보급과 더불어 토양을 찍어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볏(鐴)이 달린 호미가 북쪽으로 전파되었다.0817)朱剛玄,≪두레연구≫(慶熙大 博士學位論文, 1995), 106쪽.

 쟁기의 경우 조선 전기에는 볏이 달리지 않은 보쟁기 즉 無鐴犁를 이용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 田畝 제도가 변화하여 高畝를 작성하게 되면서 쟁기의 구조가 변화하였다. 16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初期犁인 無鐴犁에서 後期犁인 有鐴犁로 발전하였다.0818)閔成基,<≪農家月令≫과 16世紀의 農法>(앞의 책), 216쪽. 이후 쟁기의 구조와 형태가 각 지역적인 특성을 감안하여 분화·발전하면서 峽犁와 野犁의 구별, 兩牛犁와 單牛犁의 분화 등이 진전되었다. 이와 같은 쟁기의 형태 분화는 주로 한전에서 사용하는 旱田犁에서 나타난 것이었고 水田에서는 胡犁라는 單牛犁를 사용하고 있었다.

 조선시기 대표적인 衣料 작물이었던 목면은 조선 전기에 아직 제한적인 보급 상태에 있었다.≪世宗實錄≫ 지리지에서 면작지역으로 확인되는 지역은 전국 335개 군현 가운데 42개 군현에 불과하였다.0819)李鎬澈,<作物栽培範圍>(앞의 책), 537쪽. 16세기 말경 삼남지역의 경우는 이미 널리 보급된 상황이었고,0820)金容燮,<≪農事直說≫과≪四時纂要≫의 木綿耕種法 增補>(앞의 책, 1988), 110쪽. 북방지역의 경우 국가의 면작 확대 정책과 맞물려 정착·확대되는 단계에 들어서 있었다.0821)閔成基,<≪四時纂要≫種木綿法과 朝鮮棉作法>(앞의 책), 300∼311쪽. 면작 재배의 확대는 기본적으로 일반 백성의 의료작물로서 정착되면서 수요가 확대됨에 따른 것이었다. 면포는 자급적인 농촌 수공업에 의한 자가 생산이 대부분이고, 면작 전업지대가 지역적으로 뚜렷하게 분포하였기 때문에 면포 유통망이 형성되었다.0822)李榮薰, 앞의 글, 225쪽.

 면작 재배의 확대에 따라 발달된 면작 기술이 16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農書에 등재되었다. 15세기 중후반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四時纂要抄≫에 목화 재배에 관련된 기술이 기록되었고, 중종대로 추정되는 昌平縣開刊本≪農事直說≫에서 호남지방의 木綿耕種法으로 파악되는 ‘新增種綿’ 조항이 증보되었다.0823)金容燮,<≪農事直說≫과≪四時纂要≫의 木綿耕種法 增補>(앞의 책, 1988), 103∼110쪽. 그리고 1590년 慶尙左兵營에서 改刊한≪四時纂要≫에는 영남지방의 木綿耕種法을 정리한 ‘種木綿法’이 첨가되었고, 목면 재배법이 이후 편찬되는 농서에 수록되고 있었다.0824)閔成基, 앞의 책, 264∼293쪽.

 16세기 영농 기술의 발달과 관련된 농업 여건의 변화는 수리시설의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수리시설의 축조·관리의 측면과 수리 도구의 보급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0825)李光麟,≪李朝水利史硏究≫(한국연구원, 1964). 먼저 수리시설의 경우 堤堰은 평지형의 제언(중국의 塘)보다는 山谷型의 제언(중국의 陂)이 대부분이었다. 조선 전기 정부의 집중적인 개발 노력에도 불구하고 15세기 중반 경상도 지역의 제언의 경우를 보면 제언 당 평균 관개 면적이 28.62결, 총 수전에 대한 관개율이 19.8%에 불과하였다. 이에 따라 아직 평야지대의 수전의 대부분이 천수답 상태에 놓여 있었다.0826)李泰鎭, 앞의 글(1994), 1,076쪽. 이런 상황에서 하천수를 관개수로 이용하는 川防을 보급하려는 노력이 경주되었다. 천방 개발은 대체로 재지의 중소지주층과 사림세력, 그리고 지방관을 중심으로 수행되었다. 15세기 관찬 지리지에 제언만 기재되어 있는 반면에 17세기초에 편찬된 지방지에서는 천방이 기재되기 시작하였다.0827)李泰鎭,<16세기 川防(洑)灌漑의 발달 -士林勢力 대두의 經濟的 背景->(≪韓國社會史硏究≫, 지식산업사, 1986).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상당수의 수리시설이 관리 불능 상태에서 기능을 상실하였고 정부는 제언의 설치와 복구를 위하여 전담 관리기구로서 堤堰司를 복설하고 전담 관리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郎官·宣傳官·御史 등을 파견하여 제언에 대한 감시와 조사 작업을 철저하게 수행하려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또한 제언에 水桶이라는 수문을 설치하는 것이 상례화되면서 제언의 결궤가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제언 안의 경지를 冒耕하는 것이 성행하면서 제언의 황폐화도 진행되었다. 제언 모경은 토지가 부족한 빈농보다도 지주층의 토지 집적·확대의 수단으로 성행하였다. 또한 이 시기 궁방이나 아문의 토지 절수가 堤堰까지 미치고 있었다.

