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6. 영농기술의 발달과 농촌경제의 변화
  • 2) 농촌경제의 변화

2) 농촌경제의 변화

 16세기 중반을 고비로 영농기술이 한 단계 발달하면서 농촌경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선 토지소유관계의 측면에서 변화가 발생하였다. 16세기 말 職田法이 폐기되면서 수조권이 소멸되고 소유권에 입각한 토지소유관계로 일원화되었다.0836)李景植,<職田制의 施行과 그 推移>(≪朝鮮前期土地制度硏究≫, 一潮閣, 1986), 265∼279쪽. 앞서 과전법에서 官人이 보유하였던 收租權은 사적 소유권을 일정하게 제약하는 현실적인 권한이었다. 직전법마저 폐지되면서 토지소유관계는 사적 토지소유에 입각하여 전개되었다. 사적 토지소유는 국가 법제에 의하여 보장되고 있었다. 토지의 취득(매매·개간), 경영, 처분(贈與·分與·典當), 상속 등이 사적으로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결국 토지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다른 사람에게 배타적이고 독점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 다만 사적 토지소유자가 경작과 이용이라는 전제 조건을 충족시켜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15세기말 경 절대적·배타적 지배가 허용되고 자유로운 처분이 가능했던 動産 등에 한정하여 사용하던 소유 개념인 ‘己物’이라는 용어가 토지에까지 확대되어 적용되었다.0837)朴秉濠,≪韓國法制史考≫(法文社, 1983).

 이제 사적 토지소유권을 제약하는 가장 현실적인 요인으로 신분관계가 남게 되었다.0838)李景植,<朝鮮前期 土地의 私的 所有問題>(≪東方學志≫85, 延世大, 1994). 현실적인 신분 관계속에서 관료들이 직권을 남용하여 토지를 집적하였고, 신분적 차이에 따라 경영 규모의 격차와 農形의 차이를 노정하고 있었다. 양반층은 등급이 좋은 논밭을 우세하게 소유하고 있었고, 특히 논밭이 각각 희소한 지역에서 희소한 논밭을 소유하고 있는 비율이 높았다.0839)金容燮,<量案의 硏究>(≪朝鮮後期農業史硏究≫(Ⅰ), 一潮閣, 1970), 123∼134쪽. 한편 토지 소유면적의 측면에서도 양반층이 소유하고 있는 농지가 평민층이나 천민층이 소유하고 있는 농지보다 평균적으로 우세하게 나타났다.

 토지소유관계가 사적 토지소유로서 정립되면서 농업경영의 형태도 변화하였다. 조선 전기의 경우 대체적으로 농장제 농업경영이 우세한 상황에서도 자영농민의 농업경영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과전법이 존속하기 위한 바탕이 바로 自營農이었다.0840)金泰永, 앞의 책. 당시 조선 정부는 자영농을 보편적인 국역대상자로 확보하기 위하여 이미 전개되고 있던 竝作制를 제한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농민경영의 내부에서 토지를 상실하고 병작 전호농으로 전락하거나 생산수단의 확보를 통한 중농·부농으로 상승하는 계층 분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16세기 이후 소농민경영의 분화는 더욱 촉진되면서, 대토지소유의 확대와 지주경영의 전개가 본격화하였다. 관인층을 전형으로 하는 勢家가 점차 토지를 축적하게 되자 자영농은 그에 예속되는 佃戶로 전락하였고, 신분상으로도 노비로 떨어지는 것이 하나의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지주들의 농업경영은 16세기까지 노비 노동을 이용하는 직영지 경영, 흔히 농장제라고 일컬어지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16세기 후반 지주들은 대토지 농업경영을 농장적인 요소를 띤 노비제적인 경영에서 병작제로 전환하게 되었다.0841)李景植,<16세기 地主層의 動向>(≪歷史敎育≫19, 1976), 139∼183쪽. 이때 양반지주는 自作地에서는 노비의 사역을 통해 구현하는 자작제 경영 형태를 주로 채택하면서도, 일정한 토지를 ‘作介’라 하여 노비의 책임 경작지로 할당하고 노비의 생계를 위해 별도의 ‘私耕’을 지급하는 作介私耕 경영 형태를 채용하였다. 作介制는 양반지주의 직영지 경영이 自作制에서 竝作制로 이행하는 도중의 과도적인 성격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0842)金建泰,≪16∼18世紀 兩班地主層의 農業經營과 農民層의 動向≫(成均館大 博士學位論文, 1997). 한편 16세기 지주층의 토지 집중은 유통기구의 성장·발달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었고, 방납 구조나 사행무역 등에 참여하고 국가의 조세 수취과정에 편승하면서 토지를 집적하였다.

