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7. 지주제의 발달과 궁방전·둔전의 확대
  • 1) 지주제의 새로운 전개

1) 지주제의 새로운 전개

 조선 사회는 16세기에 들면서 과전법 체계가 무너지고 收租權 分給制가 소멸된 뒤 직접 토지를 확보하여 경제 기반을 보장받으려는 추세와 더불어 地主地가 늘어났다.0861)李景植,<16世紀 地主層의 動向>(≪歷史敎育≫ 19, 1976). 이와 더불어 지주제는 새로운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다.

 조선 후기 지주제의 변화에는 먼저 사적 토지소유구조가 변화하였다. 양반 관료와 토호를 중심으로 한 대부분의 지주들은 토지 買得과 新田 개발을 통해 토지를 넓혀 나갔다.

 매득은 토지의 매매, 저당 등 경제적 행위가 늘어나면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조세를 부담하는 농민층은 그 부담을 이기지 못하게 될 때 마지막으로 토지를 저당하거나 매매를 하는 현상이 늘어났다. 반면 이러한 토지는 私債를 대여하거나 재산을 가진 지주층이 확보하였다. 더구나 당시 지주층은 유통경제에 참여하여 지대를 시장에 투하하여 회전시킴으로써 부를 재생산하였는데 이것이 다시 토지에 투자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지주제가 한층 촉진되었다. 지방 양반이나 토호층 등 토착세력은 일반 농민의 토지를 고리대라든가 지대를 매개로 하여 착실히 사들였다. 이러한 현상은 유통경제가 서서히 발전함에 따라 두드러졌다.

 특히 토지를 둘러싸고 경제적 관계가 형성되면서 토지의 상품화가 활발하였다. 토지의 상품화란 토지가 화폐를 교환수단으로 하여 상품처럼 매매될 수 있게 된 것을 말하는 것으로 토지가 상품처럼 자유롭게 매매되려면 토지가 사유였던 점을 넘어서서 매매쌍방이 상품을 팔고 사듯이 서로 평등한 위치에 놓여야 한다.0862)허종호,≪조선토지제도발달사≫2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2), 131쪽.

 조선 후기 양반과 토호들은 토지소유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게 되고 또한 농업생산력의 발달에 따라 토지이윤이 늘어나자 그것을 확보하려고 토지소유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게다가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부를 확보한 상인과 부농층인 평민도 그 부를 토지에 투자하였다.

 상품화폐경제를 이용하면서 토지 매득을 통해 토지를 겸병해가고 있었다. 또한 대동법·균역법 등의 부세제도의 변화 및 상공업의 발달에 따른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은 토지 수확물의 매매를 통해 이윤을 확대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넓혀주었기 때문에 지주들은 토지소유를 통해 이윤을 확대시키는 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반면 상품화폐경제가 농촌으로 침투하면서 농민층의 분화를 불러일으키고 많은 농민들은 몰락하여 그들의 토지를 팔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朴趾源이 쓴<限民名田議>에서 보듯이 부호들이 가난한 농민들의 논밭을 강제로 사들이는 것이 아니라 앉아 있기만 해도 땅을 팔려는 사람들이 스스로 토지문서를 들고 찾아온다는 현상이 넓게 일어났던 것이다.0863)朴趾源,≪課農少抄≫ 限民名田議.

 이처럼 토지가 강제적이 아니라 자유매매가 기본형태로 되었을 뿐 아니라 토지를 구매하는 목적이 이전에는 농민 또는 노비의 인신적 투탁에 의한 노동력의 획득이었다면 이제 토지 그 자체가 치부의 기본수단이 되었으므로 토지가 상품으로 거래되게 되었다.

 토지의 상품화는 가장 큰 희생자는 빈농민이었다. 이들은 급히 돈을 쓸 일이 생기거나 빚을 갚기 위하여 토지를 팔았다. 토지가 치부수단으로 된 조선에서 부유한 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희생으로 하여 부를 축적해갔다.

 그러나 한편으로 토지 상품화가 되면서 관료지주가 줄어들고 서민지주가 성장하였다. 16세기에 직전제가 해체되어 토지 분급제가 소멸되면서 양반층 내에서도 몰락한 경우에는 토지소유에서 배제되었다. 반대로 서민층으로서도 지주층으로 상승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는 부농층의 대부분이 양반, 토호들이었으나 평민, 천민층 중에서도 양반농가를 능가하는 부농이 있었다.0864)金容燮,<量案의 硏究-朝鮮後期의 農家經濟->(≪史學硏究≫ 7·8, 1960, 증보판
≪朝鮮後期農業史硏究(1)≫에 재수록).
그 결과 조선시기 기본적인 토지소유구조인 양반지주와 평민 작인의 관계가 무너져 갔다. 심지어 평민이나 노비의 땅을 경작하는 양반도 나타났다.