 현종 3년(1664) 정월에 규정된<賑恤廳堤堰事目>은 대부분의 條目들이 하천 관개에 관한 것이었고, 특히 大川 개발이 제언보다 유리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0828)≪備邊司謄錄≫22책, 현종 3년 1월 26일, 賑恤廳堤堰事目(영인본 2권 729∼731쪽). 이 사목은 17세기 중엽 이후 여러 개의 천방을 통해 大川을 관개수로 이용하던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후 洑灌漑는 18세기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고, 특히 호남지역의 경우 하나의 大洑에 여러 개의 洑가 하나의 조합을 이루는 복합보라는 특색을 드러내기도 하였다.0829)崔元奎,<朝鮮後期 수리기구와 경영문제>(≪國史館論叢≫39, 國史編纂委員會, 1992), 223∼239쪽.

 한편 하천수를 관개수로 이용하는 수리 도구인 水車는 조선 전기에 도입이 추진되다가 실패로 돌아갔다. 수차가 중국의 강남지역에서는 이앙법의 보급과 관련된 중요한 수리 도구였지만 조선의 토질에 적합하지 않아 도입이 무산된 것이었다.0830)李泰鎭,<조선시대 水牛·水車 보급 시도의 농업사적 의의>(앞의 책, 1986), 340쪽. 17세기 중반 조선에서 상세한 수리 지식을 축적하면서 水利學의 체계가 세워지고, 龍尾車·玉衡·恒升과 같은 서양식 수차를 보급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전통적인 중국식 龍骨車와 일본식 倭水車의 보급 논의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지만 결국 실제 농사에 채용되지 못하고 논의의 차원에 그치고 말았다.0831)문중양,≪조선후기의 수리학≫(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5).

 조선 시기 영농기술은 農書를 통해서 정리되었다. 기본적으로 농서의 편찬은 老農이라고 불리는 농사일에 능숙한 농민들이 제공한 당대의 농업 기술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수집·정리하는 작업이었다. 처음에는 중국 농서를 간행하거나 초록하는 형태로 농서 편찬이 이루어졌다. 15세기 전반 태종대에 元代의 농서인≪農桑輯要≫를 抄錄하고 吏讀로 번역하여≪農書輯要≫를 편찬하였다.0832)吏讀의 用例로 볼 때 태종대로 비정된다(李承宰,<≪農書輯要≫의 吏讀>,≪震檀學報≫74, 1992), 194쪽).≪농서집요≫는 이후 중종 12년 경상감사 金安國이≪農書≫,≪蠶書≫등을 諺解작업할 때 安東府使 李堣에 의해 新刊되기도 하였다. 이 책은≪농상집요≫를 발췌하면서도 조선의 고유한 農法에 따라 명칭·기술내용 등을 의역하여 이두로 표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풍토에 적합한 고유의 농서가 절실하게 요구되었고 그 결과 세종 11년(1429)에≪農事直說≫이 편찬되었다.

 15세기 후반 姜希孟이 편찬한≪衿陽雜錄≫은 衿陽(과천) 지역의 특색있는 농법을 보여주는 농서로 私撰 농서인 동시에 지역성을 담고 있는 지방 농서의 선구적인 업적이었다. 강희맹은 또한 여러 농서에서 우리의 풍토와 실정에 맞는 것을 가려 엮은 독창적인 농서로≪四時纂要抄≫를 지었다. 중국 唐代의 韓鄂이 편찬한 월령식 농서인≪四時纂要≫를 초록한 정도에 그치지 않고 조선의 현실적인 농법을 수록한 것이었다.0833)閔成基, 앞의 책, 286∼87쪽.
金榮鎭,<‘四時纂要抄’와 ‘四時纂要’의 比較硏究>(≪農村經濟≫8권 1호, 1985), 89∼96쪽.

 15세기에≪農事直說≫의 편찬으로 일단 정리되었던 조선 농법이 16세기 중후반부터 특히 수전 농법을 중심으로 한 단계 도약하면서 17세기를 전후하여 다시 한번 농서로 정리되고 있었다. 16세기의 농법을 정리한 柳彭老의≪農家說≫, 高尙顔의≪農家月令≫, 尙州지역의≪渭濱明農記≫등은 지방적인 특색을 보여주는 지방 농서였다.≪농가설≫은 전라도 玉果 지역의 농법을,≪농가월령≫과≪위빈명농기≫는 경상도 尙州 지역의 농법을 반영하는 농서였고, 모두 현실적인 농법의 지역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6세기 이후 나타난 영농 기술의 발달을 농서로 정리하는 작업은 효종 6년(1655) 공주목사 申洬이≪農家集成≫을 편찬하면서 일단락이 지어졌다.0834)≪農事直說≫,≪衿陽雜錄≫,≪四時纂要抄≫, 朱子의<勸農文>및 世宗의<勸農敎書>을 합간한 것이었다.≪농사직설≫을 지역별로 改刊하면서 조금씩 증보·첨보하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때에도≪농사직설≫에 대한 증보가 이루어졌는데, 秧基 관리등 移秧法에 대한 증보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0835)金容燮,<≪農家集成≫의 編纂과 그 農業論>(앞의 책, 1988), 166∼67쪽. 조선 전기 이후의 농서는 당대의 가장 선진적인 농법을 정리한 것이었고, 점차 지역적인 농법의 특색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성격을 띠게 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