 17세기로 들어서면 지주의 직영지 경작의 규모는 대폭 축소되고 병작제를 중심으로 지주제가 전개되었다. 병작제의 확대는 소농민의 토지 상실의 진전 속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더욱이 상품화폐경제 발달에 따라 사회적 재부의 재분배 과정에서 신분제의 변동과 함께 농업경영·토지소유 등의 측면에서 광범위한 농촌사회의 분화·분해가 나타났다. 농민층 분해의 진전으로 임노동적인 기반 아래 시장성을 고려한 상업적 농업을 영위하는 농민들이 등장하였고,0843)金容燮,<朝鮮後期의 經營型富農과 商業的農業>(앞의 책, 1990), 267쪽. 신분제의 변동의 영향으로 일반 양인, 노비층 가운데 부농, 지주가 성장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전반적으로 토호층의 토지집적과 그에 따르는 無勢 농민의 영세화, 부세의 가중으로 인한 소농층의 궁핍화, 농민층의 分戶別産의 전개 등에서 기인한 농지소유의 영세화 추세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영세농민은 전호로서 병작하거나, 雇工 등 임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거나, 상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였고 조선시기 말기에 이를수록 더욱 증가하였다.

 조선 후기 농촌사회의 분해과정에서 광범위한 농업 임노동층이 형성되었다. 無田無佃의 농민층은 임노동으로 생계를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반면에 경영확대를 이룩한 廣農層은 부족한 노동력을 임노동층에서 충당하게 되었다. 17세기 중반 충청도 公州의 李惟泰 가문은 노비 노동에 기본적으로 의존하면서도 ‘품앗이’, 고용노동에 대한 의존도가 높게 나타나고 있었다.0844)金容燮,<朝鮮後期 兩班層의 農業生産>(위의 책), 247∼255쪽. 양반층의 농업생산은 18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단기 雇工 등을 고용하여 농업경영을 수행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특히 미리 일정한 작업량(대개의 경우 移秧과 除草)을 예약하는 방식으로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가 이루어지는 雇只勞動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형태의 고용노동력 동원은 지주층이나 부농층의 농업경영에서 이앙·제초·수확 등에 집중적인 노동력 투하가 요청되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常民들은 17세기 이앙법의 전면적인 보급에 따라 모내기와 김매기에 필요한 노동력을 두레라는 공동 노동조직의 결성으로 해결하였다.0845)李泰鎭,<17·8세기 香徒組織의 分化와 두레발생>(≪震檀學報≫67, 1988). 두레의 확산과 더불어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水稻 乾播재배 지역인 西北지역 일대에서 香徒 조직이 풍물 등을 갖추고 강력한 조직체로 성장하였다.0846)朱剛玄, 앞의 책, 28∼100쪽.

 16세기 이후 농촌경제의 가장 커다란 변화는 상품 유통경제의 진전이었다. 15세기 말 전라도 지역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場市는 농민·수공업자를 중심으로 상품을 교역하는 시장의 기능을 수행하였다.0847)李景植,<16世紀 場市의 成立과 그 基盤>(≪韓國史硏究≫57, 1987). 농민들이 잉여생산물을 확보할 수 있게 됨으로써 상품 화폐를 교역하는 매개체로서 장시가 개설된 것이었다.0848)李泰鎭,<16세기 東아시아의 歷史的 狀況과 文化>(≪韓國社會史硏究≫, 지식산업사, 1986), 305∼311쪽. 매월 몇 차례 모여서 교역하는 장시는 16세기 초반에 이르면 모든 道에 개설될 정도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16세기 중반 무렵 농촌사회에서 장시를 통하여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私商層들이 성장하기도 하였다.0849)白承哲,≪朝鮮後期 商業論과 商業政策≫(延世大 博士學位論文, 1996).

