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2. 상업·수공업·광업의 변모
  • 2) 시전의 변화
  • (1) 시전의 분화와 분쟁

(1) 시전의 분화와 분쟁

 서울을 비롯한 지방의 몇몇 대도시 지역에 존재하고 있던 市廛은 조선왕조 건국과 함께 창설된 이후 눈에 띨 만한 큰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시전은 일정한 商稅를 납부하면서 官需品의 조달과 도시민의 생필품 공급 등의 기능을 수행해 오고 있었다. 정부로부터의 일정한 특혜를 받으면서, 또한 특별한 도전 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고식적인 상행위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17세기 이전까지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17세기 이전까지의 상업계는 시전상인들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서울의 시전은 雲從街0964)운종가는 오랫동안 生鮮廛으로 불리어오다가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조선초의 옛 이름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東國輿志備考≫권 2, 市街). 즉 鍾樓 양쪽의 長廊에 위치하면서0965)樹軒居士,≪漢京識略≫2 , 市廛. 상업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시전상인이라 할 수 있는 六矣廛 역시 이곳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17세기 이후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양란 이후 농촌을 떠나 도시지역, 특히 서울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들은 도시의 임노동자가 되기도 하였으며 생계유지를 위해 상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서울의 인구 증가는 상품의 소비와 수요를 크게 촉진시키게 되었고, 아울러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을 자극하였다. ‘生民之業 京師以錢 八道以穀’0966)南公轍,≪金陵集≫권 10, 擬上宰相書.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서울의 상품화폐의 유통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기존의 시전상업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서울의 지역적 공간이 확대되고 상품유통량이 증가하면서 하나의 시전으로 서울 시민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에는 동일한 상품을 취급하는 새로운 시전이 창설되게 되었던 것이다.0967)高東煥,<18세기 서울에서의 魚物流通構造>(≪韓國史論≫28, 서울大, 1992), 155쪽. 米廛이 上米廛·下米廛·門外米廛·麻浦米廛·西江米廛 등으로 구성되게 되었으며, 염전의 경우도 京鹽廛·마포염전·용산염전의 3개 廛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어물전도 外魚物廛이 새로 창설되어 內魚物廛과 함께 둘로 분화되었다. 床廛은 서울 내에 12곳이 있을 정도였다. 기존의 시전 체계의 근간을 이루어왔던 ‘一物一市’의 원칙은 이미 지켜지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이처럼 하나의 물종을 취급하는 시전이 여러 곳에 신설되어 나뉘어지게 되는 것은 대체로 17세기 후반으로 보여진다.0968)高東煥, 위의 글, 155∼156쪽.

 동일 물종을 취급하는 시전이 여러 곳에 신설되자 유통지배권을 둘러 싼 시전간의 분쟁이 발생하였다. 물론 ‘一物兩市’라 하여도 대부분 각각의 시전이 독자적으로 운영된 것이 아니라 신설된 시전이 기존의 시전에 종속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기존 시전의 주도하에 운영되면서 중앙 都會에서 이익을 배분하는 것이 보통이었던 것이다.0969)高東煥, 위의 글, 161쪽.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현종 12년(1671) 새로이 창설된 외어물전이 세력가의 후원을 배경으로 유통지배권을 확대해 나가자 내어물전이 이를 견제하기 위해 외어물전의 적법성을 문제삼으면서 공격하였고, 외어물전은 이를 방어하는 형태로 분쟁을 벌이게 되었다. 내·외어물전간의 분쟁은 이후에도 魚物進排의 권리 등을 둘러싸고 수십 년간 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치세력의 후원을 업고 七牌·梨峴의 中都兒들과 결탁하면서 내어물전의 유통주도권에 도전한 외어물전은 순조 원년(1801) 육의전에 편입될 만큼 괄목할 만한 상업적 성장을 이루었다.0970)高東煥, 위의 글, 161∼184쪽.

 그러나 내·외어물전 모두 새로운 상인세력으로 떠오른 私商都賈와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만 하였다. 결국 이들은 육의전으로서 금난전권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사상도고에 의해 성립된 유통체계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0971)高東煥, 위의 글, 208쪽. 이러한 현상을 낳게 된 요인으로는 상품으로써의 어물의 특성과 이에 따른 중도아와의 부득이한 결탁과 같은 판매상의 제약, 사상도고의 성장과 이들에 의한 유통과정에서의 시전상인 배제 등이 우선적으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시전간의 장기간에 걸친 분쟁으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는 시전상인이 상호간의 상업적 능력과 힘을 한 곳으로 결집시키지 못한 채, 새롭게 편성되고 있던 유통체계와 질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던 것이 원인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나 여겨진다.

 시전인의 상호 분쟁은 미곡전의 경우에서도 나타났다. 17세기 후반 서강미전과 마포미전·문외미전 등이 신설되면서 상미전을 비롯한 미곡전 간의 분쟁은 장기간에 걸쳐 지리하게 계속되었다. 분쟁의 원인은 廛基와 字內收稅, 판매 품목 문제 등이었다. 이들의 분쟁은 결국 미곡시전의 상업적 세력의 약화를 초래하게 되었고, 미곡전인들은 시전간의 연합이나 상업적 연계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 채 미곡유통의 주도권을 미곡사상에게 넘겨주게 되었다.0972)이에 대해서는 吳 星, 앞의 책, 110∼132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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