 다음으로는 개간이 늘어났다. 당시 개간은 공유지인 山林, 川澤이라든가 海澤地를 대상으로 하여 신전을 개간하기도 하였다.0865)宋讚燮,<17, 8세기 新田 開墾의 擴大와 經營形態>(≪韓國史論≫12, 서울大, 1985). 산림 천택은 본래 ‘與民共之’라 하여 민간에서 공동으로 이용하였으므로 법적으로 특정한 개인이 사사로이 점거하는 행위가 금지되었다.0866)≪經國大典≫ 刑典 禁制. 그러나 차츰 이를 왕실이나 세가양반들의 새로운 재정기반으로 이용하였다. 그리고 해택지나 山麓 등이 새로운 개간지로 이용되었다. 신전을 개발하는 데는 상당한 돈과 노동력이 필요하였으므로 지주층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토지를 둘러싼 소유와 경영형태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16세기에는 이른바 農莊이라고 불리는 지주지는 여러 가지 형태로 경영되었다.0867)金建泰,≪16∼18세기 兩班地主層의 農業經營과 農民層의 動向≫(成均館大 博士學位論文, 1997). 먼저 지주 자신 또는 그 대리인이 노비 등 예속인을 동원하여 농장을 직영하는 형태가 있었다. 이는 지주에게 편리하게 주로 지주가 근처를 경영하였으므로 家作經營이라고 하였다. 또한 노비에게 일정한 토지를 분급하고 책임을 지워 경작시키는 방법도 있었다. 이렇게 분급된 토지를 作介地라고 하는데 이는 노비의 身貢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여기서 거둬들인 수확량의 거의 전부가 지주에게 수취되었다. 그러나 노비의 家戶勞動力을 이용한 소경영의 형태라는 점에서 직영과는 차이가 있다.

 이들 노비는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경영을 맡은 대가로 주인으로부터 私耕地를 대여받기도 하였다. 여기서 거둬들인 수확물은 노비들의 몫이었다. 특히 사경지는 작개지와 짝이 되어 이 시기 농장을 경영하는 중요한 방법이 되었다.

 한편 지주와 경작인 사이에 한 토지의 수확물을 반분하는 竝作制도 시행되었다. 병작제는 지주와 작인 사이에 신분적 예속관계가 설정되어 있지 않을 때 시행되었다. 병작은 15세기에는 노비와 같은 예속노동력이 부족하거나 지주가 경작할 능력이 없을 때 시행되었으므로 비중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작개제에서는 노비가 갖는 몫은 주인보다 훨씬 불리하였으므로 16세기에 들어 작개경작에 동원되던 노비들이 작개경작에 대해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작개제 내부의 이런 요인들과 함께 한편으로는 양인농민들이 몰락하면서 병작제가 확대되는 추세였다.

 특히 앞에서 보았듯이 사적 소유가 발전하면서 경제외적 강제의 도움 없이도 지대는 원활히 수취될 수 있었으므로 병작제가 활발하였다. 매득지와 같이 소유권이 명확한 곳에서는 거의 병작제를 적용하였다. 이것이 17세기를 거치면서 급속히 진행되었다.

 병작제는 지주와 작인 사이에 맺어진 계약에 따라 운영되었다. 따라서 경작에 대한 거부의 의사도 지주의 허락을 받아 농장의 작개제와 달리 작인이 결정할 수 있었다. 현실적으로는 병작지를 둘러싸고 경쟁이 벌어지는 상황이었으므로 작인이 병작을 포기하는 경우가 적더라도 의사에 따라 경작을 그만 둘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변화였다.

 병작제가 시행되면서 영농관행도 상당히 변화하였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후반에 이르는 동안 사례를 통해보면 작인의 선정, 교체를 둘러싼 관행은 이전 시기에 비해 그다지 바뀌지 않았으나 종자와 관련된 관행은 크게 변하였다. 17세기 후반까지도 적지 않은 밭의 작인들은 그 종자를 부담하는 대신 수확물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나 그러한 밭에도 병작이 도입됨으로써 지주가 종자를 부담하는 것이 관행으로 되어갔다.

 논에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種子를 부담하는 주체가 지주에서 작인으로 바뀌었다. 이는 지주가 종자를 부담하는 초기단계를 지나 작인이 종자를 부담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음을 뜻한다. 종자부담에서 논밭의 차이가 있으나 모두 병작제가 발전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한편 18세기 후반에는 병작 전답의 작인들은 종자와 더불어 수확량의 1할 정도에 해당하는 결세도 부담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주제가 더욱 강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논의 작인들은 종자와 결세를 부담하는 대신 볏짚의 전량을 가졌다.

 병작제가 확산되면서 새로운 농업경영형태인 賭地制가 나타났다.0868)허종호,≪조선봉건말기의 소작제연구≫(사회과학원출판사, 1965). 도지제는 병작제와 마찬가지로 지주와 작인 사이에 계약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병작이 定率地代인 반면 도지제는 定額地代로 수취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도지제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어서 이 시기에 활용되었다. 특히 관리가 어려운 먼 곳의 전답에 도지를 적용하면 더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도지제의 성격을 살펴보면 대체로 畓의 도지액은 병작반수액 수준이며, 田의 도지액은 병작반수액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며, 수취율은 매우 저조하였다.

 도지제하에서 작인들은 도지액과 함께 전세를 부담하는 관행이 일찍 형성되었으며, 나아가 대부분의 작인들은 종자를 부담하였다. 이러한 관행에 맞서 작인들은 抗租鬪爭을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병작제, 도지제가 전개됨에 따라 토지를 둘러싼 경제외적 관계가 해체되어 나갔다. 조선 전기 농장의 處干이나 竝作 佃戶는 인신적 지배하에서 地代라는 경제적 부담 이외에 인신적 부담 및 노역을 부분적으로 담당하거나 병작반수 이상의 부담을 져야 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신분제가 허물어지면서 인신적 지배를 강요할 수 없었다. 실제로 병작제와 도지제 하에서는 신분구성이 노비, 상민뿐 아니라 양반까지 포함될 정도로 다양하였다.

 병작제와 도지제의 시행은 이 같은 신분제의 변동과도 결합하면서 조선 후기 지주제의 발전을 끌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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