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1. 대동법의 시행
  • 1) 공납제의 변통과 대동법의 실시
  • (4) 상정법의 병행

(4) 상정법의 병행

 전라도에 뒤이어 대동법의 시행이 논의된 곳은 함경도였다. 대동법이 시행되지 않고 있었던 4개 도 가운데, 평안도에는 이미 인조 24년(1646)에 西糧(毛糧)의 폐지와 동시에 제정된 이른바 收米法이 民庫의 설치·운영과 함께 시행되고 있었고,0948)金玉根은 평안도의 수미법을 대동법 및 상정법과 동일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평안도에도 대동법이 실시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金玉根, 앞의 책, 1988, 23∼24쪽). 그러나 이에는 보다 구체적인 연구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황해도에는 공물의 수미상납제와 進上의 私大同이 역시 인조 24년(1646) 이래로 널리 유행되고 있어서0949)황해·평안도의 공물은 광해군 3년에 毛糧(鐵山 椵島에 駐屯한 明將 毛文龍軍의 兵糧, 일명 西糧·唐糧) 공급을 위한 조치로 충청·전라도에 이전되고, 그 대신 황해·평안도에서는 모든 전토에서 1결당 쌀 7말씩(모량 元額 1말 5되+兩湖毛糧條)을 課收하여 모량으로 하였는데, 인조 24년에 毛營이 철폐되면서 모량도 폐지되어 兩湖에 이전되었던 공물이 다시 兩西에 부과되게 되었다. 이때 양서의 공물수납을 收米상납제로 하면서 황해도에서는 결당 5말씩을, 평안도에서는 直路 13邑은 결당 5말씩, 기타 29邑은 6말씩을 각각 부과하여 황해도는 그 모두를, 평안도는 그 중 3말씩을 貢物價條로 호조에 직접 납부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평안도의 貢物價米는 숙종 34년에 황해도가 평안도에 이송하고 있었던 管餉穀(關西軍糧)으로 대치되어 황해도가 대신 호조에 납부하게 되었는데, 이를 別收米(결당 3말)라 하였다. 대동법의 시행이 절박하게 요망되지 않았지만, 함경·경상의 양도에는 이 동안에도 아무런 광구책이 마련되지 못하여 민원이 드높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상도의 경우는 대동법의 시행에 앞서 수행해야 했던 양전의 곤란으로 인하여 그 실시 논의가 뒷날로 미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함경도에는 그 도의 양전이 끝난 현종 7년(1666)에 감사 閔鼎重의 건의에 따라 대동법이 시행되었다. 하지만 변방인데다가 전토가 척박하여 군현들간에 사정이 매우 달랐으므로 이미 행한 대동법과는 달리 군현과 田種에 따라 그 수세량과 물종을 각기 다르게 정하는 이른바 詳定法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대동법이 목적하는 바를 구현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 각 지방의 실정에 알맞도록 그 규정을 제정하고자 한 것이었으니,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았다.0950)함경도의 경우 상정사목이나 사례가 전하는 것이 없어≪續大典≫·≪度支志≫·≪增補文獻備考≫등의 기록에 의거한다.

○正田과 續田에서 각 군현의 공납물가에 알맞게 베(麻布), 또는 쌀로 균등하게 부과·징수(베는 1∼2필, 쌀은 2∼3말)하여 이를 수령이 서울의 해당 관서에 직접 납부한다. 輸納에 소요되는 쇄마가와 공용 잡비도 이에 포함시킨다.

○ 각 營·官需는 그 소요량을 정전에서 균등하게 징수하여 사용한다.

 함경도의 상정법은 상정세의 부과·징수와 이의 지출에 대한 상세한 규정이 제정되지 않았던 데서 뒷날 속전의 증가와 징수량의 과다 및 불균과 같은 폐해를 유발시킬 소지를 지니고는 있었지만, 각 군현의 실정을 최대로 적응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 체제는 함경도와 상황이 비슷했던 강원도·황해도에도 확대되어 갔다.