 장시는 임진왜란을 경과하면서 市廛을 중심으로 물화 유통의 수행되었던 京城 인근의 경기 지방에서도 빈번히 개설되었고, 17세기 이후 邑治의 범위를 벗어나 山谷間까지 확대되었다. 장시의 확산은 기본적으로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기인한 것이었지만, 농촌의 경제활동이 활성화되면서 촉발된 것이었다. 한편 인접한 장시들은 상호간에 흡수·통합·이설 등의 변화를 겪으면서 장시의 연계망이 형성될 기반이 마련되었다.0850)韓相權,<18세기말∼19세기초의 場市發達에 대한 基礎硏究>(≪韓國史論≫7, 서울大, 1981), 183∼186쪽. 장시를 배경으로 糊口延命하는 자들이 증가하여, 술을 판매하거나 炭幕을 개설하거나 행상으로 전업하여 생업의 변화를 모색하는 민인들이 증가하고 있었다. 한편 船商을 중심으로 하는 貿穀商人들은 곡창지대 주변에 발생한 장시에 모여들어 곡물을 매집하거나, 농가를 직접 편력하면서 不緊之物을 가지고 농민들을 유혹하여 농민이 식량까지도 매집하였다.0851)崔完基,<朝鮮中期의 貿穀船商-穀物의 買集活動을 중심으로>(≪韓國學報≫30, 一志社, 1983), 134∼141쪽.

 한편 상품화폐 유통관계에서 일반적 등가물로서 물품화폐의 기능을 담당한 것은 米와 綿布였다. 특히 면포는 사용 가치와 교환 가치가 일치하는 물품화폐로서 농민층의 유통경제 참여를 가속화시켰다. 면포는 상품유통을 매개하는 수단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가치 척도의 기준이라는 기능도 수행하였다. 특히 거칠고 성기게 짜여진 麤布는 옷감의 용도보다는 소액 화폐의 기능을 수행하는 등가물로 제작된 것이었다.0852)宋在璇,<16세기 綿布의 貨幣機能>(≪邊太燮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85).
宋贊植,≪李朝의 貨幣≫(韓國日報社, 1975).
면포는 전답 매매에서 토지의 가격을 매기는 단위로 사용되었고, 17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비로소 錢文으로 토지의 가격이 매겨졌다.0853)李在洙,<16세기 田畓買賣의 실태>(≪歷史敎育論集≫9, 1986), 90∼93쪽. 아울러 미곡도 물품화폐로 이용되고 있었다. 미곡은 곡물의 상품화가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촉진되면서 화폐의 기능을 수행하였다.0854)高錫珪,<16·17세기 貢納制 改革의 방향>(≪韓國史論≫12, 서울大, 1985), 204∼207쪽. 물품화폐는 그 자체의 가치가 계절과 풍흉에 따라 유동적이었기 때문에 보다 안정적인 가치 표방을 할 수 있는 금속화폐가 요구되었다. 인조대 鑄錢論이 제기되고 결국 숙종 4년(1678)에 銅錢으로 常平通寶가 주조되어 유통되면서 금속화폐의 유통이 본격화되었다.0855)宋贊植, 앞의 책, 16∼65쪽.

 장시에서의 유통이나 곡물 상인과의 교역을 통한 미곡의 상품화가 진전되면서 농업경영의 목표를 시장 생산에 설정하는 경우가 나타났다. 사회적 분업이 진전되면서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을 가져오고 곡물을 비롯한 농산물의 상품화가 초래된 것이었다.0856)李世永,<18·9세기 穀物市場의 형성과 流通構造의 변동>(≪韓國史論≫9, 서울大, 1985), 187쪽. 소농층이나 빈농층이라고 하더라도 국가에 내야 할 조세 등을 자가생산하지 못할 경우 농촌시장에서의 농산물 교역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의 농산물의 상품화를 본질적으로 특징짓는 것은 바로 시장 유통을 목표로 하는 상업적 농업경영이었다.