 대동법이 이미 실시되고 있었던 강원도의 경우는 숙종 36년(1710)에 양전을 행함에 따라 26개 군현을 셋으로 구분하여 그 부과·징수를 상세히 정하게 되었고, 뒤이어 영조 30년(1754)에 영의정 金在魯의 건의에 따라 완전히 상정법으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공물의 수미상납제와 사대동이 겸하여 행해지고 있었던 황해도의 경우는 숙종 20년에 우의정 朴世采의 건의로 대동법의 시행이 논의되기 시작한 이래, 상정과 대동의 체제를 놓고 논란을 벌리다가 숙종 34년 가을에 상정법으로 낙착·시행되었다. 실시 직후부터 군현에 따른 징수량의 심한 차이(1결당 최고 50말에서 최하 15말)로 인하여 다시금 논란이 일어나 끝내 영조 23년에 1결당 쌀 15말(別收米 3말 포함)로 동일하게 부과하는 대동의 체제로 바뀌기는 하였지만, 약간의 상정세를 별도로 부과함으로써 상정법을 병행시켜 갔고, 또 그 징수와 지출에 있어서도 상정의 체제를 그대로 지속시켜 갔던 것이다.

 한편 경상도에는 양전을 행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함경도에 뒤이어 숙종 3년 가을에 도승지 李元禎의 건의에 따라 그 이듬해부터 대동법을 시행하게 되었다. 兩湖에 대동법이 실시된 이후, 가장 役이 가벼웠던 영남의 民役이 다른 도에 비하여 배나 무겁게 되어 도민의 원성이 드높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전을 수행하지 못한 점을 감안하여 경상도의 부과량은 1결당 쌀 13말(以米7斗 作木1疋)로 책정되었다.

 이리하여 광해군 즉위년(1608)에 경기도에 실시된 대동법은 꼭 1세기 동안에 걸쳐 전국에 확대 시행되었다. 제주도는 藩屬視되었기 때문에 제외되어 이곳 외의 전 지역에서 공납제가 폐지되고 그것이 전세의 일종으로 대치된 것이다. 그리고 이 뿐만 아니라, 각종의 徭役을 비롯한 廩俸, 主人役價 등이 민호의 부담에서 떠나 대동세에 수용되었다. 김육이 논의한 대로 전세 이외―실제로는 지방에 따라 三手米가 또한 있었다―에는 모든 公課가 이에 포함되어서 한번 대동세를 납부하고 나면 終年토록 편안히 지낼 수 있고, 또 농사에만 오로지 할 수 있는 제도적인 조치가 제정·시행된 것이다.0951)대동법의 제정·실시를 “궁극적으로 봉건정부가 재정적 위기를 타개하려고 추진한 것이었기에 민생안정과는 거리가 먼 조치였다”(≪한국사 9≫, 한길사, 1994, 144∼145쪽)고 이해하거나, “당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은폐한 미봉적 조치였다. 어찌보면 토지관계에서 비롯되는 봉건체제의 기본적 모순을 은폐하고자 한 편법의 하나였다”(같은 책, 118쪽)고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리고 崔完基는 앞의 글에서 과세기준이 민호에서 전결로 바뀐 것도 궁극적으로는 토지에 기초하는 봉건사회의 특질을 보다 공고히 한 조처라고 하면서 대동법을 “봉건적 특성이 보다 강요된 수취제도”라고 규정하고 있다. 대동법의 실시가 뒷날 정치의 실종으로 인하여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는 했지만, 제정 당시 토지소유가 거의 양반층에 집중되어 있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현실적으로 전호(농민)의 부담을 지주(양반)의 부담으로 이전시킨 조처, 즉 실질적으로는 조선사회의 특권지배층인 양반에게 貢·役의 대부분을 이전(부담)시킨 조처라는 점에서 재고할 여지가 있는 이해·기술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이 제도는 고종 31년(1894)의 갑오경장에서 地稅로 통합되기까지 200여 년 동안 조선왕조 재정의 基幹으로 존속하여 갔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