 상업적 농업은 주로 穀類·織類·蔬菜·藥材·南草 등을 대상으로 영위되었다. 특히 미곡이 주된 상품생산의 대상이었다. 이는 당시 ‘飯稻之風’이 성행하면서 다른 잡곡에 비해 高價로 거래될 수 있었던 미곡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역적·계절적인 가격차이를 감안하여 보다 나은 시세를 따라 다른 面邑의 장시로 진출하여 팔기도 하고, 서울 근교에서는 서울까지 올라와서 매매하기도 하였다. 한편 면포가 의생활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서 상품유통체계에 편입되어 상품화되었고, 시장 생산하는 상품 작물로 면화를 재배하는 전업적인 綿農이 등장하고 있었다. 면포이외에 絹織物·麻布·苧布 등도 농가의 부업이나 전업적인 직물 생산업자에 의해 생산되어 장시에서 유통되었다. 직물이 상품화되어 농촌시장에서 유통되면서 농촌경제의 전반적인 유통 구조가 크게 발달하였다. 이밖에 채소 재배나 약재 생산과 같은 상업적 농업이 수행되었다. 특히 채소는 도시 인근지역에서 상품 작물로 재배되었고, 18세기 이후에는 서울 교외에서 상업적 농업으로 크게 번성하였다. 약재로서는 地黃·紅花 등이 교역 과정에서 커다란 이득을 주자 상품작물로 재배되었다. 특히 인삼은 천연 산삼의 채취에 그치던 것이 18세기 초반에 家蔘 재배가 보급되면서 이에 따른 상품작물로서의 비중도 크게 증대되었다. 인삼은 對中國 무역에서 주요한 결제수단이었기 때문에 당시 공무역과 사무역에서의 수요가 격증하였고,0857)李泰鎭,<16세기 東아시아 경제변동과 정치·사회적 동향>(≪朝鮮儒敎社會史論≫, 지식산업사, 1989), 96∼103쪽. 이에 대한 반응으로 재배 기술도 발달하고 경작 면적도 증대하였다. 한편 南草도 기호식품으로서 농민들에게 광범한 이득을 준 상품작물로 자리를 잡아 나갔다. 임진왜란 무렵 조선에 전래된 남초는 곧바로 널리 기호품으로 애용되었고,0858)李永鶴,<18세기 煙草의 生産과 流通>(≪韓國史論≫13, 서울大, 1985), 186∼191쪽.≪農家月令≫에서도 남초를 재배하는 기술을 설명하고 있었다.

 농촌경제의 활성화는 사회적 분업의 진전에 따른 수공업 생산의 측면에서도 볼 수 있다. 조선 전기의 관영수공업 체제가 16세기 이래 민간수공업 중심으로 변화하였다. 匠人들은 공물을 생산하여 납부하면서 민을 대상으로 하는 상품생산의 성격을 부여하였다. 게다가 국가에서 필요한 물품을 시장 유통을 통해 조달하는 방식이 등장하면서 수공업 장인들은 일정한 納貢을 완료하면 자신의 생산 활동의 결과물을 유통 기구를 통해 상품화할 수 있었다. 한편 이러한 민간수공업의 활성화와 함께 농민들의 가내수공업도 발전하였다. 농민들은 가내수공업을 통해 마포·면포·모시·명주 등을 직조하거나, 종이를 제조하거나, 돗자리·방석 등을 제작하였다. 농촌을 중심으로 하는 수공업은 상업과 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지역적인 분업관계를 형성하였다. 점차 농민들이 수공업의 특정한 부문에 종사하게 되었다.

 17세기 이후 대동법의 실시는 유통경제의 발달에 대응하는 부세제도의 재편성이었다는 점에서 농촌경제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防納人과 마찬가지로 貢人들은 농촌 시장인 장시에서 상품 유통을 촉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공인들은 중앙정부에 상납하기 위한 공물을 京市와 지방 장시를 통해 조달하고 있었다.0859)金大吉,<朝鮮後期 場市의 社會的 機能>(≪國史館論叢≫32, 國史編纂委員會, 1992), 181∼200쪽. 또한 徭役이 無償의 강제 노동이라는 성격에서 17세기 이후 物納稅로 전면 개편되면서 정부는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방식으로 募立制를 채용하였다. 모립제는 관청에서 각종 역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雇立하는 방식이었고, 민의 입장에서는 부역 노동이 아니라 고용 노동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요역제의 변동과 모립제의 성립·발전은 이러한 募軍에 응모할 수 있는 일용노동자층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17세기 초엽 이래 모군의 雇價는 米布의 현물로 지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0860)尹用出,≪17·18세기 요역제의 변동과 고립제≫(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1), 249∼250쪽.

<廉定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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